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1월25일은 유엔(UN)이 공식 제정한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이다. 도미니카공화국 정부의 독재에 대항하다 사망한 세 자매를 추모하기 위해 1981년 라틴아메리카 여성협회가 처음 제정했고, 전 세계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일어나는 젠더 기반 폭력의 심각성을 알리고 이를 추방하기 위해 이어져왔다. 내달 1일까지 이어지는 세계 여성폭력 추방 주간을 맞아 국내 시민단체들은 여성 폭력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촉구했다. 정치권에선 여성가족부의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 예산 삭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 예산 삭감에 정치권·시민단체 반발 빗발쳐

여성가족부는 지난 25일부터 “함께 만드는 여성 폭력 없는 안전한 일상”을 주제로 여성폭력 추방 주간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내년도 여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지원 예산이 삭감돼 피해자 보호 체계가 약화될 것이란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전국 12개 협의회 및 연대체, 568개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 관련 단체가 결성한 ‘여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지원 예산 감축 철회 촉구 공동행동’은 지난 23일 여가부에 피해자 예산 삭감에 대해 묻는 공개 질의서를 보냈다.

공동행동은 “2024년 여가부 예산안에 따르면 여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지원 예산은 총 120억3300만 원 삭감됐다. 여가부는 국정감사 서면 질의 답변에서 예산 삭감 관련에 ‘시·도 담당자, 현장 관계자 회의 등을 통해 상황을 공유하는 등 사업추진에 현장의견을 반영해 나가겠다’고 답변했지만 공동행동의 장관 면담 요청에 권익증진국장과 면담이 가능하다고 했다”며 “그간 현장 상황을 무시하는 일방적인 통보,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의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는 예산안과 정책 기조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바, 22일 장관 면담을 재요구하고 기다리고 있다. 23일 질의서를 발송해 30일까지 회신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 정부서울청사 여성가족부 복도 모습. ⓒ 연합뉴스
▲ 정부서울청사 여성가족부 복도 모습. ⓒ 연합뉴스

정치권에서도 여가부의 예산 삭감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정부가 대한민국의 여성 인권을 후퇴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지난 25일 논평에서 “내년도 예산안에서 디지털 성범죄 예방교육 콘텐츠 제작, 인신매매 방지 및 피해자 지원, 성범죄자 재범방지 교육 등을 전액 삭감하거나 일부 깎았다”며 “민간 고용평등상담실 예산 역시 모두 삭감돼 일터에서 겪는 성희롱과 성폭력에 대한 상담은 사실상 중단될 위기”라고 했다. 

강 대변인은 “위안부 판결에도 대일 굴종 외교를 고집하고, 여성가족부 폐지를 호언장담했던 윤 대통령이 본인의 여성관을 그대로 담은 여성폭력 방치 예산안을 편성한 셈”이라며 “민주당은 피해자 치유와 회복을 위한 예산을 확보해 윤석열 정부의 ‘여성 폭력 방치 예산’을 바로 잡겠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여성폭력이 개인 간의 갈등을 넘어 성차별적 구조에 따른 사회적 문제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며 “여성폭력을 막기 위해 정치권 역시 반성해야 한다. 부적절한 언행으로 국민 여러분께 더는 실망을 안기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김희서 정의당 수석대변인도 지난 25일 “세계 여성 폭력 추방의 날이 제정된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여성 폭력은 우리 사회 일상 곳곳에 만연해 있다. 많은 여성들이 폭력 피해에 노출돼 있고, 여성 폭력을 근절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쉬이 달라지지 않는다”며 “여성 폭력은 우리 사회가 반드시 끝장내야 할 반인도적 범죄다. 성별과는 상관없이 누구나, 언제 어디에서든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받는 성평등한 사회로 나아갈 때 우리 사회에서 여성 폭력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김 대변인은 “내년 정부 예산안에는 ‘여성 폭력 방지 및 피해자 지원 예산’ 120억 원을 비롯한 많은 성평등 예산이 대거 삭감돼 있다. 정부는 말 따로 행동 따로인 어불성설 그만두고, 진정으로 여성 폭력의 피해자들을 지원할 실천을 보여줘야 한다”며 “성평등을 지우는 것은 시민의 안전한 일상을 지우는 일이다. 정의당은 여성에게 안전한 일상이 깃들 때까지, 여성 폭력이 근절되고 성평등한 사회가 이룩되는 날까지 투쟁과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고 했다. 

“여성폭력에 대책 없이 논란만 일어나는 나라…국가가 진짜 죄인”

지난 25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선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 공동행동 <젠더폭력, 누가 죄인인가> 집회가 열렸다. 32개 여성단체, 시민사회단체 등의 공동주최로 열린 행사는 여성과 모든 약자들의 안전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촉구하는 자리로 기획됐다. 참여자들은 최근 경남 진주의 한 편의점에서 있었던 숏컷 여성 노동자 폭행 사건에 분노하며, 정부가 가해자에 우호적인 사법 환경을 방치하고 젠더폭력 피해자 지원 예산 삭감, 여성가족부 폐지를 밀어붙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참가자들은 선언문에서 “스토킹·교제 살인·신종 디지털 성폭력 등 점점 늘어가는 여성폭력의 이름들, 거리에서 일어나는 무차별한 폭력, 사랑하던 이에게 겪게 되는 죽음에 이르는 폭력 등이 뉴스에 나와도 대책이 아니라 논란이 일어나는 나라, 여성폭력의 원인인 구조적 성차별을 부정하는 대통령, 여성폭력과 성차별 해결의 국가책임을 강화하는 대신에 여가부를 폐지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 나라”라며 “그렇게 올해 대한민국은 여성에게는 가장 위험한 나라이자, 국가는 나 몰라라를 넘어서 이미 하고 있던 예방 사업과 피해자 지원도 빼앗는 나라가 됐다”고 비판했다. 

▲ 2023 세계여성폭력추방의날 공동행동 피켓. 사진=정치하는엄마들 제공.
▲ 2023 세계여성폭력추방의날 공동행동 피켓. 사진=정치하는엄마들 제공.

참가자들은 “우리는 여성폭력과 젠더폭력이 존재함을 세상에 외친다. 대한민국 여성폭력의 심각성과 함께 반드시 해결되고 추방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범죄자 몇 명의 문제를 넘어서, 피해자 비난과 솜방망이 처벌로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의 문제를 외친다”며 “2016년 한 여성의 죽음이 대한민국에서 여성들과 폭력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을 불러 모았던 강남역에 다시 모여, 올해 젠더폭력, 여성폭력에서 국가가 진짜 죄인임을 선언한다”고 했다. 

▲ 친족성폭력 생존자들과 연대하는 시민 50여 명이 지난 25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친족성폭력 피해자 생존기념축제를 열었다. 사진=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 친족성폭력 생존자들과 연대하는 시민 50여 명이 지난 25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친족성폭력 피해자 생존기념축제를 열었다. 사진=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친족성폭력 생존자들과 연대하는 시민 50여 명도 지난 25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친족성폭력 피해자 생존기념축제를 열었다. 거리에 나선 참가자들은 친족성폭력 피해생존자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며 친족성폭력에 대한 인식 개선, 피해자 인권 보장, 성폭력 생존자 주거권 보장 등을 주장했다. 이날 참가자들은 “피해자들이 2차 피해를 받지 않고 성폭력 피해 사실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고 보호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친족성폭력 피해자 분들이 조금 더 쉽게 용기를 내어 신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달라”고 말했다.

▲ 친족성폭력 생존자들과 연대하는 시민 50여 명이 지난 25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친족성폭력 피해자 생존기념축제를 열었다. 사진=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 친족성폭력 생존자들과 연대하는 시민 50여 명이 지난 25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친족성폭력 피해자 생존기념축제를 열었다. 사진=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대부분 피해가 가정 내에서 미성년자일 때 발생하는 친족성폭력 특성 상, 피해자가 당시 경험을 성폭력으로 인지하기 오래걸려 공소시효가 만료돼 버리는 경우가 많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지난해 통계에 따르면, 상담시점에 공소시효가 이미 만료된 경우는 59.7%였다. 이날 축제에 참가한 생존자들은 공소시효 폐지를 주장했다.

축제에선 정상가족을 형상화하는 집모양 판넬에 붙어있는 벽돌과 창문을 부수는 ‘정상가족 해체현장’ 퍼포먼스도 진행됐다. 참여자들은 사전에 벽돌에 “정상가족 이름 아래 은폐되는 폭력, 정상가족이 유지되도록 만드는 것” 등을 적었다. 이들은 정상가족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문제라고 규정하는 사회에 반대하며 “서로 연결될 권리”, “상호 돌볼 수 있는 사회”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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