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가 봉오동 청산리 전투 대승의 주역인 홍범도 장군의 육군사관학교 흉상을 철거 이전하기 위해 홍 장군의 자유시참변 연관설 등을 단정적으로 표현해 논란이다.

독립운동 역사를 지우고 과도한 색깔론을 입히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국방부의 주장은 국가보훈부 공훈록의 기재 방향과도 배치된다. 이에 기자들은 국방부의 이 같은 시도가 “어설프다”, “부끄럽고 천박하다”,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국방부는 지난 28일 저녁 출입기자들에 보낸 입장 자료 ‘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관련 국방부 입장’에서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홍 장군의 흉상을 두고 “육사의 전통과 정체성, 사관생도 교육을 고려할 때 소련공산당 가입 및 활동 이력 등 논란이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육사에, 사관생도 교육의 상징적 건물인 충무관 중앙현관에 있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논란이 있어 왔다”고 밝혔다. 특히 국방부는 “장군께서 1921년 소련 자유시로 이동한 이후 보이신 행적과 관련해서는 독립 운동 업적과는 다른 평가가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라며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고, 소련 공산당의 자유시 참변재판에 재판위원으로 활동한 사실, 자유시 참변 발생 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소련 적군 제5군단 소속 ‘조선여단’ 제1대대장으로 임명 등의 역사적 사실이 있음”이라고 썼다.

국방부는 “이로 인해 1921년 6월 러시아공산당 극동공화국 군대가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을 몰살시켰던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음”이라며 “구체적으로, 1991년 한·소 수교 직후 발굴한 소련 측 정부문서에 따르면, 홍범도 장군이 1930년대에 소련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기 위해 작성한 이력서에 ‘자유시 유혈사태에 대해 보고하기 위해 한인 빨치산 지대 대표단원 자격으로 레닌 동지를 만나러 모스크바로 갔다’로 되어 있다는 것”이라고 기재했다. 자유시 참변사태는 1921년 6월에 자유시에서 무장해제를 거부한 독립군이 공격당한 사건인데, 국방부는 “홍범도 장군은 순순히 무장해제하는 편에 섰다는 평가임”이라며 “독립군측이 400명에서 600명까지 사망하였고, 약 500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을 재판하는 위원으로 참가한 것임”이라고 추측성 주장을 폈다.

▲KBS가 지난 28일 뉴스에서 홍범도 장군의 공산주의 경력을 살펴본 내용을 방송하고 있다. 국방부에 있는 홍범도 장군흉상. 사진=KBS 뉴스9 갈무리
▲KBS가 지난 28일 뉴스에서 홍범도 장군의 공산주의 경력을 살펴본 내용을 방송하고 있다. 국방부에 있는 홍범도 장군흉상. 사진=KBS 뉴스9 갈무리

 

또한 국방부는 “홍범도 장군의 빨치산 증명서에는 활동기간이 1919∼1922년으로 기록되어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에도 빨치산으로서 참가했다는 의혹도 있음”이라고 기재했다.

국방부는 “1922년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개최한 ‘극동민족혁명단체 대표대회’에 한인대표 52명의 일원으로 참석하였고, 동년 레닌으로부터 권총, 상금, 친필서명된 ‘조선군대장’ 증명서를 접수하였으며, 1927년에는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대한민국 공식 기록에는 찾아볼 수 없으며, 자유시 참변을 ‘당한’ 피해자로 나온다는 점에서 역사적 공식 기록과 배치된다는 지적이다. 국가보훈부에 기록된 독립유공자 공적정보(1987년 발간된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 홍범도 기록을 보면, “만주에서 독립군 영수(국민회 소속 대한독립군 사령) 김좌진 장군과 호응하여 혁혁한 공적을 세웠는데, 1907년 갑산에서 차도선, 송상봉, 허위 등과 함께 거의(의병을 일으켜), 북청에서 일본군 1개 중대를 섬멸하였고, 1920년 만주 간도에서 일병을 섬멸”한 공적이 기재돼 있다.

특히 홍범도 장군에 대한 보훈부 독립유공자공훈록은 자유시 참변과 관련해 “노령(露領)지역으로 이동한 독립군단은 자유시(自由市)를 근거지로 삼고 소련군과 긴밀한 접촉을 하였다”며 “그러나 1921년 6월 소련 공산당의 배반으로 독립군은 무장이 해제되고 포로가 되는 등 소위 ‘자유시참변’을 겪게 되었다”고 기록했다.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적정보에 나온 홍범도 장군의 공훈록(1987년)에 자유시 참변을 당한 대목이 나온다. 사진=국가보훈부 공훈록 갈무리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적정보에 나온 홍범도 장군의 공훈록(1987년)에 자유시 참변을 당한 대목이 나온다. 사진=국가보훈부 공훈록 갈무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에는 자유시 참변을 두고 “청산리 독립전쟁 후 홍범도 부대와 김좌진 부대는 1920년 12월 미산(密山)에 모였고, 1921년 6월 흑룡강을 건너 노령 이만으로 갔다가, 자유시 알렉세에스크에서 이른바 ‘자유시 참변’(흑하 사변, 경신참변)을 당하였다”며 “홍범도와 대한독립군은 사할린의용대의 주둔지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피해를 별로 입지 않았으나,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은 사할린의용대와 함께 있다가 큰 피해를 입었다”고 썼다. 주로 피해를 당했다고 기술되어 있을 뿐 홍범도 장군의 책임론이 일절 나오지 않는다.

이에 기자들도 국방부의 역사적 사실 뒤집기 시도가 어설프다는 점을 지적했다.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은 29일 국방부 정례브리핑에서 ‘홍범도 장군 이전 검토를 하게 될 경우 역사학계, 특히 독립운동사를 연구한 외부 전문가, 보훈부와 논의가 이루어지나’라는 세계일보 기자 질의에 “군 내부적으로 판단해 어떤 결론이 내려질 수 있으면 굳이 외부의 학계나 또는 이런 협의는 필요 없을 수도 있을 것 같고, 군 내에도 역사나 전사를 연구하는 교수, 학자, 또 연구기관도 있다”고 답했다.

이에 이 기자가 국방부 입장자료를 두고 ‘자유시 참변에 홍범도 장군이 개입했다거나 마치 우리 독립군을 소탕한 주범처럼 읽혀지도록 되어 있다’, ‘역사학계에서도 매우 논쟁이 많은 분야고, 권위 있는 학자들의 공론화 과정이 없으면 권위를 매우 잃을 수도 있다고 판단되는데, 그런 절차를 밟아야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자 전하규 대변인은 “지금까지 알려진 군 내외 자료 또 확인된 내용들을 토대로 입장을 정리해서 알려드린 것”이라고 답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인명사전에 기록된 홍범도 장군의 독립운동 내역 가운데 자유시참변 대목이 나온다. 사진=독립기념관 자료 갈무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인명사전에 기록된 홍범도 장군의 독립운동 내역 가운데 자유시참변 대목이 나온다. 사진=독립기념관 자료 갈무리

 

이어 JTBC 기자가 ‘러시아 공산당 극동공화국 군대가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을 몰살시켰던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음이라고 명시적으로 써놨던데, 공식 자료에는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는 기록 자체가 없다는 게 학계의 입장이지 않느냐’, ‘의혹이라고 단정적으로 낼 만한 판단 근거가 궁금하다’고 질의하자 거듭 전 대변인은 “확인된 사실을 가지고 말씀드린 것이고, 자유시 참변 연관성에 대해서도 여러 학계 의견이 있는 걸로 알고, 여러 문서에 따르면 소련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기 위해서든지 작성한 이력서에 관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답했다. 소련에 낸 문서에 ‘자유시 참변에 참가를 했던 홍범도 장군이 직접 기술했다’, ‘자신이 가담했다는 내용을 소련에 말한 자료를 확보했다는 거냐’는 이어진 질의에 전 대변인은 “이력서 내용이 있다는 것”이라며 “그런 문서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답했다.

그러나 SBS 기자가 이 같은 답변내용을 근거로 ‘그 얘기는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서 우리 독립군을 살해하는 데 가담했다는 내용이 된다’고 확인을 요구하자 전 대변인은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건 아니다”라며 “만약에 그렇게 말씀드렸다면 제가 잘못 드린 것 같고”라고 답변을 번복했다. 이 기자가 ‘자유시 참변에 직접 가담한 게 아니라 이후에 사후 정리 과정에 홍범도 장군이 개입했을 수 있다는 의혹이지 않느냐’고 질의하자 전 대변인은 “네, 맞는다”라고 답했다. 이 기자는 ‘자유시 참변에 이분은 절대 안 들어갔다’, ‘그런데 그렇게 읽히게 (국방부가 자료에) 그걸 써놨다, 누가 만든 자료냐’고 따져 물었다.

이 기자는 공산당 활동을 두고도 “홍범도 장군이 활약했던 1920년대는 레닌의 공산당이고, 북한군을 사주해 6.25 남침을 한 공산당은 스탈린의 공산당”이라며 “레닌의 공산당하고 스탈린의 공산당은 아주 다르다.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의 차이보다는 더 크다. 그것을 같은 공산당이라고 봐버리면 어떡하느냐”고 되물었다. 이 기자는 “역사 논쟁에 끼어드는 건 좋은데 치열하고, 정확하게 해야한다”고 지적했다.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이 29일 오전 국방부 정례브리핑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서 철거이전하겠다는 계획을 두고 기자들과 설전을 벌이고 있다. 사진=국방부 e브리핑 영상 갈무리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이 29일 오전 국방부 정례브리핑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서 철거이전하겠다는 계획을 두고 기자들과 설전을 벌이고 있다. 사진=국방부 e브리핑 영상 갈무리

 

‘빨치산에 가입된 상태에서 봉오동 청산리에 참가했다’는 국방부 주장을 두고도 SBS 기자는 “1920년대, 1919년대 빨치산하고 김일성하고 스탈린하고 아무 관계없다”며 “김일성은 1912년 태어난 사람인데, 지금 1919년부터 1922년까지 빨치산 자격으로 전투에 참가했다고 이게 문제가 된다? 왜 문제가 되느냐, 국민을 향해 만든 공문서(를) … 이렇게 어설프게 역사적 식견도 없이” 쓰면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전하규 대변인은 “여러 의견이 있으실 수 있겠지만 저희 입장을 설명드린 거니까 그렇게 이해해달라”고 했다.

또한 다른 한 출입기자도 국방부 입장자료를 두고 ‘우리 국방부의 인문학적 소양이나 수준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나라는 (생각에) 무척 좀 안타깝더라’, ‘홍범도 장군이 재판위원으로 활동하신 (건) 오히려 독립군 옹호하려고, 변호하려고 했다는 평가가 더 많고, 자유시 참변 같은 경우는 이건 수십 년 공부하신 역사학자들도 이게 다 정리가 안 되어 있는 부분인데, “의혹 있다, 평가임” 이라고 쓴 것을 공식적인 입장이라고 낼 수 있는지 참 안타깝다’고 비판했다.

‘빨치산’의 표현을 두고도 이 기자는 “partisan에서 넘어온 말”이라며 비정규군의 의미라고 지적했다. 그는 “당시에 우리나라 군대도 없고 국가도 없는데 이 당시 독립운동한 사람들 다 빨치산이지 않느냐, 다 비정규군인데, 그때 활동한 걸 (6.25 전후의 빨치산과 뒤섞은 개념처럼) 빨치산이라고 하면 얼마나 부끄럽고 천박하냐”고 비판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