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이후 박정희 정권까지 정부는 국가보안법이라는 법적 수단을 통해 수많은 언론인을 구속시키는 등 각종 필화사건을 남겨왔다.

동아일보는 55년 3월15일자 1면에 한미석유협정 관련기사 제목인 <고위층 재가 대기중>에 ‘괴뢰’라는 글자가 실수로 첨가 인쇄돼 경리부장과 문선공 2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및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됐고, 발행인과 주필은 불구속 송치됐다. 대구매일신문은 55년 9월13일자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에서 ‘적성감시위원단 축출데모’를 비판하자 나흘 후인 17일 “사설이 북한방송에 인용돼 적을 이롭게 했다”는 혐의로 최석채 주필이 구속됐다.

58년 국회에서 국가보안법 3차 개정안이 통과되기 직전, 여러 건의 국보법 위반 사건이 발생했다. 고 함석헌 옹이 같은 해 사상계 8월호에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산다>라는 글에서 “남북한이 서로 미소의 꼭두각시라고 하니 우리는 민중은 없고 꼭두각시밖에 될 것이 없지 않은가”라고 주장한 데 대해 검찰은 남한을 북한과 똑같이 꼭두각시로 표현해 국체를 위반했다며 국보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국가보안법 3차 개정안이 통과된 뒤 가장 큰 필화사건 중 하나는 59년 4월30일자로 단행된 경향신문 폐간조치다. 폐간의 직접적 요인은 경향신문의 4월5일자 <간첩 하모 체포>라는 기사가 다른 간첩과 접선하려던 또 다른 간첩을 놓치게 했다는 것이었고, 이 때문에 취재기자 2명 체포, 사회부장·주필이 불구속 입건됐다.

다른 요인도 있었다. 앞서 경향신문은 1월11일자에 주요한 선생이 쓴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상>이라는 제목의 칼럼 ‘여적’에서 “선거가 진정 다수의 결정에 무능할 때는 결론으로는 또 한가지 폭력에 의한 진정한 다수의 결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이요, 그것을 가리켜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주씨는 검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4·19를 거쳐 5·16 군사쿠데타 이후에는 국가보안법뿐만이 아니라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과 반공법 제정으로 언론탄압의 강도가 거세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민족일보 폐간과 조용수 사장 사형선고 사건이다. 계엄사령부는 61년 5월19일 민족일보의 폐간과 관련자 13명을 구속했고, 혁명재판소는 이들 중 발행인 조용수·송지영·안신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계엄사령부는 민족일보의 <조국통일을 위하여 전민족이 하나의 방향으로 단결하여야 한다> <통일을 원치 않는 태도> <범민족적인 통일민족의 추진이 필요하다> 등 61년 4월9일∼5월16일까지의 사설과 기사 19건을 뽑아내 “반국가단체인 이북괴뢰집단의 활동을 고무 동조했다”며 특수범죄처벌법 위반혐의를 덧씌웠다.

3공화국이 출범한 뒤에도 반공법 위반 구속사건이 줄을 이었다. 조선일보 이영희 기자가 64년 11월21일에 쓴 <유엔의 한국문제토의에 있어서의 중립국의 동향>이라는 기사로 이  기자와 선우휘 편집국장이 구속됐으며, 65년 3월4일 대전방송국이 방영한 방송극 <송아지>로 편집부장 김정욱이 구속됐다. 대구매일신문의 같은해 12월18일자 <권총, 무전기 등 발견>과 71년 7월20일 중앙일보의 간첩검거 기사 등 단순 간첩검거 보도기사에 대해서는 “간첩 체포공작이 와해되고 적을 이롭게 한다”며 기사를 작성한 기자를 구속했지만 재판부가 무죄판결했다. 그럼에도 언론인의 구속·입건 자체가 언론을 위축시켰다는 게 당시 언론·법조계의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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