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월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장문의 사과문과 함께 “정치 현안에 대한 비평은 앞으로도 일절 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이보다 앞서 유 전 이사장은 2020년 4·15총선 직전 ‘범진보 180석’ 발언으로 논란을 부르고는 “정치 비평을 그만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유 전 이사장은 2019년 12월 한동훈 검사장을 겨냥해 ‘검찰의 노무현재단 사찰’을 주장했다. 근거 없는 의혹 제기로 나타나자 1년여 만인 지난해 1월 사과문을 통해 “누구나 의혹을 제기할 권리가 있지만 그 권리를 행사할 경우 입증할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저는 제기한 의혹을 입증하지 못했다. 그 의혹은 사실이 아니었다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인플루언서가 잘못된 의혹 제기로 국민 사이 갈등을 초래한 데 대한 사과였다. 그는 “대립하는 상대방을 ‘악마화’ 했고 공직자인 검사들의 말을 전적으로 불신했다”며 “과도한 정서적 적대감에 사로잡혔고 논리적 확증편향에 빠졌다”고도 자성했다. 돌연한 사과에 ‘무분별한 의혹 제기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자 선처를 호소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물론, 그의 사과를 평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경향신문은 사설을 통해 “그의 사과가 근거 없는 폭로와 확증 편향이 심화되는 세상을 성찰하고 일신하는 전환점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 사진=연합뉴스.
▲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 사진=연합뉴스.

‘정치 비평’ 하지 않겠다던 유 전 이사장은 대선을 앞두고 입장을 번복했다. 유 전 이사장은 지난해 12월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를 적극 지지했다. 유 전 이사장은 ‘정치평론을 재개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느냐’는 진행자 질문에 “1년 반 넘게 쉬고 나니까 다시 기운도 좀 나고, 글 쓰는 일을 하면서 자연스러운 기회가 있을 때는 (정치평론을) 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렇게 진행자와 한두 차례 질문과 답을 주고 받은 걸로, 그는 정치평론을 재개했다. 11개월 전의 대국민 사과가 궁색해진 복귀였지만 양대 공영방송도 별 다른 문제의식 없이 유 전 이사장에게 판을 깔아줬다. 그는 여전히 두터운 팬덤을 가진 인플루언서다. 제작진도 시청률이 보장되는 그의 출연을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선 국면에서 1년 전 사과가 무색해지는 평론도 있었다. 그는 지난달 28일 공개된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출연해 윤석열 후보가 집권할 경우 “아사히 맥주를 마실 수 있는 행복한 날들이 우리에게 올 것이고 (일본 의류 브랜드) 유니클로를 입을 수 있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친일 프레임’을 제기한 것이다.

지난달 24일 MBC ‘뉴스외전 포커스’에 출연해서는 “윤 후보는 (사법연수원생) 1000명 뽑을 때 9번 만에 된 분이고 이 후보는 300명 뽑을 때 2번 만에 됐다. 일반 지능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실과 다른 발언이었다. 이 후보는 1986년 제28회 사법시험 합격자로 당시 최종 합격자 수는 300명이었다. 윤 후보가 합격한 1991년(제33회 사법시험) 당시에도 최종 합격자 수는 287명이었다. “윤 후보는 1000명 뽑을 때 9번 만에 된 분”이라는 유 전 이사장 주장은 틀렸다. 법치주의바로세우기행동연대는 유 전 이사장을 공직선거법 위반 및 정보통신망법상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김어준·유시민 두 사람은 선거 직전인 지난 6일 2030세대 남성 유권자들을 ‘1번남’, ‘2번남’으로 나눈 뒤 1번(이재명)을 지지하는 남자와 달리 2번(윤석열)을 지지하는 남자는 혐오적 존재로 규정하는 인터넷 커뮤니티 자료를 꺼내 들고 대선을 전망했다. 이 역시 상대 후보를 지지하는 유권자를 조롱·폄하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임찬종 SBS 기자는 페이스북에 “정치 현안 또는 시사 현안에 대한 비평을 하다가 본인도 인정한 명백한 잘못으로 다른 사람을 해친 사람이, 그리고 이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자 ‘정치 현안에 대한 비평은 앞으로도 일절 하지 않겠다’라고 공개적으로 약속했으면서도 1년쯤 지나가 태연하게 정치 현안에 대한 비평을 쏟아내는 사람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공론장에서 영향력이 큰 마이크를 잡고 발언하는 행위는 허용돼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유 전 이사장을 포함한 진보 인플루언서들에 대한 민주당 내 성찰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민주당이 살려면 비정상적인 정치 커뮤니케이션부터 복원해야 한다”며 “그러려면 김어준, 유시민, 그리고 몇몇 얼빠진 중소 인플루언서들을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MBC 출신 최승호 뉴스타파 PD는 “인플루언서들은 때로는 감탄할 정도로 창의적인 논리를 제시하지만 시간이 지나 검토해보면 틀린 주장으로 확인될 때가 많다”며 “그들은 현실을 직접 취재해서 말하는 경우가 드물고, 민주당을 감싸야 한다는 의도에서 다른 언론들이 취재해놓은 사실을 취사선택해 가공하기 때문에 오류가 많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런 문제점이 반복해서 쌓이면 지지자들은 왜곡된 현실인식을 갖게 되기 쉽다”는 것이다.

최 PD는 “인플루언서들의 방송보다는 오히려 보수언론이라 하더라도 기자가 직접 취재한 팩트에 기반한 기사들이 더 현실을 잘 반영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고도 했는데, 유 전 이사장은 정반대 입장이다. 유 전 이사장은 지난 3일 MBC ‘100분토론’에서 “사적 소유 언론은 그 자체가 하나의 이익집단이다. 사회적 공기가 아니다” “이제는 올드 미디어에 매달려 공정선거 보도 촉구하며 애걸복걸하고 호소하는 헛짓거리를 그만하자”고 주장했다.

윤창현 언론노조위원장은 11일 유 전 이사장 발언에 대해 “언론 혐오에 기반해 맹목적으로 언론 불신을 부추기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기사는 적극적으로 인용한다”며 “언론이 불신을 자초한 면도 있지만 (유 전 이사장 발언과 같은) 일방적인 언론 매도와 지지자들의 온오프라인 공격은 건강한 토론 및 비판 시스템을 뭉개버리는 결과만 가져올 것”이라고 비판했다.

윤 위원장은 “언론운동도 진보 인플루언서를 중심으로 한 팬덤 정치와 선을 긋지 않으면 퇴행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어준·유시민 등 인플루언서들에 끌려다니는 진보진영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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