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자 신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두 점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한 작품은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이고 다른 작품은 한국화가 신학철의 '모내기'이다. 그러나 나란히 실린 두 그림의 운명은 크게 달랐다.

먼저 한국전쟁 54주년을 기념해 6월 열리는 전시회인 '한반도 전쟁방지와 평화 염원'에서 전시될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은 20세기 천재 미술가의 작품답게 '명작'등의 타이틀을 달며 모든 일간지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전시는 한달 반 뒤에 열리지만 피카소의 그림이 한국에 온다는 자체가 뉴스였던 것이다.

   
▲ 동아일보 4월 19일자
반면 신학철의 '모내기'는 피카소의 '명작'이 받은 환영과는 동떨어진 대접을 받아야 했다. 모내기는 '작품' 이라는 단어대신 '이적표현물'이라고 표현돼있었다. '모내기'가 국가보안법에 따라 이적표현물로 확정되었기 때문인 듯 싶다. 이번 기사 또한 "유엔인권이사회가 한국정부에 신씨의 그림에 유죄판결을 내린 것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며 구제조치를 해줄 것을 권고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동아일보 4월 19일자
두 기사의 내용과 별개로 두 점의 그림을 다룬 기사의 어조가 달랐던 것은 기사 작성부서가 달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이 정통 문화부 기사라면, 신학철의 '모내기'는 정통 사회부 검찰발 기사였고, 그 기사의 간극은 프랑스와 한국의 거리만큼이나 멀리 떨어져있었다.

보도에서 보여지듯 피카소의 작품은 고국을 방문한 개선장군과도 같았고, 신학철의 작품은 포로가 된 패잔병과도 같았다. 두 작품은 다른 운명에 처해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성장과정은 어딘가 닮아있다.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이 그간 한국에서 받았던 대접은 그것을 잘 알려준다.

한국언론이 '한국에서의 학살'을 뒤늦게 환대한 이유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시예정기사임에도 단독 처리될 만큼의 위력을 가진 '한국에서의 학살'은 과거 한국에서는 '사망상태'에 있었다. 1990년 1월부터 2004년 4월까지 '피카소'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기사는 2300여건이고, 피카소를 주제로 한 기사가 250여건이었음에도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작품 제목은 채 10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10번도 안 되는 기사 중에 한 신문(한겨레)이 '한국에서의 학살'을 언급한 회수가 6번이었다는 사실은 놀라울 뿐이다.

   
▲ 국민일보 4월 19일자
그 배경에는 '한국에서의 학살'이 갖는 정치적 민감성이 있다. 19일 일부 신문이 보도했지만 이 그림은 1951년 한국전쟁당시 미군이 한국인을 학살하는 모습을 담고 있고, 황해도 신천 양민학살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전쟁의 폭력성과 미군의 잔인성을 고발한 이 작품은 한국에서는 이승만 정권이후 80년대까지 이적 표현물로 분류돼 반입금지 예술품 목록에 오르면서 거의 소개되지 못했다. 이것이 '한국에서의 학살'이 80년대까지 한국언론에 등장하지 못한 이유의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일부 신문들은 이 그림의 설명을 쏙 빼놓았다. 대부분의 신문이 '한국에서의 학살은 미군의 신천리 양민학살을 다뤘다'고 설명했지만 조선일보는 "공산당원이었던 피카소의 정치의식이 드러났다"고 설명하면서도 "피카소가 한국 전쟁 중 양민 학살 소식을 접하고 그린 작품"이라며 주체와 객체를 빼놓고 설명했고, 동아일보는 "6.25전쟁을 배경으로 군인들이 부녀자들을 학살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라고 자세한 이야기를 흐렸다.

이 그림에 대한 논란은 많다. 최근 나온 <김원일의 피카소>에 따르면 "'한국에서의 학살'이 제국주의 관점에서 그린 반미메시지인지, 강대국과 약소국간의 전쟁에서 당할 수밖에 없는 약소국의 비극을 그린 것인지는 평론가마다 의견이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이 책은 "'한국에서의 학살'이 반미선전을 위한 프랑스 공산당의 제의에 의해 그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목적이 분명한 그림이다"라는 의견을 제시한 비평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이렇다.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을 예술적으로 강력하게 항의한 그림' '미국의 잔학 행위를 항의하기 위한 것' '피카소가 공개적으로 소련의 정치적 입장을 지지한 최초의 교시적 작품'이란 견해들이다. 그런 만큼 이 그림은 공산주의자들이나 진보 좌파들이 미국을 공격하는데 사용됐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피카소와 그의 전속 이발사이자 친구인 아리아스의 이야기를 다룬 <피카소의 이발사>또한 이런 설명을 뒷받침해준다. 이 책은 "한국에서의 학살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영웅적 요소가 부족하다고 비판받은 반면, 비공산주의자들에겐 졸렬한 선전미술로 평가받았다"고 덧붙였다.

언론이 외면한 피카소의 공산당 활동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한국에서의 학살'이 한국에서 외면당한 이유는 피카소의 정치적 활동 때문으로 보인다. 피카소는 '20세기 천재화가', '입체주의 창시자', '복잡한 사생활', '부유한 화가'로 언론에 소개됐을 뿐 그가 나치를 비롯한 파시즘에 비판적이었고,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면서 제국주의의 광기에서 비롯된 전쟁과 폭력 그리고 평화를 소재로 작품활동을 했다는 것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고작 알려진 것이 스페인 내전을 그린 '게르니카' 정도인데 이마저도 제작배경이 생략되어서 '입체파화가인 피카소의 특이한 작품활동'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그는 젊은 시절 무정부주의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나치치하 4년 동안 '퇴폐적인 그림'이라 는 이유로 전시회를 열지 못했다. 나치가 물러간 이후에도 프랑스의 유서깊은 전시관이 자국의 저명 화가에게만 전시기회를 주는 전례를 깨고 외국인인 피카소(그는 스페인인이다)에게 전시를 제안했지만 보수 정치인들과 우파 화가들이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반대했다고 한다.

그는 1944년 10월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며 '나는 왜 공산주의자가 되었나' 등의 성명을 발표하며 "프랑스에서 소비에트 연방에서 그리고 나의 조국 스페인에서 가장 용감했던 사람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내가 망설일 수 있겠습니까?"라는 발언을 했고, 1948년과 1950년 세 차례에 걸쳐 핵전쟁의 위협을 규탄한 세계평화회의 대표로 참석했다. 1949년 세계평화회의에 참석해 '평화의 비둘기'라는 작품을 그렸고, 같은 해 좌파 지식인 예술가와 함께 나토협약을 반대하며 반미시위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반미인사로 낙인찍혀 미국으로부터 입국을 거절당했고, FBI는 한번도 미국에 입국한 적이 없는 피카소를 '공산주의자' '잠재적 불온분자'로 분류해 27년간 사찰을 했다. 또 프랑스는 1930년대와 1940년대 두 차례에 걸친 그의 귀화를 신청을 거절을 하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피카소 佛귀화신청 2번이나 퇴짜"…무정부주의자 의심>(4월 23일)이라는 제목으로 21일 파리시경찰국 박물관이 연 '경찰 소유 고문서 전시회'를 소개하면서 프랑스정부가 피카소의 귀화를 두 번이나 거절했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피카소가 프랑스에 귀화를 두 번이나 신청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지만 이는 언론이 피카소의 정치활동을 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이런 사실은 미술관련 서적을 통해 이미 여러 차례 소개됐다)

그의 공산당 활동은 한국에서 그의 작품활동에 대한 부실한 소개로 이어지기도 했고, 웃지못할 에피소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1970년대 니스를 방문해 피카소를 만났다는 임영방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관장(미술평론가)은 "피카소는 현대미술이 풀어가야 할 과제들을 하나씩 찾아 그 해답을 제시했던 천재이나, 우리나라에는 그가 공산당에 가입했던 전력 때문에 실제 미술사적 위치만큼 널리 소개되지 않은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1996년 1월 22일자 기사 인용)

한국일보 고종석 논설위원은 고정 칼럼 '오늘' 피카소 편에서 "기자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 중엽에, 또래 아이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크레파스 상표는 '피카소파스'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문구점에 나온 그 크레파스 갑 위의 상표 부분에 종이가 덧대졌고, 그 덧대진 종이 위에는 '피닉스파스'라는 새 상표가 쓰여있었다. 피카소파스가 피닉스파스로, 불사조파스로 바뀐 것이다. 왜 그랬을까? 피카소가 공산당 활동을 했다는 것이 어느 순간 문제가 된 걸까?"라며 피카소의 공산당 활동과 관련한 웃지못할 기억을 끄잡아내기도 했다.  

물론 그는 뼈 속부터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예술가였기에 당시 공산당이 가졌던 엄격한 혁명관이나 터무니없는 관료주의, 사실주의만 강조하는 기계적 예술관을 비판하면서 일정정도 거리를 두기도 했다.

그는 "나는 공산주의자다…. 그러나 만일 내가 신발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왕권주의자나 공산주의자, 또는 그 무엇이든 간에 나의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신발을 특별한 방식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일부 신문들은 이 사실만을 강조하기도 한다)그는 프랑스 공산당에 물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불가사의하게도 죽는 날까지 공산당원으로 남아있었다.

한국언론과 공안당국에 의해 학살당한 '모내기'

어찌됐건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이 이적 표현물로 분류됐던 악몽에서 깨어난 반면 '모내기'는 여전히 가위눌림을 당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학살'을 사면복권시킨 19일자 신문은 신학철의 '모내기'를 작품을 대접하지 않고 있다. <"이적표현물"확정 판결받은 '모내기'그림 유엔 "표현자유 침해"구제 권고>(동아일보) <이적표현물로 몰수한 '모내기' 그림 유엔 "표현자유 침해" 반환 권고>(조선일보) <'모내기'그림 15년만에 반환되나 유엔인권이사회 "표현의 자유 침해" 정부에 의견서 보내> (국민일보) <유엔 인권위원회 "신학철씨 그림 돌려 줘야">(중앙일보) <이적성 논란 '모내기'그림 반환되나>(서울신문) <이적물 신학철 '모내기' 작가에 그림 돌려줄까 유엔 표현자유침해 결의>(경향신문) <"민중화가 신학철씨 보안법 처벌은 표현자유 침해" 유엔 '모내기'그림 구제 권고> (한겨레신문)

'한국에서의 학살'이 국내에서 제대로 된 소개 과정 없이 '명작'으로 환대받고 있는데 신학철의 모내기는 잘 해야 '이적표현물'이고, 심지어 그런 그림이 있었냐는 뉘앙스의 '모내기라는 걸개그림'등으로 홀대받고 있다. 사회부 기사여서 그런지 대표적 민중화가인 신학철의 '모내기'는 '작품'이 아닌 '판결 대상' 취급을 받고 있다.

   
▲ 신학철 작 <모내기>
1987년 신학철씨가 그린 '모내기'는 작가의 고향인 경북 금릉을 배경으로 모내기의 모습과 민족적 염원을 함께 담아낸 것이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작품 '모내기'는 써래질- 모내기-수확 이라는 농사의 전과정이 계절의 변화에 따라 아래에서 위로 펼쳐진 것이다. 한 미술평론가의 설명대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그 하단에 농부가 우리 사회의 온갖 잡동사니 쓰레기와 부조리를 써레질하는 그림 <모내기>는 언뜻 단순해 보이기까지 하는 작가의 소박한 소망이 담겨있는 그림"인 것이다.

그러나 1989년 노태우 정권 당시 이 그림은 풍년가를 부르는 북녘과 미국 등의 외세자본에 고통받는 남녘이라는 구도로 '엉뚱하게' 파악한 공안검찰에 의해 이적 표현물로 기소되면서 '예술작품'이 아닌 '판결대상'으로 전락한다. '모내기'는 1,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1999년 대법원에서 이적표현물로 확정됨과 동시에 작품 몰수 판결을 받게 됐고, 유엔인권이사회에 회부된 후 '표현의 자유' 수호차원에서 구제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19일자 기사들은 '이적표현물 확정된' '이적표현물로 몰수된' 등의 표현을 사용하면서 검찰과 사법당국의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거의 모든 신문이 "당시 법원은 작품 '모내기'가 남녘 농부들이 외세를 상징하는 코카콜라와 양담배 등을 바다로 쓸어넣는 장면과 풍년을 경축하는 북녘의 모습을 담고 있어 이적표현물에 해당된다고 보았다"(동아일보 인용)며 법원과 검찰의 해석이 이 작품에 대한 해석의 전부인양 보도하면서 작가의 입장은 전혀 다루지 않았다. 작가의 창작 의도와 입장, 미술계의 평가는 그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이적표현물이라는 이유로 오랜동안 그늘 속에 가려져 있었던 '한국에서의 학살'이 뒤늦게라도 언론을 통해 알려지게 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아직까지 공산당 활동을 이유로 '피카소'는 편협한 방식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러나 '모내기'는 여전히 이적표현물로 남아 감상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이건 유감 이상의 일이다.

*이 기사에서는 <김원일의 피카소>(김원일 지음. 이룸 펴냄 2004) <피카소의 이발사>(모니카 체르닌·멜리사 뮐러 지음. 시공사 펴냄 2002), <총칼을 거두고 평화를 그려라> (박홍규지음. 아트북스 펴냄. 2003)가 참고자료로 활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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