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직 존슨, 마이클 조던, 찰스 바클리,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 케빈 가넷, 르브론 제임스…. 우리가 떠올리는 NBA 슈퍼스타 대부분은 흑인이다. 흑인은 처음부터 NBA 무대를 평정했을까. 사실 NBA는 백인들의 스포츠였다. 만약 흑인이 NBA에서 뛸 수 없었다면, 오늘날 농구는 어떤 모습일까. 수십 년 전, 인종의 벽을 무너뜨린 슈퍼스타가 있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빌 러셀-레전드'. 보스턴 셀틱스 6번이 빌 러셀이다. ⓒ넷플릭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빌 러셀-레전드'. 보스턴 셀틱스 6번이 빌 러셀이다. ⓒ넷플릭스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빌 러셀-레전드>는 NBA 그 자체인 빌 러셀을 추모하는 다큐멘터리다. 빌 러셀은 통산 963경기에 출전, 매 경기 평균 15.1득점 22.5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보스턴 셀틱스는 빌 러셀이 데뷔한 1957년부터 은퇴한 1969년까지 13년간 무려 11번 NBA 우승을 차지했다. 심지어 빌 러셀의 마지막 우승 두 번은 감독 겸 선수로 이뤄낸 결과다. 프로 스포츠 역사상 전무후무한 압도적 퍼포먼스로, 그의 등번호 6번은 NBA 전 구단에서 영구결번됐다. 마이클 조던도 누리지 못한, ‘역대급’ 대우다. 

빌 러셀은 현대 농구의 ‘센터’ 포지션 역할을 정립한 선수로 평가받는다. 대학 시절 육상 및 높이뛰기 선수 경험이 있던 빌 러셀은 수비에서 오늘날의 ‘블록샷’ 개념을 도입했고, “리바운드를 제압하는 자가 시합을 제압한다”는 명제를 증명한 선수였다. 208cm의 키에 224cm의 윙스팬, 여기에 더해진 탄력은 슛을 쏴야하는 상대팀에게 재앙이었다. 당시 ‘포인트 가드’ 포지션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단신도 경기를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또 다른 슈퍼스타 밥 쿠지와 함께 빌 러셀은 ‘셀틱스 왕조’를 이뤄냈다. 그의 리바운드를 믿고 선수들은 달려 나갔고, 셀틱스는 리그 최고의 속공팀으로 거듭났다. 

빌 러셀의 업적은 코트에서 멈추지 않았다. 1950년대만 해도 흑인 선수는 NBA에 쉽게 진입하기 어려웠다. 원정 경기를 갔을 때 호텔 체크인이 안 되고 식당에 못 들어가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는 ‘짐크로 법’에 따라 인종 분리가 정당했다. 흑인은 2등 시민이었다. 공장에서 백인과 같은 노동을 해도 같은 월급을 받을 수 없었던 그의 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어린 빌은 처음으로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학 무대를 평정한 빌에게 관심을 가진 팀은 보스턴 셀틱스였다. 당시 셀틱스 감독 레드 아워백은 백인이었지만, 피부 색깔보다 승리에만 관심을 뒀다. 그는 NBA 최초로 선발선수 5명 전원을 흑인으로 출전시킨 인물이다. 덕분에 빌은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었다. 

▲빌 러셀(왼쪽)과 레드 아워벡 감독. ⓒ보스턴 셀틱스 홈페이지.
▲빌 러셀(왼쪽)과 레드 아워벡 감독. ⓒ보스턴 셀틱스 홈페이지.

하지만 백인이 장악한 언론이었다. 팀이 우승하고 빌이 리그 MVP를 받아도 언론은 그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다. 한번은 인종차별을 이유로 경기 출전을 거부하며 “흑인들이 이렇게 부당한 대우에 반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절대 변할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똑같이 대우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언론은 그가 프로의식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빌 러셀은 시대의 물결을 피하지 않았다. 무하마드 알리와 함께 인종차별에 항의하고, 마틴 루터 킹의 워싱턴 연설 현장에 함께했다. 그러자 테러가 이어졌다. 그가 집을 비운 사이 괴한들이 침입해 그의 수상 트로피를 부수고 침대에 똥을 쌌다. 벽에는 ‘검둥이’라는 욕설이 적혀 있었다. 경찰의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빌은 코트 위에서 더욱 완벽한 경기력으로 자신의 발언권을 높이려 노력했다. 어느 순간, 보스턴의 백인 아이들이 길거리 농구를 하며 “나는 빌 러셀”이라며 역할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셀틱스 선수들의 샤워룸에선 백인이었던 존 하블리첵과 흑인이었던 샘 존스가 서로의 등을 밀어줬다. 빌은 능력에 따른 공정한 기회를 원했다. 그리고 피부색과 상관없는 스포츠맨쉽을 원했다. 레드 아워백 은퇴 이후엔 미국 프로 스포츠 역사상 최초의 흑인 감독에 올랐다. 1969년 ‘영원한 맞수’ 윌트 체임벌린과 엘진 베일러-제리 웨스트라는 원조 빅3의 LA 레이커스를 상대로 7차전 혈투 끝에 우승하며 은퇴했다.  

지난해 8월 세상을 떠난 빌 러셀은 최초의 NBA 흑인 슈퍼스타이자, 가장 위대한 승자였다. 11번의 우승은 그의 삶처럼 늘 힘들고 극적이었다. 빌 러셀은 코트 위에서 이룰 수 있는 모든 걸 이뤄내고 최고의 순간 홀연히 떠났다. 그리고 그의 유산은 남았다. 그의 뒤를 이은 흑인 선수들이 코트 위에서 자신의 능력을 뽐내고,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트럼프의 인종차별 발언에 NBA 슈퍼스타 스테판 커리가 트럼프를 공개 비판하는 등 선수들이 인종차별과 관련해 코트 안팎에서 사회적 메시지를 내는 문화는 빌 러셀의 유산이다. 빌은 2011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자유 훈장을 받았다. 

20세기 스포츠계에선 여러 ‘빌 러셀’이 있었다. 영화 <42>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 미국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 재키 로빈슨도 또 다른 ‘빌 러셀’이었다. 재키 로빈슨을 영입한 브루클린 다저스 단장은 당시 언론을 향해 “우리는 독일 파시즘에 승리했다. 이제 인종차별에 승리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스포츠에선 최고의 선수가 필요할 뿐, 피부색은 중요하지 않았다. 재키는 고의 빈 볼을 맞았고, 죽이겠다는 협박에 버텨냈다. 그렇게 세상은 조금씩 진보했다. 부당한 차별에 맞섰던 스포츠맨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스포츠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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