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7년 발행된 ‘민간인쇄조보’ 원본.
▲ 1577년 발행된 ‘민간인쇄조보’ 원본.

[한성부] “서울에 우역이 크게 돌아 서로 전염되어 폐사하기를 겨울에 이르도록 그치지 않고 있으며, 길에 쓰러져 죽은 소의 수가 무려 600마리나 되옵니다. 지금이 공역의 때인데 수레만 있고 소가 없어, 뜰에 가득 모인 사람들이 슬피 울부짖고 있으니 그 참상을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1577년 11월15일자 민간인쇄조보의 한 대목) 

1577년 선조 10년. 한양의 민간업자 여러 명이 돈을 벌기 위해 의정부와 사헌부로부터 발행 허가를 얻어 승정원의 조보(일종의 관보) 가운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 뽑아 정리해 목활자(금속활자 일부 포함)로 인쇄, 각 관청이나 외방저리(지방 수령이 한양에 파견한 향리로 일종의 연락관)에 판매했다. ‘민간인쇄조보’ 탄생에 가장 반겼던 건 사대부들이었다. 

1508년부터 발행된 것으로 알려진 필사조보의 경우 속기여서 읽기가 매우 불편했고, 대중에게 공개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쉽게 읽을 수 있고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판매하는, 주요 정보가 핵심만 요약된 일간신문이 등장했던 것. 더욱이 활자조판을 이용해 경제성까지 높였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이 신문을 선조가 봤고, ‘사국史局을 사설화하고 국가기밀을 누설할 가능성이 있다’며 즉시 폐간시켰다. 이후 발행에 관련된 30여명을 잡아들여 혹독하게 문초한 뒤 이듬해 1월 모두 유배를 보냈다. 민간인쇄조보 발행 기간은 약 100일 정도로 추정되며 그 뒤 1883년 한성순보가 나올 때까지 조선에서 인쇄신문은 나오지 못했다. 

역사 속에만 존재했던 민간인쇄조보는 2017년 4월 영천시 소재 용화사 주지인 지봉스님이 발굴하며 440년 만에 세상에 등장했다. 발굴된 민간인쇄조보 크기는 가로 40cm, 세로 29cm로 타블로이드 판형에 가까웠다. 석간신문이었으며 총 4페이지로 분량은 한자로 평균 1000자, 한글로 풀면 3000자(200자 원고지 15매) 수준이었다.  

조선시대 언론사를 주 전공으로 연구한 김영주 경남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명예교수는 “영리를 목적으로 민간인이 발행하고, 활판 인쇄술을 최초로 채용해 발행했다는 점에서 세계 최초의 활판인쇄 상업 일간신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독일보다 83년, 중국보다 61년 앞서 신문을 만들었던 셈이다. 돌이켜보면 한반도는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본(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가진 ‘인쇄문화 선진국’이었다.

▲ 1577년 발행된 ‘민간인쇄조보’ 사본.
▲ 1577년 발행된 ‘민간인쇄조보’ 사본.

‘신문’에는 어떤 정보가 있었을까. 인성왕후의 병환부터 쾌유를 비는 기도제, 혜성의 일종인 ‘치우기’ 출현, 소 전염병 창궐로 인한 공역 문제 발생 등이 담겨 있었다. 임금에게 올린 보고 내용과 의정부를 비롯한 행정부 소식, 관리들의 인사 정보도 빈번하게 등장했다. 홍수·가뭄 등 천재지변에 대한 왕의 자책도 확인할 수 있었다. 통치자에 대한 ‘하늘의 꾸짖음’이 자연적 이변으로 표현된다고 인식했던 조선시대를 감안하면 홍수·가뭄·혜성 등을 다룬 기사는 왕을 겨냥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김은규 한국언론정보학회장은 6일 ‘제5회 민간인쇄조보 국제학술심포지움’에 앞서 진행한 기자간담회에서 “그동안 세계적으로 알려진 최초 일간신문이 독일에서 발견된 1650년이었다. 우리는 1577년 민간인쇄조보가 정기 발행된 기록이 있었지만 실물이 없어 증명하지 못했는데 찾아냈다”며 “이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도 “우리 인쇄 유산의 제대로 된 가치를 널리 알려야 한다”고 밝혔다. 지봉 스님은 “조선시대 첫 폐간 사건을 떠올리며 언론의 소중함을 되새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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