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엄마 눈엔 아기만 보인다는 말처럼, 해직되고 나니 다른 해직자들이 보이더라. 2019년 ‘일주일 후 나가라’는 통보로 갑자기 해직되고 정말 힘들었다. 회복의 방편으로 글을 썼다. 그 과정에서 나 같은 사람들이 정말 많단 걸 깨달았다. 책을 쓴 동력이다. 이런 사람들, 방송계 내 부조리를 말하고 싶었다.”

5년 동안 지역 방송사에서 일한 이은혜(37) 작가에게 방송계의 ‘진짜 모습’은 비정했다. “TV에 나와 사랑과 정의와 다정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얼굴들은 회당 수억 원의 개런티를 받고 빌딩으로 재테크를 한다지만, 화면 뒤에는 쓰러지고 사라지고 감춰지는 이들”이 있었다. 매일 8시간 이상 노동을 투여해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제작진 바이라인에조차 오르지 않는 그림자들도 많았다. 공정을 따지는 뉴스는 매일 보도되지만 정작 내부의 부조리는 취재되지 않았다. 

이 작가는 “싸우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부끄러운 응원”이라는 말과 함께 방송계 속살을 담은 책을 냈다. 지난 1일 발간된 ‘쓰지 못한 단 하나의 오프닝’(꿈꾸는인생)이다. 5년 간 작가 경험, 이로부터 체감한 부조리한 방송계 노동환경 등이 총 3부로 구성됐다. ‘방송가의 불공정과 비정함에 대하여’가 부제다. “정의를 말하는 곳에서 이뤄지는 부당함을, 다정을 말하는 곳에서 이뤄지는 비정을 말하고 싶어” 펴낸 책이다.

▲'쓰지 못한 단 하나의 오프닝'(꿈꾸는인생) 표지.
▲'쓰지 못한 단 하나의 오프닝'(꿈꾸는인생) 표지.

 

문제의식은 책을 넘길수록 고조된다. 1부는 어린 시절 라디오 키드였던 이 작가가 31세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방송작가로 입문해 겪은 좌충우돌을 그렸다. “첫 생방송의 순간, 가능한 한 이 일을 오래 하고 싶다”고 꿈을 꿨던 그는 5년 후 방송계를 “가장 빨리 꿈이 풍화되는 곳”이라 불렀다. 풍화 속도는 고용 형태, 노동 환경에 따라 달랐다. 계약서도 쓰지 않았던 ‘프리랜서’ 방송작가에게 유독 빠르고 독했다.

이 작가는 방송작가들을 지배했던 단어로 ‘원래’를 꼽았다. 방송작가는 원래 프리랜서고, 그래서 보수를 월급이 아니라 꼭 ‘페이’라 불러야 하며 언제든 계약이 해지돼 교체될 수 있는 존재였다. ‘막내작가’ 한 달 페이는 원래 100만원대 초반에다 일을 배우려면 시급 2000원도 참을 수 있어야 했다. 원래 잡일을 다 떠안는 직종이라 ‘잡가’라고도 불렸다. 

작가 노동은 “수천만 원 행사 뒤편에는 이천 원 시급이 있었다”는 말로 설명이 됐다. ‘시급 2000원 일자리’는 이 작가가 2015년에 겪은 경험담이다. 보수가 턱없이 적은 1~3년 차 작가들은 보통 닥치는 대로 일을 구해 수입을 번다. 이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당시 선배 작가로부터 제안받은 한 행사 보조작가 페이가 5만원이었다. 전체 노동시간 대비 시급 2000원도 되지 않은 것. 열정 페이라 항의한 후 페이는 10만원, 시급 4000원으로 올랐다. 

작가는 그림자 인력이기도 했다. 방송작가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뉴스 프로그램에도 있다. 작가들은 뉴스 원고를 쓰고 인터뷰이를 물색해 일정을 잡고 직접 취재도 나간다. 프로그램과 관련된 회계 처리, 주차증 관리 등 잡무도 보통 떠맡는다. 그러나 ‘바이라인’에 작가 이름은 올라가지 않는다. 작가들은 자기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박탈감이 컸다. 이 작가는 한 번 ‘왜 우리는 바이라인에서 빠지느냐’고 상사에게 물었다. “아니, 바이라인이 그렇게 중요해?” 그날 면담은 경력에 도움도 주지 않는다는 상사의 말과 함께 흐지부지 끝났다. 

그럼에도 급할 때마다 찾는 존재가 작가다. 이 작가는 “엄마와 작가의 노동에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가사노동이 티가 나지 않듯, 청소하고 돌아서면 산더미 같은 빨랫감이 보이듯이 “원고 작성, 자료 조사, 협찬 요청, 촬영 현장 동행, 행정, 출연자 응대까지 숨 돌릴 틈이 없고, 최근엔 작가들이 자막 업무를 하는 경우도 꽤 된다”고 적었다. “제작 현장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말이 ‘작가님!’”이기도 하다며 “촬영장 간식 종류부터 출연자 대기실까지, 작가가 파악하지 않아도 되는 변수란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썼다. 

▲'쓰지 못한 단 하나의 오프닝' 중. 사진=출판사 꿈꾸는 인생 페이스북 사진
▲'쓰지 못한 단 하나의 오프닝' 중. 사진=출판사 꿈꾸는 인생 페이스북 사진

 

‘원래’는 가진 자의 마스터키 언어

이 작가는 이에 “‘원래 그런 것’이란 말은 기득권의 언어고, 논리와 혁명에 대응하는 ‘가진 자의 마스터키’”라고 밝힌다. 그런 후 3부에서 ‘떠난 사람들과 싸우는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풍운의 꿈을 안고 방송작가를 시작했다 방송계를 떠난 이들부터 방송 제작 현장의 부조리를 고발하며 숨진 고 이한빛 CJ ENM PD, 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등을 기억하며 비판적 목소리를 낸다. 

이 작가는 방송계 노동 현장을 “방송이 스포트라이트를 끄는 곳”이라고 말한다. “대통령도, 교황도 만나고 머나먼 타국의 대규모 시위와 내전 지역도 방문하는 방송국이 가지 않는 곳, 그 곳은 ‘방송국’”이라는 것이다. 이 작가는 이에 “공정을 외치는 방송사 안에서 이뤄지는 불공정은 대체 어디에 고해야 하나”라고 묻는다.

임신, 출산, 육아, 건강 악화, 모두 방송작가들의 흔한 계약 해지 사유다. 여성 비율이 70% 이상이지만 모성권이 보호되지 않는 대표 직종이 방송작가다. 이 작가는 “이 수십 명의 공통된 사연이야말로 제대로 된 ‘방송 아이템’ 아닌가. 나는 기다리고 있다. 방송국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방송가 ‘막내들’을 취재해 줄 날을. 방송사 드라마국에서 근사한 방송 노동 활극을 찍어 줄 날을”이라고 썼다. 

이 작가는 올해 꾸려진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집행부 구성원으로 노조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원래 그런 것’이란 인식을 바꾸는 일은 절대 혼자 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방송이라는 토양에 뿌리 내린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수많은 ‘원래’를 하나하나 지워 나가자고. 프리랜서는 프리랜서답게, 상근 노동자는 노동자답게 일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보자고. 호의보다는 동의를 해 달라고.” 그가 책에 쓴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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