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1월1일자 조선일보. ⓒ뉴스타파 보도화면 갈무리 
▲1940년 1월1일자 조선일보. ⓒ뉴스타파 보도화면 갈무리 

“조선일보는 조일동화주의(朝日同化主義)를 표방하던 친일기업단체 대정친목회가 창간했다.…동아일보는 친일파 거두였던 박영효가 초대 사장,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이상협이 초대 편집국장을 맡았다.” 

국사 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었던 ‘민족지’의 출발점이다. 채백 부산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명예교수는 신간 ‘민족지의 신화’에서 ‘친일’ 조선‧동아가 어떻게 ‘민족지’로 거듭났는지를 추적한다. 

사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친일’의 역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조선일보는 1920년 8월 대정친목회와 관계를 청산하고 적극적인 항일 논조를 보이며 동아일보보다 먼저 정간을 당했다. 이듬해 4월 소유권이 친일인사에게 넘어갔다가 1924년 9월 민족진영 신석우로 소유주가 바뀌고, 사회주의계열 기자들이 입사했다. 이후 조선일보는 항일운동단체 신간회 결성‧운영에 핵심 역할을 했다. 하지만 재정난‧내분으로 어려움을 겪다 1933년 3월 금광으로 떼돈을 번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유명한 ‘일장기’사건이 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금메달에 조선과 동아는 사설을 통해 민족적 관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했다. 먼저 조선중앙일보가 13일자 조간에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삭제한 사진을 게재했고, 같은 날 동아일보도 조간 지방판에 일장기 삭제 사진을 실었다. 당시엔 총독부도 문제 삼지 않았으나 식민지 분위기가 민족적 자부심으로 활기를 보이자 규제 필요성을 느꼈고, 손기정 축하회를 금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동아일보가 8월25일자에 일장기가 없는 사진을 넣었고, 총독부는 사건 관계자 11명을 연행했다. 동아일보는 9개월 넘게 정간조치를 받았다. 

▲1936년 8월25일자 동아일보.
▲1936년 8월25일자 동아일보.
▲1940년 1월1일자 동아일보.
▲1940년 1월1일자 동아일보.

그리고 1937년 동아일보는 속간호를 통해 “대일본제국의 언론기관으로 사명을 다하겠다”고 선언했다. 1939년 7월 중일전쟁 당시 조선인 지원병 가운데 최초의 전사자가 발생하자 두 신문은 그의 죽음을 미화했다. 1938년부터는 매해 1월1일 1면을 일왕 부부의 사진과 신년사에 할애했다. 물론 그마저도 1940년 폐간으로 끝이 난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은 그해 복간호에서 “민족운동의 선봉이 되어 싸워온 20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일보”라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복간 축하 메시지에서 “왜적의 시기와 탄압으로 폐간하기에 이름을 우리가 피가 끌케 통념히 녀겨온 바이다”라고 언급했다. 동아일보 역시 복간에 나서며 “일장기말살사건에 트집을 잡은 침략자 일본의 최후 발악으로 폐간의 극형을 당하였던 동아일보”라고 주장했다. 

저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미 군정기 복간부터 자신들의 과거 역사에서 잘못된 부분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일방적으로 미화하는 작업에 나섰다”며 “일제 강점기 친일에 앞장섰던 역사를 스스로 인정하면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 명약관화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지금처럼 네이버에서 1930년대 신문지면을 쉽게 찾아볼 수 없던 시절, ‘친일’을 정의하기 매우 어렵고 인재 공백이 우려되니 친일 청산 절차를 정부 수립 이후로 미루자던 신문사들은 어렵지 않게 ‘민족지’ 타이틀을 획득했다. 

저자는 특히 “해방 직후 정세를 관망하며 조심스럽던 동아는 반민특위가 해체되자 곧바로 민족지 신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동아는 일장기 말소 사건을 역사적 중대 사건으로 의미 부여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창간 기념 특집은 ‘민족지 신화’를 생성하는 핵심창구였다. 1950년 4월1일 동아일보는 창간 30주년 기념호 사설에서 자신들을 “단순한 저날리스트가 아니라 독립투사였다”고 묘사했다. 일장기 말소 사건은 ‘의거’로 격상시켰다. 

해방 이후 김구 중심의 임시정부 세력을 대변하다 김구 암살, 방응모 납북으로 위기를 겪은 조선일보는 1955년 3월 방일영 사장이 지령 1만호 특집에서 “본보는 항일운동에 발맞추어 나갈 뿐 아니라 그 선봉이 되어야 하였고 또 되어 왔으니 왜정당국은 매일같이 삭제를 하고 정간을 하여 기개를 꺾으려 하였다”고 주장했다. 

▲'민족지의 신화'. 채백 지음. 컬처룩. 2만8000원.
▲'민족지의 신화'. 채백 지음. 컬처룩. 2만8000원.

 

당사자들이 만들어낸 ‘민족지 신화’는 학계의 지원으로 뒷받침되었고, 이윽고 1970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문화 운동에 있어서 민족 항쟁의 선봉에 선 것은 언론 운동이었다”는 대목과 함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등장했다. 이어 ‘검열을 받아 만신창이가 된 동아일보’라는 설명과 함께 일장기 말소 사건의 동아일보 지면 사진이 실렸다. 중학교 교과서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실렸고, 1976년 초등학교 6학년 국사 교과서엔 “신문과 잡지들은 일본 침략을 몰아내자는 민족의 울분을 알려주었다”고 적혔다. 

저자는 “지면을 통해 조금씩 과거 역사를 미화하는 작업을 시도해도 별다른 문제 제기나 비판도 없는 것을 보면서 두 신문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을 것”이라면서 “여론에 미치는 영향력이 신문에 필적할 미디어가 없던 바탕에서 동아‧조선은 거리낌 없이 역사 미화로 자신들의 이미지를 고양시켜 더 많은 독자와 이윤을 노렸던 것”이라 지적했다. 

신문평론가 최민지는 ‘일제하 민족언론사론’(1978)에서 “식민 정치 권력에 아부‧굴종해, 민족의 노예적 고통을 강요했던 죄과가 은폐될 수 있는 것인가”라고 되물으며 “(조선‧동아는) 그릇된 언론의 생존 논리를 제공하고 정착시킨 것에 더 큰 죄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과거 친일적 행태보다, 미화가 더 문제라는 것. 최민지는 “일제의 압력‧강요에 못 이긴 굴종이라 하더라도 민족을 부인하고 일제 편에 서서 민족의 억압‧수탈을 합리화하는 역사적 범죄는 저지를 수 없는 것”이라며 “1936년부터 1940년까지 5년은 한국 언론사에서 지워질 수 없는 오욕과 모멸의 시대”라고 개탄했다. 

조선‧동아의 ‘민족지 신화’ 전환점은 2000년대 안티조선운동과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출범이었다. 이때 조선‧동아일보 사주 방응모‧김성수가 친일인사 명단에 포함됐다. 저자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 (최근들어) 조선‧동아는 일제 말기 친일 행태를 일부 인정했지만 민족지 신화에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서 “진실에 기초한 정당한 역사 평가 위에서만 새로운 미래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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