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해구 / 본지 객원논설위원·성공회대 교수
지난 12일 밤에 방영되었던 SBS TV의 <그것이 알고 싶다>는 그 동안 그 진상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을 야기시켜 왔던 1974년 문세광 8·15저격사건의 의문점들을 과학적인 근거에 바탕하여 체계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이 제기하고 있는 의문점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육영수 여사가 과연 문세광의 총탄에 맞은 것인가 하는 점이다. SBS가 의뢰하여 이루어진 총성 분석에 근거할 때, 문세광이 발사한 총격의 총성은 그 최초의 총성을 0초로 할 때 6초, 6.6초, 7.2초의 시점에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총성 분석은 문세광의 총성 이외에 다른 두 발의 총성도 여기에 섞여있음을 드러내주었는데, 6.9초와 7.4초의 시점에서 발생했던 총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발의 총성은 누가 쏜 것이었는가? 그것은 지금까지는 언급되지 않았던 문세광의 왼쪽 뒤편에 있던 경호원이 쏜 총격의 총성일 것이라는 것이다.

30년 전의 의혹 드러낸 과학적 총성 분석

이 같은 총성 분석에 따를 때, 다음과 같은 의문점들이 제기된다.

   
▲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의 범인 문세광  MBC
첫째는 육 여사가 누구의 총에 맞았는가 하는 점이다. 당시의 발표에 의하면, 육 여사는 문세광의 제3탄(SBS의 총성 분석에 의하면 6.6초에 총성이 울린 총격)에 의해 피격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SBS의 총성 분석에 따르면, 피격에 의해 육 여사의 몸이 움직여졌던 시점을 감안했을 때 그 피격은 6.9초의 총성, 또는 7.2초의 총성에 의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피격 시점이 6.9초의 전자일 경우 그것은 경호원에 의한 총격에 의해 육 여사가 피격된 것이 되며, 7.2초의 후자인 경우 그것은 문세광의 제4탄에 의해 피격된 것이 된다.

둘째는 당시의 발표에 따르면 문세광의 두 번째 총격 후 불발탄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SBS의 총성 분석은 문세광의 두 번째 총성 시점인 6초와 세 번째 총성 시점인 6.6초 사이, 즉 0.6초 사이에 또 한번의 방아쇠를 당긴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즉 불발탄의 총격 시점도 의문인 것이다. 
   
셋째는 당시에 7발의 총탄이 발사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탄흔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고 있다. 문세광의 첫 총탄은 자신의 허벅지에 맞았고, 두 번째 총탄은 연단에 맞았고, 뒤늦게 발사된 경호원의 총은 장봉화양에 맞았다는 점은 공통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제외한 제3, 4, 5, 6의 총격이 정확히 어디에 맞았는지, 그리고 그 탄흔이 어디인지는 주장마다 다르거나 분명치 않다. 기존의 정부 발표는 문세광의 제3탄이 육 여사를 맞혔고, 제4탄이 단상의 태극기를 맞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현장검증에 참여했던 이건우 전 서울경찰청 감식계장은 문세광의 제3탄은 태극기에, 제4탄은 천장에 맞은 것으로 주장한 바 있다.
   
넷째는 뒤늦게 발사되어 관중석의 장봉화양을 사망케 한 마지막 총격의 발사자가 기존에는 단지 경호원으로 알려졌는데, 이번 SBS의 조사에 따르면 그 총격은 당시 박종규 경호실장의 오발로 인한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부분 역시 기존의 주장과는 전혀 다르다.    

SBS 총성 분석에 따른 이 같은 의문점들은 당시의 발표 내용이 많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많은 의문점들은 당시 청와대 경호실과 관련되어 있다. 즉 당시 현장검증 전에 경호실에서 탄두를 수거해간 점, 경호원에 의한 두 발의 총격에 대한 언급이 은폐되었다는 점, 그리고 장봉화양 피격의 총탄이 박종규 경호실장의 오발이었다는 사실이 감추어졌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경호실과 관련된 이 같은 의문은 경호실이 중심이 되어 당시 사건의 내용을 상당 정도 조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야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권총을 숨겨가지고 들어온 문세광의 입국과정이나 비표 없는 기념행사장 진입과정도 의문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나아가, 당시 중부경찰서 최종환 정보과장이 비표없이 기념식장 로비의자에 앉아있던 문세광을 검문했을 때, 그 옆에 있던 장성준 경호원이 문세광을 "어느 장관을 만나러 온 사람"이라 말함으로써 검문을 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대목에서 의문은 더욱 커진다. 장 경호원은 사건 직후 종로서에 수감되었다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김대중 납치사건 덮어버린 문세광 저격사건

한편, 문세광 8·15저격사건은 다른 측면에서도 많은 의문점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사건 직후 우리 정부는 문세광이 북한과 조총련의 지시를 받아 박 대통령 저격의 거사를 벌이게 되었다고 주장했고, 그 근거로서 문세광의 자백을 내세웠다. 그러나 일본측 조사는 이 같은 주장을 부인했다. 조총련과 관계가 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 일본측 주장이다. 여기에서도 의문은 제기된다. 과연 문세광의 범행은 북한 및 조총련에 의한 사주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북한과는 관계가 없는 범행, 즉 김대중 사건 등으로 인한 한국 독재정권에 대한 문세광의 개인적 분노에서 비롯된 범행인지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문세광 8·15저격사건은 당시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인해 궁지에 몰렸던 한국정부가 이를 통해 상황을 역전시키려 했던 의도도 보여주고 있다. 당시 한국정부는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하여 사건현장에서 주일대사관 김동운 1등서기관의 지문이 발견됨으로써 수세에 몰려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문세광 저격사건을 계기로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에 그 법적, 도덕적 책임을 주장함으로써 그 수세국면을 역전시키고자 했다. 결국 저격사건으로 인한 한일간의 갈등은 일본 자민당의 시나 특사의 파견으로 마무리되었지만, 결국 그것은 김대중 납치사건을 유아무야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문세광 8·15저격사건은 국내적으로는 북한과 일본에 대한 항의를 통해 박정희정권의 독재를 강화했던 측면이 없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대해서는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인해 궁지에 몰렸던 한국정부의 입지를 전환시킬 수 있었던 결정적인 수단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이전에 발생한 사건이지만, 이 사건이 갖는 의문점은 지금까지도  이처럼 크다. 현재 일부 자료들이 공개되고 있지만, 더 많은 자료의 공시 사건과 관련된 당사자들의 양심선언, 그리고 당시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통해 이 같은 의문점들은 해소되어야 한다. 그런 작업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 그리고 당시 정권의 드러나지 않은 모습에 대해 보다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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