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중반 이후는 우리에게 ‘문화의 시대’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는 ‘정치의 시대’였던 80년대에 사회를 지배했던 정치적 담론들이 퇴조하면서 그 빈 공간을 다양한 문화적 담론들이 급격하게 메꾸던 시기였으며, 그에 따라 수많은 문화영역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비등했다. 변혁운동의 수단으로 영화판에 투신했던 젊은 감독들이 제도권으로 진입하면서 영화에 대한 고급한 접근이 시작됐던 것도, 소수 마니아들의 전유물이었던 재즈음악에 대한 대중적 수요가 폭발한 것도, 대체적인 수입문화로서 얼터너티브 록과 힙합이 자리잡은 것도 바로 이 때부터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이들 문화장르들은 우리 미디어 안에서 그 산업과 평단 모두가 일정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 EBS <애니토피아> ⓒ EBS
그러나 유독 애니메이션에 대한 담론만은 여전히 주변부에 머물러있다. 90년대 중반 애니메이션에 대한 산업적인 관심이 급증하면서도 만화영화는 저급하다는 편견은 여전했으며,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몇 차례의 국내 대작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들이 실패로 끝나면서 산업적인 자생력은 오히려 위축됐고, 그 빈자리를 해외자본이 점유하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어린이방송인 디즈니채널·니켈로데온이 케이블TV 시장에 진출한데 이어  일본의 5대 애니메이션 회사인 도에이·반다이·쇼프로·TMS·선라이즈 등은 스카이라이프의 인기채널인 애니원TV에 주주로 참여하고 있다. 국내 방송사를 중심으로 한 국산 애니메이션 제작도 일정정도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영화나 대중음악에 비하면 그 국제적 위상은 턱없이 낮다.

이 같은 산업적 부진은 결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교양을 높이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미디어, 특히 방송프로그램을 통해 국내외의 훌륭한 작품들을 대중에게 소개하고 양질의 작품들을 감별할 수 있는 심미안적 지평을 넓히는 데 실패한 결과 고급한 문화적 수요를 창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애니메이션 전문채널인 투니버스의 애니메이션 정보 프로그램인 <스튜디오 붐붐>, 애니메이션 음악 프로그램 <뮤즈클럽>은 사회적 편견에 반문하는 애니메이션에 대한 진지한 모색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정작 한 국가의 문화적 교양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지상파TV에서는 이와 같은 진지한 접근을 보인 애니메이션 전문프로그램은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영화소개 프로그램의 한 꼭지에 개봉작 소개 수준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우리 지상파TV에서의 애니메이션에 대한 접근의 거의 전부라고 봐도 좋을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거의 유일하게 본격적이고 고급한 시각으로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다루고 있는 프로그램인 EBS의 <애니토피아>(연출: 김훈석·김현우PD)가 가지는 문화적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애니토피아>는 해외의 수작과 작가에 대한 소개는 물론 애니메이션의 각 장르별 집중적인 분석을 통해 애니메이션이란 장르에 대한 시청자의 이해와 교양을 더없이 풍부하게 해주고 있다. 특히 흥미위주의 겉핥기식 소개가 아니라 특정 작품을 본격 분석하는 ‘어찌하여 이 애니는’과 국내 단편 애니메이션에까지 따뜻한 시선을 아끼지 않는 ‘애니를 만나다’와 같은 꼭지들은 다른 지상파3사의 어떤 영화소개 프로그램보다도 월등한 가치를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

진지한 작품을 희화화하거나 대자본이 투입된 대작에만 관심을 두는 등 문화적 담론을 천박하게 끌어내리고 있는 지상파TV들의 행태는 미학적으로나 산업적으로나 재앙에 가깝다. 이런 상황에서 EBS의 <애니토피아>와 같은 프로그램이 묻혀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우면서도 그만큼 안타까운 일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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