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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불륜 때문에 아들이 자살?
이완용 불륜 때문에 아들이 자살?
일부 언론 '이완용 장남 묘' 보도…연구자 윤덕한씨 "사실 바탕해 기사 써야"

"친일파와 관련된 기사일수록 사실에 바탕을 두고 냉정하게 써야 한다."

국치일인 지난 8월29일 일부 언론에 보도된 '이완용 장남 무덤 발견' 기사들에 대한 '이완용 평전' 저자 윤덕한 (62)도서출판 중심 대표의 말이다. 80년 신군부 해직기자 출신(경향신문)으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기도 한 윤 대표는 이완용과 그의 가문에 대해 오랫동안 천착해 온 연구자다.

   
  ▲ 연합뉴스 8월29일자.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가장 많이 본 뉴스' 목록에 올랐다.  
 
   
  ▲ 지난달 29일 일부 언론이 보도한 '이완용 장남 묘 발견' 기사들(네이버 검색 화면)  
 
지난 29일 관련 보도를 낸 곳은 뉴시스, 연합뉴스, 노컷뉴스, 한겨레 등(네이버 기준). 기사는 대표적인 친일파 이완용의 장남 이승구 부부의 묘가 경기 고양시 향동동 야산에서 크게 훼손된 채 발견됐다는 내용으로, 특히 기사 출고일이 국치일이었던 만큼 포털사이트에서 '가장 많이 본 뉴스'에 오를 만큼 높은 관심을 끌었다.

윤 대표는 먼저 이승구의 묘가 이번에 처음 발견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자신이 '이완용 평전'을 펴낸 1999년 시점에도 이미 묘의 위치와 훼손 사실이 알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완용 평전'에는 "경기도 고양시 향동동에 있는 장남 이승구의 묘도 수난을 겪기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다. 매국노 아들의 묘라고 사람들마다 침을 뱉고 파손시켜 비석은 없어지고 값비싼 상석은 부서진 채 방치되어 있다"고 씌여있다.

특히 언론들이 이승구가 자신의 부인과 아버지의 불륜 사실을 알고 자살했다고 전한 것도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렸다. 뉴시스는 "우국지사 학자인 황현의 글에 따르면 이완용의 장남인 이승구는 자신의 부인과 아버지인 이완용의 불륜사실을 알고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소는 당대 절세의 미인이였던 부인 임걸구와 합장된 상태였다"고 보도했다.

연합뉴스는 고양시 문화재전문위원의 말을 인용, "문헌에 의하면 이완용의 장남인 이승구는 당대의 절세 미인이었던 부인 임걸귀와 아버지 이완용의 불륜사실을 알고 자살했으며 이완용의 호적에서도 제외됐던 불행한 인물"이라고 전했다. 한겨레도 "이승구는 아버지인 이완용과 불화로 호적에서 제외됐으며 이후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윤 대표는 이승구는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이전인 1905년 음력 7월, 자살이 아니라 병으로 죽었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이승구는 사망 당시 26세였다.

   
  ▲ 이완용 가족 사진(출처=이완용 평전)  
 
'이완용 평전'은 한일합병 전후 시중에 퍼진 '며느리와의 사통설'을 소개하고 이를 반박하는 데 책의 일부를 할애하고 있다. 당시 "을사조약 후 이승구가 일본 유학 중 귀국해 어느 날 내실에 들어가 보니 아버지가 자신의 처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었고, 그래서 '이제 나라도 망하고 집안도 망했으니 내가 죽지 않고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탄식을 하며 자살했다"는 소문이 그럴 듯하게 퍼졌다고 한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에도 이완용과 며느리와의 관계를 암시하는 기사가 몇 차례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윤 대표는 이러한 소문은 이승구가 실제로 죽은 시점과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윤 대표는 "황현의 기록이나 당시 신문기사들은 시대 상황과 민중의 정서를 짐작케 하는 자료이지, 그 자체를 곧바로 사실로 받아들일 일은 아니다"라며 "이완용에 대해 그런 소문이 퍼졌다는 것은 친일파에 대한 민중적 감정의 표출로 보인다"고 말했다. 윤 대표의 책에는 "이완용의 사생활은 당시는 물론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상당히 건전한 편이었다"며 술과 여자를 멀리하고 유일한 취미가 독서와 서예였다는 소개도 나온다.  

"이승구는 이완용의 첫 아들로 일제시대 중추원 참의를 지내 현재 친일 명단에 올라가 있다"는 한겨레 기사도 사실과 다르다. 이승구는 을사조약 이전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완용은 아들 승구와 항구를 두었는데, 승구가 아들 없이 죽자 항구의 아들 병길을 장손으로 입적시켰다. 이완용이 죽은 뒤 일제 후작 작위와 전재산을 상속 받은 병길은 조선귀족회 이사와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등을 지내며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

   
  ▲ 이완용 가계도. 장남 승구가 소생 없이 일찍 죽자 차남 항구의 아들 병길을 승구의 양자로 입적했다.(출처=이완용 평전)  
 
해방 이후 이병길은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돼 재산 2분의 1을 몰수받고 풀려났으며, 6·25전쟁 와중에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고 한다. 이완용과 차남 항구 부부의 묘는 전북 익산에 있었으나 1979년 증손자 석형(항구의 삼남 병주의 장남)에 의해 파헤쳐져 유골은 화장됐다. 이완용의 땅을 찾겠다고 소송을 냈던 증손자 윤형은 병길의 장남이다.

'이완용 평전'은 또, 1979년 이완용 묘가 파헤쳐졌을 때 1926년 장례 당시 함께 묻은 비단 명정(銘旌: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 등을 적은 기)이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 나와 이를 원광대 박물관에 비치했는데 국사학자 이병도씨(이장무 서울대 총장 아버지)가 원광대에서 이 명정을 입수, 자신의 집에서 태워버렸다고 한다는 이야기도 소개하고 있다. 책에 따르면, 이병도씨는 이완용의 손자뻘('병'자 항렬) 되는 친척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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