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하면 삼국지(三國誌)를 빼놓을 수 없다. 중국은 삼국지를 역사 속에만 가둬놓고 있지 않다. 중국 당국은 삼국지 유적과 새 유적지 건립을 통해 삼국지의 정신을 새롭게 되살리고 있다. 중국에서 ‘삼국지’가 던지는 메시지는 우국(憂國)과 충절(忠節)이다. 충절은 의리(義理), 신의(信義)와 직결된다. 중국은 삼국지 유적을 보존함으로써 중국인들에게 ‘우국 충절의 사상’과 함께 ‘애국심’ 고취의 장소로 삼고 있다.

신의의 대명사인 관위(관우)는 재물신으로 신격화

실제 중국인들은 ‘우국·충절·의리·신의’라는 덕목을 중시하며 장사와 생활 속에 적용한다. 인간의 유형을 ‘간웅’(奸雄) 차오차오(曺操), 덕망 있는 류비(劉備)와 의리의 장페이(張飛) 등으로 나누는 것도 유사하다. 신의의 대명사인 관위(관우)는 아예 재물신으로 신격화됐다. 중국에서는 차오차오에 대한 인상이 국내만큼 나쁘지 않다. 런민다쉐(人民大學) 중국인 대학원생 중 한 명은 차오차오를 지략과 현실적인 정치감각을 겸비한 인물로 높게 평가했다. 중국말에 ‘숴차오차오지우차오차오다오’(說曺操就曺操到·조조도 제말하면 온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차오차오’를 무서운 ‘호랑이’와 비교하고 있다.

중국인들에 지혜의 교훈 주는 주거량(諸葛亮)

지략의 상징인 주거량(諸葛亮)과 관련해서는 ‘싼거샤오피장성궈주거량’(三個小皮匠勝過諸葛亮·세명의 구두장이가 제갈량보다 낫다)이란 속담도 전해진다. 이 속담은 삼국시대 때 주거량의 병사들이 우장(烏江)에 도착했는데 물살이 급해 다리를 놓을 수도, 나무 뗏목을 이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강을 건널 방도를 생각하는 자는 스승으로 모시겠다”라는 방을 내붙이자 세 명의 구두장이가 소가죽으로 된 뗏목을 이용할 경우 급류에 휩쓸려 바위에 부딪혀도 부서지지 않는다고 하자 이 헌책을 받아들여 병사들이 무사히 강을 건넜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주거량은 세월의 간격을 넘어 중국 인민들에게 ‘지혜의 교훈’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삼국지의 대표적 장소는 우허우츠(武候祠)와 두푸차오탕(杜甫草堂)

   
▲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의 우허우츠(武候祠)는 난먼와이(南門外) 우허우다제(武候大街)에 위치해 있으며 중국 명승지중 ‘삼국지의 전당’으로 꼽힌다. 중국 당국은 우허우츠를 ‘우국 충절의 산실’로 삼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공간으로 삼고 있다.
‘우국과 충절’을 깊게 느낄 수 있는 곳은 삼국시대 촉(蜀)의 수도였던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의 우허우츠(武候祠)와 두푸차오탕(杜甫草堂)이 대표적이다. 우허우츠는 청두의 난먼와이(南門外) 우허우다제(武候大街)에 위치해 있으며 중국 명승지 중 ‘삼국지의 전당’으로 꼽힌다. 이곳은 류비(劉備)와 주거량(諸葛亮·181~234년)의 묘(廟)가 안치돼 있으며 41명의 촉한 인물들을 진흙으로 만든 소상들이 진열돼 있다. 이들 인물은 삼국지에 나타난 이미지와 성격을 토대로 만들어져 표정이 살아있는 듯 생생하다. 이곳을 둘러보면 삼국지의 각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우허우츠는 시진(西晋)말년 16국 때에 세워져 한 황제 리슝(李雄)이 주거량을 기념해 만들었다. 탕(唐)왕조 이전 청두 남쪽의 교외로 옮겨와 류비의 한자오례먀오(漢昭烈廟) 근처로 옮겼다. 이후 명(明)조 초년 중건 때 한자오례먀오 안으로 옮겨와 두 곳을 하나로 합쳤다고 한다. 중국에서 군신(君臣)의 묘를 합친 것은 특별한 경우로 충절의 상징적인 장소로 부각됐다.

우허우츠, 전국주요문물보호단위 지정…청두 가장 유명

   
▲ 우허우츠(武候祠)에는 지략의 상징인 주거량(諸葛亮) 등 촉인물 40여명의 소상들이 생생한 표정으로 만들어져 삼국지의 분위기를 실감나게 한다.
현재의 우허우츠는 청(淸)나라 캉시(康熙) 황제 11년(1672년)에 중건된 것으로 1961년 초 전국주요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됐으며 총면적이 3만7천㎡에 이른다. 중국내에서 주거량은 산둥(山東) 이난(沂南)출신으로 중국 역사상 탁월한 정치가이자 군사전략가로 꼽힌다. 삼국시대 당시 촉(蜀)국의 승상을 했고 수많은 업적을 낳아 사후에도 추모와 칭송을 받고 있다. 우허우츠는 전국 각지에 있으나 청두의 것이 가장 유명하다. 우허우츠는 정문에서 북쪽을 향할 경우 다먼(大門), 얼먼(二門), 류비뎬(劉備殿), 궈팅(過廳·대청), 우허우츠 등 5개의 건축물로 구성돼 있다. 서쪽은 류비릉(陵)과 건축물, 얼먼-류비뎬과 대청-우허우츠 구역은 각각 ‘口’자 형태의 쓰허위안(四合院)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명비(明碑), 오른쪽에 유명한 당비(唐碑)가 서있다. 당비는 높이 367㎝, 폭 95㎝로 매우 유명하다. 당의 유명한 재상 페이두(裴度)의 글에서 발췌해 유명 서법가인 류궁춰(柳公綽)가 쓴 글자를 명석공 루젠(魯建)이 새겨 ‘싼줴비’(三絶碑)로 부른다. 류비뎬에는 3m높이로 류비의 금박소상이 서있고 옆쪽의 관위(關羽), 장페이(張飛) 등 문무신들의 채색 소상들이 진용을 갖춰 생동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주거량뎬에는 주거량, 주거잔(諸葛瞻), 주거상(諸葛尙) 등 3대에 걸친 금빛 소상이 나란히 서있다. 주거량이 거위 털 부채를 든 모습은 온화하면서도 한 시대를 풍미한 명재상의 풍모가 그대로 묻어난다. 일설에는 현명한 부인이 전쟁 때 부채에 그 날의 전략을 적은 쪽지를 끼워 전했으며 ‘지혜의 상징물’로 통한다.

   
▲ 우허우츠(武候祠)의 서쪽에는 촉(蜀)왕인 류비(劉備)의 묘지가 있다. <삼국지>는 이곳에 류비의 간(甘), 우(吳) 두 부인을 합장한 것으로 돼 있다. 묘높이는 12m 둘레는 180m로 청(淸)대에 ‘한자오례황디즈링’(漢昭烈皇帝之陵)이란 돌비석을 묘앞에 세웠다.
우허우츠내에는 류비의 아들 류찬(劉禪)의 소상은 없다. 여기에도 고사가 있다. 애초 한자오례먀오를 세울 당시 류찬의 소상이 류비 옆에 있었으나 어느 날 밤 류비의 혼령이 나타나 “왜 나라를 잃어버렸느냐”라고 질책하며 신하를 시켜 쫓아냈다고 한다. 우허우츠의 서쪽에는 류비의 묘지가 있다.

<삼국지>는 이곳에 류비의 간(甘), 우(吳)부인 등 두 부인을 합장한 것으로 돼 있다. 묘 높이는 12m 둘레는 180m로 청(淸)대에 ‘한자오례황디즈링’(漢昭烈皇帝之陵)이란 돌비석이 묘 앞에 서 있다. 우허우츠 남쪽에는 1984년에 세운 청두 우허우츠 박물관이 있고 그 안에 삼국지 역사와 문물로 가득 차 있다.

또 한쪽에는 류비, 관위, 장페이가 도원(桃園)결의를 맺는 장면을 색깔이 다른 돌 조각으로 새겨놓았다. 가운데 류페이를 중심으로 왼쪽은 검은색의 장페이, 오른쪽은 붉은색의 관위 조각상이 있다.이곳에는 남송의 충신 위에페이(岳飛)가 웅혼무비한 필치로 쓴 출사표가 검은색 돌에 흰 글씨로 새겨져 길다랗게 한 면을 채우고 있는데 글자마다 용맹과 충정이 넘쳐 가슴을 울린다.

우국충절의 마음을 시로 표현했던 두푸가 거주했던 두푸차오탕

두푸차오탕(杜甫草堂)은 청두 시먼와이(西門外)의 환화시판(浣花溪畔)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탕(唐)때의 위대한 현실주의 시인 두푸(杜甫·712년~770년)가 청두에 거주한 곳이다. 두푸는 허난(河南) 궁셴(鞏縣)출신으로 탕 왕조가 쇠퇴기로 접어들었을 때 애타는 우국 충절을 피를 토하는 시로써 노래했다. 중국인들은 그를 ‘시성’(詩聖)으로 부르며 지금까지 1400여수가 전해오고 있다. 두푸는 759년 말 겨울 안사의 난을 피해 청두로 들어왔으며 다음해 봄 친구이자 청두 시촨(西川) 절도사인 옌우(嚴武)의 도움으로 경치 좋은 환화시판이 흐르는 초가집에서 거주하게 됐다. 이 초가집은 두푸차오탕으로 내부를 둘러보면 그윽한 두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 두푸차오탕(杜甫草堂)은 고즈넉하고 아늑한 분위기에 우국 충정으로 한평생을 살다간 두푸의 애절한 마음이 절로 느껴진다. 특히 양쪽으로 우거진 대나무가 붉은 벽과 대조를 이루는 츠비통다오(赤壁通道)는 고독한 분위기를 풍긴다.
두푸는 시속에서 ‘완리차오시자이(萬里橋西宅), 바이화탄베이좡(百花潭北庄)’으로 초가집을 묘사했다. 그는 이곳에서 4년을 살았으며 ‘춘예시위’(春夜喜雨) ‘수샹’(蜀相) 등 240여수의 시를 남겼다. 그의 시는 한 폭의 처연한 그림을 그리는 듯하다.

량거황리밍추이류(兩黃麗+鳥鳴翠柳)
두 마리의 노란 꾀꼬리가 비취색 버들에서 울고

이항바이루상칭톈(一行白鷺上靑天)
한마리 백로가 푸른 하늘로 오르네

촹한시링첸추쉐(窓含西嶺千秋雪)
창문은 서쪽 산 위의 흰눈을 머금는데

먼보둥우완리촨(門泊東吳萬里船)
몸 둘 곳 없는 나는 만리 밖 오나라 쪽으로 먼길을 떠나네

   

▲ 두푸차오탕(杜甫草堂)에 있는 고개를 바짝 든 두푸(杜甫)의 소상은 부정부패에 물들지 않고 꼿꼿한 자세로 살았던 시인의 고뇌가 그대로 담겨 있다.

두푸는 옌우와 문학과 정치에서 교류가 깊었으며 그의 막료(幕僚)로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내 두공부(杜工部)로 불렸다. 765년 옌우가 병사하자 54살의 두푸는 청두를 떠나 창장(長江)을 따라 쓰촨성 동쪽 쿠이저우(夔州)의 협곡과 후베이(湖北), 후난(湖南)의 수상(水上)에서 방랑을 계속하다 배 안에서 병을 얻어 둥팅후(洞庭湖)에서 59살을 일기로 병사했다. 두푸는 이 기간동안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우국의 심정과 처절한 고독감을 담은 430여수의 시를 또다시 토해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현재의 두푸차오탕은 여러 차례의 개조를 거쳐 이뤄진 것이다. 면적은 약 4만8천평으로 정원안에는 대나무와 매화 등 꽃나무들이 우거졌고 다리와 흐르는 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원안에는 고즈넉하고 아늑한 분위기에 우국 충정으로 한 평생을 살다간 두푸의 애절한 마음이 절로 느껴진다. 특히 정원 군데군데에 굵다란 대나무가 소복히 심어져 두보의 흔들림 없는 절개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양쪽으로 우거진 대나무가 붉은 벽과 대조를 이루는 츠비통다오(赤壁通道)는 한층 고즈넉한 분위기를 더한다. 두푸의 애국심이 1300여 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전해진다는 것이 놀랍다. 턱을 약간 치켜 든 두푸의 소상은 세상의 부정부패에 물들지 않고 꼿꼿한 자세로 살았던 시인의 고뇌가 그대로 담겨 있다. 우허우츠와 두푸차오탕을 둘러보면 마음에는 자연스레 조국애가 밀려듦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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