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은 있는데 새로운 질서는 없다.” 정권교체기 공영방송을 바라보는 학계 시선은 이 한마디로 요약되는 듯하다. 22일 한국방송학회 봄철학술대회에 모인 공영방송 연구자들은 정치권이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좌우하는 고리를 끊고, 공영방송의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현재 한국의 공영방송은 일반 상업 방송사와의 차이가 모호하고, 정치권이 이사·사장 선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 후견주의’가 굳어져왔다. 여야가 KBS 7대4, MBC·EBS 6대3 비율로 이사를 추천하면서 여당과 제1야당을 대리하는 양상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심영섭 경희사이버대 미디어영상홍보학과 겸임교수는 이날 KBS 기획세션에서 정치과잉 해소를 위해 이사회 전문성과 역할을 재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미디어(법·기술·경영), 회계감사전문가, 취재보도·편성 등 방송 전문가, 사회적 약자 관련 전문가, 지역전문가, 노동이사 등 다양한 계층을 대표하는 이들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직능단체가 이사를 추천할 땐 해당 단체에 대한 검증과 명단공개 선행을 강조했다. 인원은 현 9~11인에서 20인 내외로 증원해 경영·전략·심의 등 소위원회를 활성화하고, 이사들의 이해관계충돌이나 권한남용에 따른 면직 조항 등이 마련돼야 한다고 봤다.

▲4월22일 제주대 아라캠퍼스에서 진행된 '2022 한국방송학회 봄철 정기학술대회'. 사진=한국방송학회 유튜브
▲4월22일 제주대 아라캠퍼스에서 진행된 '2022 한국방송학회 봄철 정기학술대회'. 사진=한국방송학회 유튜브

언뜻 보면 이는 민주당이 당론으로 밝힌 ‘25인 운영위원회안’과 유사해보인다. 민주당은 25명의 운영위원회로 이사회를 대체하는 방안을 당론으로 제시했다. 사장 선출은 운영위원 3분의2(15명) 찬성으로 이뤄지도록 ‘특별다수제’를 도입한다는 계획이다. 독일식 방송평의회를 변형한 형태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심 교수는 “(민주당안은) 공영방송 이사회를 25명으로 늘리는 것 이상도 이하도 없는 안”이라고 선을 그었다. “독일식 방송평의회 기본원칙은 대표성·전문성인데 ‘누가 임명할 건가’만 고민한 것 같다”는 지적이다. 그는 “공영방송 평의회 이사가 하는 일은 사장 임명에서 끝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내용심의”라며 “특히 편성규약 갈등상황을 조율하고 중재하는 역할도 평의회가 담당한다. 사장 선출을 위해 25명으로 운영위원회를 늘린다는 건 사실 설득력은 없는 것”이라고 했다.

민주당안에 대해선 비판적 평가가 잇따랐다. 정인숙 가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정권 말, 더구나 여야가 교차하는 시점에 이걸 내놓는 모양새가 좋지 않다”면서 “문재인 정부 초기에 사회적 합의 기구를 구성했다면 정책 과정의 합리성을 갖는 좋은 안이었을 것 같은데 왜 지금에서야 이런 안을 내놓는지, 여야 위치가 바뀔 때마다 되풀이되는 악순환을 또 하고 있구나 생각이 든다”고 지적했다.

▲4월22일 제주대 아라캠퍼스에서 진행된 '2022 한국방송학회 봄철 정기학술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심영섭 경희사이버대 미디어영상홍보학과 겸임교수. 사진=한국방송학회 유튜브
▲4월22일 제주대 아라캠퍼스에서 진행된 '2022 한국방송학회 봄철 정기학술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심영섭 경희사이버대 미디어영상홍보학과 겸임교수. 사진=한국방송학회 유튜브

정윤식 강원대 명예교수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에 강대강으로 대치하고, 과연 공영방송 어젠다가 끼어들 수 있는 틈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늘 세미나 제목(혼돈과 새로운 질서)처럼 혼돈 속에 있는 거 아닌가, 혼돈은 있는데 새로운 질서는 없다”고 표현했다. 정 교수의 경우 정치권 영향력 행사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특별다수제로 균형을 맞추는 방향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정치권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지배구조가 이어진다면 이사회 개입을 축소해야 한다는 주장도 이어졌다. 송종현 선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의 경우 “공영방송이 정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시스템이라면 과거 공영방송의 문제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라며 “조직 내의 다양한 시스템을 통해 조직이 작동되고 운영되도록 해야지, 사장·이사 등 소수에 의해 공영방송이 좌우되는 문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송 교수는 “외부에서 국민추천이든 시청자위원회든 다원주의적 시스템을 운영하려고 하면 공영방송 조직원은 그것을 수용하고 협력할 준비가 돼 있는가에 대해서도 꽤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지 않은가 생각이 든다”며 “공영방송 내부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4월22일 제주대 아라캠퍼스에서 진행된 '2022 한국방송학회 봄철 정기학술대회'에서 발제 중인 홍원식 동덕여대 교양학부 교수. 사진=한국방송학회 유튜브
▲4월22일 제주대 아라캠퍼스에서 진행된 '2022 한국방송학회 봄철 정기학술대회'에서 발제 중인 홍원식 동덕여대 교양학부 교수. 사진=한국방송학회 유튜브

MBC 기획세션에 참여한 홍원식 동덕여대 교양학부 교수는 “공영방송 공적책무는 제작진이 결정해야지, 정부 정당을 대표하는 이사들이 왜 결정하나. 일반적 사업계획에 대한 사전보고도 이사회 업무는 아니라고 본다”며 “이사회 책무는 사후 감독 및 평가 영역으로 제한하고, 국민선출방식을 통한 사장 및 집행기구에 집행책무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건식 MBC공영미디어국장은 시민 참여를 늘리는 방향을 강조했다. 그는 “(공영방송이) 지속적이고 일관적인 경영 비전을 제시하려면, 정치적인 혼란에 휩싸이면 뭘 할 수가 없다. 제가 25년을 (MBC에) 있어보니 현실적으로 대선이 끝난 다음부터는 아무 것도 안 된다”며 “정치 후견주의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국민추천제나 운영위원회 안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포퓰리즘 우려가 있지만 (정치) 후견주의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허찬행 청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겸임교수는 “(MBC는) KBS나 EBS보다도 정체성이 더 모호한 것 같다. 어떨 땐 상법상 주식회사라 하고 어떤 때는 특별 공익법인이 대주주인 공영방송이라고 하는데, MBC가 공영방송으로서 어떤 역할을 할지 스스로 방향성을 갖고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가는 시도, 노력도 필요하다고 본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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