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 입은 사진 찍어줘요! 현진씨 교복입은 모습 궁금해요.” “20년 연하 여친 있으면 어떠려나.” (15/9/30)

“우리 현진이 나랑 약속 하나 할래? 어떻게 해도 나 안 버린다고” “내가 성폭행해도 안 버린다고 ㅠㅠ” (15/10/2)

“시 한 편 참 썼는데 보여줬나? 디게 야한 시 섹스 이야기 볼래?” (15/10/6)

“현진이 기여워 내 마누라 삼았음 딱 좋겠다” “나는 빵현진이 먹고싶당” (15/10/7)

- 판결문에 첨부된 박진성 시인 카카오톡 발언 일부

‘무고녀’, ‘무고범죄자’, 돈 요구한 ‘꽃뱀’. 지난 5년 각종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김현진씨(23)를 낙인찍은 말이다. 포문은 항상 가해자인 박진성 시인이 열었다. 그는 자신의 SNS에 김씨가 ‘허위 폭로자’라고 꾸준히 글을 썼다. 김씨 실명, 사진, 나이, 주소지 일부가 공개된 주민등록증까지 올려 신상 정보까지 다 노출했다.

김씨는 쭉 대응하지 않았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꼬리를 잡혀 더 진흙탕 싸움에 빠진다고 생각했다. 공개 사과하라는 박 시인의 경고 문자도 수시로 왔지만 무시했다. 김씨는 대신 학업과 자기 생활에 열중했다. 자신의 삶을 지키고 불필요한 스트레스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 멀리했고, 진실을 말했기에 의연했다.

그리고 5년 후 자신의 폭로가 거짓이 아니라는 판단을 받았다. 박 시인이 제기한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 1심 재판에서다. 소송에 대응할 수밖에 없어 시작한 싸움이다. 김씨는 그제야 처음 자기 목소리를 냈다. “저는 진실을 말했고, 오히려 박 시인이 허위사실로 제 명예를 훼손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5월 승소했다.

김씨는 2016년 10월 박진성 시인의 성희롱을 고발한 최초 폭로자다. ‘2015년 고교 2학년 당시 박 시인에게 온라인 시 강습을 받던 기간에 카카오톡·전화 등으로 성희롱을 당했다’는 내용이다. 침묵을 지켰던 김씨를 누가 ‘무고 미투녀’로 몰아왔을까. 지난달 말 김씨를 만나 지난 소회를 들었다.

▲사진=istock.
▲사진=istock.
▲김씨가 2016년 10월 게시했던 최초 폭로글 첫 대목 갈무리.
▲김씨가 2016년 10월 게시했던 최초 폭로글 첫 대목 갈무리.

피해자 주민등록증 트위터에 올린 가해자

“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고소를 서너 번 당해 처벌받은 범죄자가 돼 있더라고요.” 김씨가 웃으며 말했다. 김씨는 지난해 소송 대응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사이버 불링의 실체를 확인했다. 그 중엔 ‘김씨가 돈을 요구했다’는 음해도 많았다. 2019년께 박 시인이 대화 맥락과 상관없이 일부 카카오톡 발언만 떼어 내 SNS에 공개하면서 광범위하게 유포됐다. “그러니까 도움은 괜찮구요.. 주시려면 전 돈이 좋습니다..”라는 문자다.

이 사건 판결에서도 인정되지 않은 주장이다. 전후 맥락을 살폈을 때 돈을 요구한 취지로 볼 수 없다는 점에서다. 당시 대화는 김씨의 폭로 바로 다음 날, 박 시인이 실명을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먼저 말을 걸며 시작됐다. ‘문예창작학과 수험 실기를 도와주겠다’는 등의 말이 나오자 김씨는 도움이 필요없다고 강조하려다 이 카톡을 썼다. 이후 ‘병원 치료비를 줄 의향이 있다’는 제안도 나왔으나 김씨는 거절 의사를 비쳤다.

▲지난 5월 21일 청주지법 영동지원이 허위사실 적시로 김씨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박진성 시인에게 손해배상을 명령한 트위터 글 일부.
▲지난 5월 21일 청주지법 영동지원이 허위사실 적시로 김씨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박진성 시인에게 손해배상을 명령한 트위터 글 일부.

 

‘거짓 사과문’ 소동도 있었다. 김씨를 사칭한 트위터 계정에 “정말 죄송하다. 박 시인이 저에게 성희롱 발언을 했다는 폭로는 거짓이다. 폭로한 이유는 그저 호기심 때문이었다”는 글이 2018년 7월 게시됐다. 즉시 온라인 커뮤니티에 퍼지며 ‘꽃뱀론’이 등장했다. 2년 후 박 시인은 이를 재판에 활용했다. 김씨가 이 계정 소유자라고 밝혔고, 법정에서도 ‘김씨에게 사과문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씨는 “명백한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박씨에게 사과한 적이 한 번도 없고 계정 소유자도 아니다. 

김씨의 주민등록증은 아직까지 온라인을 돌아다닌다. 2019년 3월 박 시인이 트위터, 블로그, 페이스북 등에 올린 후부터다. 주민등록증이 게시된 사이트마다 연락해 삭제 요구를 하다 이틀 만에 그만뒀다. 삭제 속도가 유포 속도를 따라잡질 못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박 시인은 김씨 얼굴 사진도 그대로 올리며 “변호사가 비방이 아닌 ‘재발 방지’ 목적이면 괜찮다고 했다”며 “1998년생 김현진”이라고 밝혔다. 김씨의 별칭 마냥 알려진 ‘98년생 김현진’은 박 시인이 유출한 개인정보다.

▲박진성 시인이 sns에 공개한 김씨의 주민등록증(왼쪽·모자이크는 자체 처리)과 김씨를 사칭해 사과문을 올린 '반현' 트위터 계정의 글.
▲박진성 시인이 sns에 공개한 김씨의 주민등록증(왼쪽·모자이크는 자체 처리)과 김씨를 사칭해 사과문을 올린 '반현' 트위터 계정의 글.

 

한국일보 정정보도 판결문, 실체적 진실 빠졌다

1심 선고까진 1년 7개월이 걸렸다. 지난 5월21일 청주지법 영동지원 노승욱 판사는 박 시인의 부적절한 발언과 허위 사실 적시 등을 인정해 김씨에게 1100만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김씨가 허위 폭로했다는 박 시인 주장은 전부 기각됐다. 2019년 10월 박 시인이 손해배상 소송을 내자 김씨는 반소로 맞섰다. 김씨는 박 시인의 각종 성희롱 발언과 강요·위협성 발언, 허위 사실 적시, 개인정보 유포로 인한 인격권 침해 등을 주장하며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김씨는 “같은 사안을 다룬 한국일보 정정보도 관련 판결 때문에 재판에 이리 오랜 시간이 걸린 게 아닐까”라고 추측했다. 2016년 10월 한국일보는 피해를 고발한 5명의 사례를 종합해 박 시인의 성 비위 의혹을 보도했다. 여기에 김씨의 사례도 포함됐다. 이를 심리한 서울중앙지법 민사25부(재판장 최희준)는 2018년 7월 김씨의 폭로 골자까지 모두 허위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카카오톡 전문에 미성년자에 대한 성희롱으로 해석될만한 표현은 뚜렷하게 발견되지 않는다”고 본 것.

이 판결은 한국일보 내에서도 논란이었다. 사실 입증이 제대로 되지 않았단 점에서다. 이어진 항소심에선 피해자 2명이 신원 노출을 각오하고 ‘보도 내용은 사실’이라는 진술서를 한국일보에 써줬다. 김씨가 이 중 한명이었다. 그런데 도중에 한국일보 측이 갑자기 박 시인과 합의를 해 2심을 종결했다. 그리고 2019년 1월 30일 “위 보도 내용은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이를 바로 잡습니다”란 정정보도문을 냈다. 취재 기자와 사전 상의는 없었다. 회사가 일방적으로 ‘모두 사실이 아니’란 정정보도를 박 시인과 합의한 것.

▲한국일보 민주언론실천위원회 2019년 2월 소식지 갈무리.
▲한국일보 민주언론실천위원회 2019년 2월 소식지 갈무리.

 

한국일보 민주언론실천위원회는 한 달 후 “‘모두 사실이 아니다’ 정정보도문의 전말”이란 글을 소식지에 싣고 회사를 비판했다. 민실위는 “적어도 관련자(피해자)들을 위해 조정 과정에서 정정보도문 최종 문구를 다퉈 ‘일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고 합의 내용을 다듬거나, 끝내 패소를 하더라도 소송에서 진실성을 다퉈보지는 못했다”며 “담당 기자는 자신이 반대하는 정정보도문에 법률대리인이 서명을 하는 동안 어떤 사실도 알지 못한 셈인데 심각한 자기방어권 훼손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과 한국일보 정정보도 판결의 차이는 사실 입증의 정도다. 김씨는 자신의 소송에서 적극적으로 피해 사실 입증에 나섰다. 청주지법 영동지원 노승욱 판사는 김씨의 폭로 글을 카카오톡 대화 전문과 문장 단위로 대조해 폭로 글이 “매우 구체적이고 명확하며 대체로 사실과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통화상 성희롱 발언도 녹취 등 증거가 남아 있지 않다며 기각하지 않았다. 김씨가 큰 충격을 받아 기억하고 있던 ‘여자는 남자 맛을 알아야 한다’란 발언이다. 재판장은 김씨와 박 시인 두 당사자를 법정에 세워 심문을 거쳤다. 카카오톡 기록에서 추정되는 통화 이력, 전후 카카오톡 대화 내용이 당시 통화 내용과 연계된 사실 등을 종합해 개연성을 인정했다.

노 판사는 한국일보 보도를 다룬 재판부와 반대로 성적 모욕감을 주는 발언도 특정했다. 김씨가 최소로 선별해 법원에 주장한 31개 성희롱 발언 중 2개만 “성적 굴욕감과 혐오감을 불러 일으킨다”며 위법성을 인정했다. ‘내가 성폭행해도 안 버린다고’와 ‘빵현진 먹고 싶다’는 문자다.

김씨가 특정한 나머지 발언은 ‘교복 입은 사진을 찍어달라’거나 ‘내가 애인하자고 계속 괴롭혀야지’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 하죠. 전제는 남-녀로서예요’ 등의 문자다. 당시 김씨는 사제 간 관계가 악화된다는 염려 등으로 거부감을 직접 표현하지 못하고 에둘러 선을 긋거나 상황을 희화화하며 넘어갔다. 그래도 유사한 말이 반복되자 ‘여자를 좋아한다’고까지 둘러댔다. 박 시인은 “그럼 남자는 나 해요”라거나 “여자랑 스킨쉽 해봤어요? 손잡고 키스, 포옹, 심하면 섹스”라고도 보냈다.

▲박 시인과 김씨 간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 1심 판결에 첨부된 '별지 3 목록'. 김씨가 성희롱 발언이라고 특정한 31개 발언 중 일부.
▲박 시인과 김씨 간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 1심 판결에 첨부된 '별지 3 목록'. 김씨가 성희롱 발언이라고 특정한 31개 발언 중 일부.

 

박 시인의 가장 큰 무기도 한국일보 정정보도 판결과 정정보도문이었다. 각종 서면에서 빠지지 않는 입증 근거였다. 김씨가 ‘무고 범죄자’라며 대대적으로 낙인찍히는 시점도 이때부터다. 2018년 7월 판결이 나온 후 박 시인은 SNS에 거듭 ‘최초 폭로자 이름, 전화번호, 출신학교를 알고 있다’거나 ‘본인의 자백을 받았다’고 썼다. 주민등록증 유출, ‘돈을 요구했다’는 음해, ‘무고범죄자’ 명명이 3년간 반복됐다.

이 중 일부가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으로 인정됐다. 김씨가 허위 폭로를 했다는 요지의 트위터 글 12개다. 노승욱 판사는 “(최초 폭로) 글 내용이 허위라 보기 어렵고 김씨가 돈을 요구할 목적으로 글을 작성했다고도 보기 어려운데, 박 시인이 ‘돈을 요구할 목적으로 글을 썼다’고 강조하면서 김씨의 실명, 사진, 개인정보가 담긴 주민등록증까지 공개했다”며 “김씨의 명예를 훼손하고 인격권을 침해했다”고 밝혔다.

박 시인은 성희롱 피해 이후 김씨가 다정한 내용의 카카오톡 문자를 보냈다며 피해자로 보기에 믿기 어려운 행동을 했다고 주장했다. 노 판사는 "성희롱 피해를 당한 경우, 마땅히 전형적인 어떤 모습이 드러나거나 어떤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사고는 '피해자다움'의 행동 양식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부족하다고 해서 진술을 믿기 어렵다고 단정해선 안된다"고 밝혔다.

▲대구지방검찰청 앞에서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2018년 2월 검찰 내 성폭력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대구지방검찰청 앞에서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2018년 2월 검찰 내 성폭력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방청석 꽉 채워준 ‘뒷배’ 여성 연대자들

김씨는 현재 박 시인에 대한 형사 고소를 준비 중이다. 주민등록증을 공개해 개인정보를 유출한 점, 자신에 대한 허위 사실을 무분별하게 유포해 명예를 훼손한 점 등이 위법이라는 주장이다.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은 박 시인 측이 항소해 2심 대응을 준비 중이다.

김씨는 자신의 승소에 “운이 좋았다”고도 했다. 카카오톡 대화 등 증거가 남은 점이 컸다. 성폭력 사건 특성상 물증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 피해자가 대다수다. 수사기관이 내린 증거불충분 무혐의 판단이 피해자를 향한 무고 주장의 근거로 쓰이는 사례가 적지 않다. 증거가 없어 문제제기조차 포기하는 피해자도 다반사다.

김씨는 “연대자분들께 가슴 깊이 감사하다”고 말했다. 소송비 모금부터 방청 연대까지 김씨를 도와준 “이름 모를” 여성들이다. 상당수는 여성 문인들이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 김씨의 어려움을 알고 1심 소송비 절반 가량을 후원해줬다. 연대자들은 첫 재판과 당사자 심문이 있던 재판 땐 30여석 방청석을 가득 메워줬고 김씨가 기차역과 법원을 오가는 길도 동행했다. 두 명의 문인은 매 재판을 참관했다.

김씨는 “최초 고발 땐 나 혼자라는 게 두려웠다. ‘나만 조용히 하면 문제 될 게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고발 후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며 “내가 승소했다기보다 우리가 이겼다는 거, 실제로 피해를 입은 게 맞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잘 지내고 있었다는 것. 이걸 알리고 싶어서 인터뷰에 응했다. 다른 피해자들이 일상을 살아갈 용기를 가지고 각자의 삶을 지켜나가는 하나의 선례로 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