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람(39·가명) 작가는 지난 15년간 숙명처럼 들어온 말 한마디를 머리에서 지웠다. “우린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체념이다. ‘누가 어느 방송사에서 갑자기 잘렸다’는 소식은 워낙 비일비재해 작가들에겐 뉴스가 아니었다. 상황이 부당해도 “어쩔 수 없지”란 반응이 더 흔했다. 프리랜서가 의지할 수 있는 법은 마땅찮았고 업계에 밉보인다는 두려움도 오래 쌓여 왔다.

현장 분위기는 미세하게 바뀌고 있다. 부당해고나 계약 해지에 직접 항의하는 작가들이 늘어나면서다. 지난 3월 부당해고로 MBC와 다퉈 승소한 아침 뉴스 작가 2명의 사례가 가장 유명하다. 이보람씨도 이 흐름에 동참한 작가다. 그는 “하루아침에, 영문도 모른 채 잘린 모멸감”에 부당 계약 해지 확인을 구하는 민사 소송 대응을 시작했다.

▲사진=istock.
▲사진=istock.

 

면담에서 갑자기 “새 작가 구했다”

이 작가는 SBS의 ‘열린TV 시청자세상’을 제작했다. 매주 목요일 오전 1시간가량 방영되는 ‘비평 옴부즈맨’ 프로그램이다. 제작은 ‘ㅈ외주제작사’가 맡았다. 대표를 제외하면 PD 2명, 작가 2명 등 제작진 4명이 협업했다. 이 작가는 메인 작가로 프로그램 전반 구성을 총괄하며 10여분 가량인 한 꼭지의 VCR 구성도 함께 맡았다.

이 작가가 프로그램에서 하차한 때는 지난 5월11일. 2017년 4월 프로그램을 시작한 지 4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그는 대표와의 면담에서 ‘새 작가를 구했다. 다음 주까지만 해라’는 통보를 들었다. 갑작스런 통보에 이유를 묻자, ‘업무 피드백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선을 넘었다’는 답을 들었다.

계약 기간은 10개월이 더 남은 때였다. 프리랜서 지위의 이 작가는 제작사와 2022년 3월 31일까지 일하는 1년짜리 업무위탁 계약을 맺었다. “계약서 잉크가 채 마르기 전”이기도 했다. 4월 중순 계약서를 쓴 지 3주 만이었다.

이 작가는 대표의 이유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작가는 “‘피드백하지 못한 것에 앞으로 잘하겠다고 했고, 열심히 해서 대표님께 인정받고자 했다’고 말했지만 대표는 ‘이미 늦었’고 ‘왜 진작 그러지 못했냐’고 답했다”고 전했다. 이 작가는 다음 주 프로그램까지 제작하라는 대표 말에 “이 정신으로 어떻게 다음 주 방송을 만드냐”고 답했다. 그렇게 제작사를 나왔다.

▲이보람(가명) 작가가 4년 간 제작에 참여했던 SBS 비평 프로그램 '열린tv 시청자세상' 로고.
▲이보람(가명) 작가가 4년 간 제작에 참여했던 SBS 비평 프로그램 '열린tv 시청자세상' 로고.

 

이 작가는 대체 뭘 잘못했나

이 작가는 뭘 잘못했을까. 이보다 일주일 전 대표와 제작진 간 마찰이 있었다. 스튜디오 녹화 당일, 제작진이 대표가 넣으라고 지시한 클로징 멘트를 SBS 측 요구로 삭제했는데, 이 과정이 대표에게 다 보고되지 않았다. 이를 스튜디오에서 확인한 대표가 촬영장에서 ‘나를 무시하는거냐’, ‘누가 뺐느냐’며 고성을 지르며 제작사 PD와 작가를 질책하기 시작했다. 제작진들은 바로 회의를 열어 ‘문장이 빠졌는데 보고를 안 한 건 PD와 작가의 실수이고, 과거엔 관행적으로 본사 의견에 따랐다’며 업무 소통에서 쌓인 오해를 해명했다. 담당 PD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해명했고, 이 작가도 ‘앞으로 피드백을 잘 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대표가 일주일 후 이를 근거로 계약 해지를 요구한 것. 이 작가는 “15년 일하면서 이런 폐해를 많이 듣거나 봐왔고, 나도 많이 옮겼다. 그런데 이번엔 정말 작가를 소모품처럼, ‘너 내 말 안 들었다’ ‘너 선 넘었다’는 이유로 자르니 모멸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 작가는 “최소한의 보호장치인 정부 표준 집필계약서조차 무용한 게 현장 실정”이라고 했다. 이 작가도 표준집필계약서와 똑같은 계약서를 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단 점에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18년 방송작가가 계약서 없이 일하거나 갑에게만 유리한 불공정한 계약서를 쓰는 실태가 공론화되자 표준 집필 계약서를 마련했다. 계약 기간, 업무 내용, 계약 변경 시 필요조건, 부당한 계약 취소 금지 등을 명시했다.

계약서는 “상대에 귀책사유가 없음에도 본 계약 내용을 임의로 취소·변경해선 안된다”(10조)거나 “특정 사유가 발생한 경우 상대에게 14일 이내의 기간을 정해 서면으로 그 이행을 통보하고, 이행하지 않으면 계약 전부나 일부를 해지할 수 있다”(20조)고 명시했다. 이 작가 경우 귀책 사유가 없거나, 있다고 해도 서면으로 통지하고 이행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가 없었다. 이 경우에도 작가가 ‘정당한 사유없이 계약의 중요 내용을 위반’했거나 ‘계약 업무에 필요한 일의 이행을 지연해 지장을 초래’하는 등 중대한 책임이 확인돼야 한다.

▲사진=방송작가유니온
▲사진=방송작가유니온

 

이 경우 작가들은 뭘 할 수 있을까. 이 작가가 민사 소송밖에 찾지 못한 이유는 다른 수단이 마땅치 않아서다. 이 작가가 재택근무를 하고 제작사가 ‘5인 미만 사업장’인 점에서 근로기준법 보호를 받기 어려웠다. 이 작가는 주 5일을 꼬박 프로그램 제작에 할애했지만 출·퇴근 시간이나 장소에 구속받지 않았다. 방송작가노조 등의 문을 두드려 해결 방법을 찾아보았으나 제작사 입장이 완고해 대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민사 소송엔 시간적·경제적 비용이 든다. 대다수 작가들이 직접 대응을 포기하는 지점이다.

SBS PD 출신들 돌아가며 대표 맡은 제작사

ㅈ제작사의 구조는 특이하다. 이전 대표들이 모두 SBS를 퇴직한 PD 출신이다. 대표가 바뀔 때마다 사업체명도 바뀌었다. 제작진과 제작 프로그램은 그대로지만 외형만 바뀌었다. 2017년엔 ‘C제작사’가 3여년 외주제작을 맡았고, 2020년엔 ‘J제작사’, 그리고 올해 ㅈ제작사로 바뀌었다. 1인 대표 체제로, 나머지 제작진은 모두 개인사업자나 프리랜서다.

김한별 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장은 “업체 대표나 SBS와의 계약 관계를 봤을 때 자회사처럼 SBS와 긴밀한 관계사다. 그래서 더 방송사가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아 보인다”며 “원청이 외주 제작사의 불법·부당 문제에 시정조치를 내리는 등 적절한 책임있는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SBS 관계자는 이에 “당시 갈등을 해결하려고 프로그램 담당자가 중재 시도를 했지만 양쪽의 주장하는 바가 확연히 달라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밝혔다.

업체 대표는 29일 이와 관련 “‘일 당장 그만 두라’는 식으로 일방 통보한 적 없다. 대화 과정에서 작가가 ‘이런 기분으로는 다음 주 프로그램 만들 수 없다’며 스스로 그만둔다고 먼저 밝힌 게 사실”이라며 “새 작가를 뽑을 예정이라고 했지 당장 뽑은 상황도 아니었고, 일에 있어서 당장 그만 두면 안 되니 5월 말까지 일을 하는 게 어떠냐고 묻는 상황이었다”고 반박했다.

대표는 ‘왜 계약 변경을 통보했느냐’는 물음에 “본질적으로는 작가의 현저한 능력 미달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업무 과정에서 모욕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계약 해지 1주일 전 벌어졌던 제작진과 마찰 중 “내가 지시한 내용을 이 작가가 반영하지 않았고, 피드백을 하지 않았으며, 이에 대해 나중에 ‘SBS 지시가 있어 그대로 따랐다’며 ‘그게 관행’이라고 답했고 그 과정에서 모욕과 무시가 계속 있었다”고도 말했다.

대표는 내용 증명을 통해서도 “사용자의 정당한 지시에 정당한 사유 없이 불복해 직장규율 문란케함으로써 노·사관계 신뢰를 상실케 했다고 인정되면 해고의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작가는 “당시 대표가 지시한 내용은 ‘아쉽게도 SBS 뉴스에서는 볼 수 없었는데요’란 한 문장을 넣으라는 거였다”며 “SBS에서 문장을 빼는게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한 번 왔었지만 대표의 지시가 있어 고치지 않았다가, 더빙실 녹음 작업 직전에 같은 의견을 듣고 뺀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작가는 꼬박 4년 동안 SBS 뉴스·프로그램을 ‘본방 사수’하며 모니터했다. 비평 프로그램 작가로서 “방송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아이템을 찾거나 편집구성안을 쓸 수 있었기에 뉴스와 드라마는 꾸준히 챙겨봤고, 교양·예능 프로그램도 시간 날 때마다 TV를 틀어놓고 모니터”했다. 비평 프로그램 제작이 적성과 흥미에 맞아 ‘오래 일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4년을 일했다.

이 작가는 “방송작가들은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집필 계약서를 지키고 동료로 존중하며 소통하는 것이 어려울까”라며 “방송작가를 동료 제작진으로 동등히 여기지 않으니까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게 아닐까. 작가를 소모품처럼 무시하는 행태가 문제제기를 하게 된 동기”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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