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목동 방송위원회 로비에 들어섰다. '3자 합의 이행 및 동양제철화학 결단촉구'와 '단식 4일째'(8일)라는 플래카드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플래카드 뒤편에서 iTV 노조원 몇 명이 담요를 덥고 잠이 안 오는지 뒤척이고 있고 일찍 눈이 떠진 노조원들은 조간을 살피고 있다. 회전문이 돌아갈 때마다 찬바람을 안고 들어와 로비는 체감온도가 낮게 느껴졌다.

공익적 민방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 시작

   
▲ iTV노조원들이 서울 목동 방송위원회 로비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김상만 기자
10일 재허가 청문절차를 앞두고 있는 iTV는 경영진과 노조, 지배주주 사이에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인천지역민방으로 97년 개국한 iTV는 지난 6월 계양산 디지털TV 중계소 설치허가 등을 얻어내는 등 외형적으로 발전을 이뤄냈다.

그러나 주주대리인이었던 박상은 전 회장이 인천시장에 출마하기 위해 iTV를 이용했다는 의혹이 불거지고, 방송경력도 없는 사람이 상무 겸 편성국장으로 임명되면서 구성원들 사이에서 iTV가 방송사로서 제 역할을 못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실제로 iTV는 동양제철화학이 인천지역에 매립한 폐석회 문제 등을 한번도 보도하지 못하는 등 지역민방이면서도 지역사회의 현안 등을 다루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졌던 것이다.

iTV 노조는 이러한 문제를 인천지역 시민단체들과 연대해 개선하고자 했고, 경영과 소유의 분리만이 방송의 독립성을 지킬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 한 겨울, 방송위 로비에서의 농성도 방송현업인의 뜻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대주주 눈치보다 지역민방으로서 제 역할 못해

8일로 단식 4일째에 들어서면서 얼굴이 많이 상했지만 모두들 표정은 밝았다. 수염이 덥수룩해진 iTV 보도국 기자 A가 자리 한쪽을 내어주며 반갑게 맞는다. 시멘트 바닥에서 찬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 스티로폼으로 덧대고 그 위에 전기장판을 깔았다. 기자와 PD 등 노조원 8명이 이곳에서 무기한 단식을 하고 잠을 잔다.

"이제 동양제철화학에 희망을 걸고 있는 노조원은 아무도 없어요." 제작국 PD B는 iTV 구성원들의 심경을 이렇게 전했다.

PD B가 말을 이었다. "개국한지 7년 동안 매번 같은 문제로 싸워왔던 것 같아요. 동양제철화학에 일말의 기대를 갖고 있었지만 노조가 자구노력을 포함한 수정합의문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하고 방송현업인들의 목소리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아요. 동양제철화학은 방송사를 경영할 자격이 없습니다."

기자 A가 그 말을 받았다. "처음에는 노조원들도 공익민방에 대해 반신반의했는데, 이번 싸움을 거치면서 왜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필요한지 알게됐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아무나 방송사를 소유해서는 안 되고 언론사를 경영할만한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 기운을 차리기 위해 잠을 청하고 있는 iTV노조원들.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 옆에 누워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김상만 기자
"차라리 재허가가 취소돼 대주주가 바뀌는 것이 낫다"는 기자 C는 "동양제철화학에 불만을 얘기하라면 많지만 솔직히 이제는 공익민방이 된 이후가 더 걱정"이라고 말했다. 공익민방이 됐을 때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지 못하거나 지역발전에 기여하지 못하면 지금보다 더 욕을 많이 먹을 것 같아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그는 "하루빨리 복귀해 즐겁게 방송해보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편, iTV 노조는 지난 3일 퇴직금 50% 삭감과 임금동결을 포함한 노-사-대주주 합의문을 제시하고 재허가 심사를 통과하자고 동양제철화학에 제안했지만, 동양제철화학은 8일 공익민방을 이해하기 어렵고 소유구조 개편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며 노조의 제안을 거부했다.

"돈이 많다고 아무나 방송사 소유해서는 안돼"

기자 A가 화제를 바꿔 말했다. "iTV 근처에 쌓인 폐석회 보셨어요? 우리도 얼마 전에 가 봤는데, 폐석회가 거의 산처럼 쌓여있습니다. 이런 곳 옆에서 살았다니 정말 기가 막히더라구요. 아마 근처 아파트 주민들도 이 사실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걸요."

폐석회 얘기가 나오자 '에메랄드 호수'와 '관광투어'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예전 iTV 노조원들을 따라 동양제철화학이 벌금을 물면서 폐석회를 쌓아둔 곳을 둘러봤었다. 수십만 평에 이르는 땅에 하얀색의 폐석회가 안전망도 없이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가루가 주변 도로와 주거지로 날아간다고 한다. iTV 노조원들도 놀라면서 이 곳을 투어상품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얘기하곤 했다. iTV 노조원들은 폐석회 곳곳에 파인 큰 물웅덩이를 보고 에메랄드 색깔처럼 예쁘다며 이를 '에메랄드 호수'라고 불렀다.

"곁에 있는 동지 웃음보며 힘든 일 견뎌"

아픈 곳은 없냐고 물었더니 보도국 기자 A가 조금 어지럽지만 오히려 담배도 끊고 술도 못 먹어 몸 상태는 더 좋아졌다고 농담을 건넨다. 본사에서도 여성노조원을 포함해 8명이 단식을 하고 있는데, 아침마다 전화해서 '거기 몇 명 쓰러졌냐'라고 묻는 게 아침인사라고 한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지원조가 항상 대기해 이들의 건강상태를 체크하고 있다.

문제는 몸이 힘든 것보다 iTV 사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탈퇴하겠다는 노조원도 생기는 모양이다. 최근 노조원 3명이 노조탈퇴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회사가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고수해 이번 월급도 70%만 지급됐습니다. 회사에서도 오는 14일까지 업무에 복귀하지 않으면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겠다고 해서 걱정하는 노조원들이 많습니다. 이게 협박이지 뭡니까". PD B는 탈퇴한 노조원들이 이해는 되지만 힘이 빠진다고 말했다.

자리를 막 일어서려는데 '밥을 먹자'고 한다. '단식하는데 무슨 밥이지?'하며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 소금 조금과 약간의 물을 나눠준다. 소금을 입에 넣고 물을 삼키는 것이 전부지만 다들 먹는 폼은 갈비를 뜯는 것처럼 경건하다. 한 통에 5만원짜리 죽염이라며 모두들 웰빙단식이라고 한마디씩 거든다. 사탕을 먹으면서 포만감이 느껴진다는 한 기자의 농담에 주위 사람들이 한바탕 웃었다.

다음 날까지도 회사에서는 14일까지 업무복귀를 하라고 했으며, 동양제철화학은 침묵을 지켰다. 달라진 상황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뀐 것이 있다면 '단식 5일째'(9일)라는 숫자 뿐이었다.

* 편집자주=기사로 인해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실명을 명기하지 않았습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