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언 교육인적자원부 차관보가 지난 10월8일 오후 정부중앙청사 브리핑룸에서 고교 등급제 실태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거짓이라도 우기면 참말 행세를 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하물며 대학까지 그런 거짓 강변에 편승하는 사회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고교등급제를 실시한 것으로 밝혀진 일부 대학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말의 비틀림 정도의 심각함을 잘 보여준다.

고교등급제란 내신 성적 반영과 학생 선발 때 고교별 차이를 두었다는 것이다. 이들 대학은 그 동안 고교등급제는 절대 ‘도입하지 않았다’고 강변했다. 교육부 실태조사는 그러나 이런 주장이 거짓임을 밝혀냈다. 이화여대와 연세대 고려대가 내신과 서류 평가에서 고교등급제를 적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고교별 차이를 ‘보정’은 했지만 등급은 없었다”

그러자 이들 대학은 한결같이 말을 바꾸었다. 현존하는 고교별 학력차이를 ‘보정’한 것이라고 항변했다. 고교별 차이를 반영하지 않은 기계적 내신 적용이야말로 ‘불공정’하다고 반박했다. 교육부가 이렇게 꼬투리를 잡으면 자체 전형 등 ‘따로 갈 수밖에 없다’고 협박하기까지 했다.

참으로 뻔뻔스럽다. 내로라하는 대학들이 어찌 이런 억지를 부릴까. 지금처럼 항변할 것이라면 처음부터 그런 사실을 밝히고 그 정당성을 설파했어야 옳다. ‘참고자료’라는 교활한 수법으로 법망을 피해가고, 거짓으로 대중을 기만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거짓에 대해 자성하는 목소리는 찾을 수 없다. 다들 알고 있었을 총장이나, 교수들이나 자신들의 ‘거짓’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다. 오히려 적반하장이다. 차제에 확실하게 돌파하자는 기세다.

그 응원세력의 목소리도 크다. 조선일보는 “고교등급제 논란이 결국 사실로 밝혀짐에 따라, 대입전형 때 고교간 ‘학력격차를 반영하는 방법 개발’과 ‘내신 부풀리기를 막는 방안’이 교육계의 현안으로 떠올랐다”(10월 9일자 1면 머리기사)고 썼다. 중앙일보는 같은 날짜 사설에서 “엉터리 학생부를 제공하는 고교와 교사의 책임이 더 크다”고 옹호했다. 동아일보 또한 고교등급제 파문의 핵심은 ‘학력격차’(사설)라고 거들었다. 한마디로 엄존하는 고교간 학력 격차를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언뜻 보면 그럴 듯한 주장이다. 그러나 이리 주장하자면 대학 입시를 ‘성적순’으로 단일화하자고 주장해야 한다. 지금도 수능과 논술, 면접고사에 주로 의존하는 ‘정시 모집’이 있다. 정시모집에도 내신이 반영되지만 실제 반영 비중은 아주 작다. 고교별 격차가 그리 문제가 된다면 ‘정시’로 왕창 뽑으면 될 일이다.

대학 입시 제도의 변천사는 ‘성적순 선발’의 획일성에서 벗어나자는 몸부림이었다. 대학의 자율 선발권을 주장하는 사람 가운데 대학 본고사의 부활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학 본고사 때야말로 대학이 무슨 자율 선발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가. 시험 문제를 통해 선발의 기준에 변화를 주려 했지만 그것은 ‘성적’이라는 획일적인 잣대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었다.

오늘날처럼 대학이 그나마 재량껏 학생들을 선발할 수 있게 된 것은 ‘수시 모집’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기준의 선발 제도가 도입되면서부터다. 그 바탕 위에서 기여입학제까지 주장하고 있는 대학과 그 응원부대들이다.

교육을 포기한 교육기관과 검증을 포기한 언론기관

그렇다면 최소한 그 기준의 다양성은 살려나가야 한다. 성적으로 뽑을 때는 성적으로, 적성이나 자질, 사회적 형평이나 지역적 안배 등 다른 기준으로 할 때는 그 취지와 기준에 충실해야 한다. 다양한 수시 선발에서 내신 반영의 취지는 기본적으로 고교별, 지역별 ‘차이’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 자체가 그런 격차와 차이를 뛰어넘자는 취지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도 ‘강남’이나 ‘특목고’ 출신이 유리한 ‘성적 기준’을 다른 선발 기준에 그대로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정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성적 분포에서 나타나고 있는 ‘강남’이나 ‘특목고’의 우월적 경향 또한 이들 학교 교육이 거둔 교육적 성과라고 보기도 어렵다. 과거 선배들의 성적분포와 입학 실적으로 그 후배들의 가능성을 예단하는 것은 과학적일지는 모르나 교육적이지 않다. 단적으로 교육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처사다. 

이 대학들의 거짓과 기만에는 눈감고, 고교간 학력격차가 문제라고 주장하는 언론들 또한 언론으로서의 정체성이 의심받기는 마찬가지다. 대학의 거짓이나 기만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인다. 너무 당연시해 그 동안 그걸 몰랐느냐고 묻는 투다.

하지만 그렇다. 백번 양보해 이들 대학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치자. 그래도 이들 대학들이 이미 ‘반영한’ 학력격차 보정 방법의 타당성은 당연히 검증하고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찬반으로 쪼개고 싸움 붙이는 데 열심이다.

과거사 청산 노력에 대해서는 ‘소모적인 과거회귀’라고 비판하다가도 한 정치인의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냉전적 교과서 비판에는 열을 내던 언론들이다. 보름이면 서울함락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대문짝만하게 보도해 놓고서도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그 대응방안에 대한 후속보도는 없다. 대책 없는 편가르기 보도의 다양한 변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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