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B청주방송 고 이재학 PD의 아버지는 청주 인근 괴산군을 4개월째 부지런히 오가고 있다. ‘집 짓기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서다. 아들·딸, 손자·손녀 등 가족 모두가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려던 꿈이 있었다. 지난해 2월을 기점으로 내용이 일부 변했다. 세상을 먼저 떠난 둘째 아들 이재학 PD를 기리는 공간이 포함됐다.

가칭 ‘JP 하우스’다. JP는 재학 PD의 영어 앞글자를 땄다. 가족들 쉼터와 작은 텃밭 옆에 이 PD를 추모하는 작은 공간을 만들 계획이다. 이 PD를 기억하는 지인들이 들릴 수 있도록 그의 비석과 명예사원증 등을 보관하려고 한다. 완공은 2월4일 이 PD 1주기에 맞추려 했으나 늦춰졌다. 이 PD의 아버지는 오는 3월 말을 목표로 작업 중이다.

“이게 이렇게까지 끌 일이냐. 사과도 괜히 받았다.” 이 PD의 동생 이대로씨는 청주방송이 일부 합의를 위반해 갈등을 빚은 지난 반년 동안 부모님이 애통해했다고 전했다. 특히 합의서에 서명한 지난해 7월, 유족은 대주주인 이두영 이사회 의장을 만나 직접 사과를 받았으나 이후 돌변한 입장을 보며 더 상처가 컸다. 이씨는 유족이 이 PD를 온전히 보내지 못한 이유로 “청주방송 임원들의 거짓 태도”를 말했다.

▲4일 오후 1주기 추모문화제 후 고 이재학PD 영정사진을 들고 청주 거리를 행진한 유족 이대로씨. 사진=손가영 기자.
▲4일 오후 1주기 추모문화제 후 고 이재학PD 영정사진을 들고 청주 거리를 행진한 유족 이대로씨. 사진=손가영 기자.

 

‘외부 단체들 데모 때문에 합의했다?’

최근 청주방송 측이 유족에 상처를 준 사건이 있었다. 이재학 PD의 친구이자 동료인 청주방송 MD(방송운행담당자) 출신 정아무개(39)씨 재판에서다. 5년 동안 파견·용역노동자로 일하다 2019년 계약갱신이 중단된 정씨도 이 PD처럼 자신의 노동자성을 확인하는 소송으로 청주방송과 다투고 있다.

‘합의서는 시민단체들이 밖에서 데모해서 어쩔 수 없이 합의한 거다. 무슨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정씨는 지난 1월 열린 재판에서 청주방송 측 변호사의 발언을 전했다. 청주방송이 이 PD 명예회복 등의 의제를 두고 유족, 언론노조, 시민사회대책위 등과 약속한 지난해 7월 합의를 “외부 단체가 데모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부정한 것. 정씨가 MD의 직접고용 의무를 주장하면서 합의서를 증거로 내자 변호사가 이를 반박하면서 말했다.

이 변호사는 청주방송 등기이사다. 이두영 회장의 측근인 그는 법률가로 청주방송 이사회 내에서 발언권 비중이 크다고 알려졌다. 청주방송 이사회는 지난해 9월부터 청주방송 합의 위반 요인으로 지목됐다. 이 PD가 제기한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둘러싼 위반이 대표적이다. 청주방송과 유족은 이를 법원 강제 조정으로 마무리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절차 도중 이사회가 ‘이 PD가 부당해고됐다’거나 ‘회사가 사망 책임을 통감한다’는 조정 문구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문구는 이미 합의로 확정한 터였다. 그렇게 지금까지 5개월 넘게 합의 이행이 파행돼왔다.

▲1주기 추모문화제 종료 후 유족이 이 PD 영정사진을 들고 눈물 짓고 있다. 사진=손가영 기자.
▲1주기 추모문화제 종료 후 유족이 이 PD 영정사진을 들고 눈물 짓고 있다. 사진=손가영 기자.

 

이재학 PD 명예회복 다 못해, 소송 재개

청주방송 관계자는 이에 “조정결정문은 당연히 유족의 아픔을 달래는 내용이 담겨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지만, 당초 결정문 내용을 보면 앞으로 청주방송을 상대로 한 다양한 소송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며 “청주방송 자문 변호사를 비롯해 노무사 등 다수 전문가들은 이런 점을 우려하고 있다”고 입장을 밝혔다.

이 관계자는 “전문가들은 우려를 불식할 수 있는 별도 조항을 마련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의견을 냈고 우리 사회에서 여러 갈등을 중재한 경험이 있는 분들이 중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며 “결국 본안 소송으로 이어졌지만 끝까지 협상의 가능성을 놓지 않고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정문은 지난해 7월22일 청주방송 경영진이 언론노조, 유족, 시민사회대책위 등 3자와 합의한 내용이다. 내용도 청주방송, 유족 등이 1달 넘게 입씨름해 조정했다. ‘결정문 내용이 추가 소송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회사 입장에 유족은 ‘합의를 했는데 무슨 추가 소송이냐’며 말을 지어낸다는 입장이다. 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는 지난 1월 회사가 합의를 위반했다고 의견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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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7일 오전 '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대책위원회'가 서울에서 1주기 추모주간 선포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손가영 기자.

 

언론노동자들의 과제, ‘근본 성찰’

지난 1년 노사의 노력을 두고도 평가는 다양하다. 7월 합의 이후 노사는 ‘비정규직 고용 구조 개선 TF’를 만들어 10월까지 3개월 동안 대안을 논의했다. 정규직화가 권고된 비정규직 9명 중 1차 정규직화 대상 3명을 정했고 용역업체에 고용된 경비·미화 노동자 4명을 촉탁직으로 직접 고용했다. 일부 방송작가의 원고료를 올리고 고용 안정을 강화하는 계약서 조항을 신설했다. 조직 문화 개선을 위한 각종 지침을 마련하거나 교육 등 서비스 제공하는 안은 대부분 이행했다.

이행을 감시하는 ‘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대책위원회’ 내에서는 “최선을 다했다”는 평가와 “시혜적 접근에 그쳤다”는 비판이 공존한다.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 소속인 안명희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집행위원은 “노동법 바깥의 노동자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지 어려운 문제는 맞지만, 이걸 핑계 삼아 피하지 않고 근본적으로 고민하고 반성·성찰하는 게 의지를 보여주는 모습”이라며 “1주기 추모문화제에서 (언론노조 등) 내부를 향한 발언들이 나왔다. 의지를 보여줬다면 내부와 함께 하지 않았을까”라고 지적했다.

진상조사위 간사를 맡았던 윤지영 변호사도 내부 감시·견제 역할의 공백에 아쉬움을 표했다. 이 PD 명예회복은 합의 위반으로 중단됐고 책임자 4명 중 2명의 징계는 이 PD가 사망한 지 1년이 넘었으나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이 PD가 속했던 기획제작국의 ‘무늬만 프리랜서’들 처우도 아직 개선이 되지 않았다. 이 사건 합의의 핵심 내용들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유족은 지난 1월 언론노조가 이와 관련해 청주방송지부에 모범조합원상을 시상한 사실에 아쉬움을 표했다. 합의 이행 관련한 노력과 별개로 사건 전체 맥락과 청주방송의 현재 합의 위반을 고려하면 유족의 심정과 온도 차가 지나치게 크다는 입장이다. 유족은 부당해고된 이 PD를 실질적으로 도와준 직원이 내부 소수 비정규직에만 그친 사실과 이 PD를 부당해고하고 소송을 방해한 책임자들이 언론노조 및 청주방송지부 임원을 역임한 사실에 모순을 느꼈다. 상을 받은 직원이 6여년 전 이 PD에게 횡령을 지시한 적이 있기도 했다. 유족들은 근본적인 성찰이 선행돼야 한다고 여겼다.

한 대책위 관계자는 “당사자들이 자기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 언론노조 등도 대단히 열심히 했다. 그런데 실제 비정규직들이 나서지 못한 게 안타깝다. 청주방송 뿐 아니라 방송작가, 방송제작스태프 등 각 현장의 과제기도 하다”며 “나 하나 목소리 내봤자 뭐가 달라지냐는 불신이 현장에 있다. 그러나 당사자들이 힘 있게 싸우지 않으면 갈 길은 더 멀다”고 말했다.

▲지난 7월 청주방송 내 마련된 고 이재학 PD 빈소.
▲지난 7월 청주방송 내 마련된 고 이재학 PD 빈소.

 

방송 비정규직 1주기 소회 “부채감과 책임감”

대책위에 속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재학 1주기를 대하는 심정은 비장하다. 김순미 방송작가유니온 사무국장은 “유니온엔 이재학 PD의 사건을 자신의 문제라고 느낀 조합원이 많았다. 특히 지역의 경우 이 PD처럼 십수 년 장기 근속한 작가들이 많다”며 “이 사건으로 방송 현장에 조심스러운 분위기는 생긴 것 같다. 방송 비정규직이란 게 워낙 덩치가 큰 문제니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명확하진 않지만 바꿔야 한다는 인식이 조금씩 퍼져가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김 사무국장은 “2019년 대구MBC에서 최초로 방송작가와 방송사 간 교섭이 열렸으나 그 이후로 멈췄다”며 “근래 언론노조에서 교섭 지침으로 비정규직 문제 개선과 관련된 내용을 넣으라는 지침이 나왔다. 유니온도 노조 자체에 ‘비정규직위원회’를 만드는 등 조직·예산·정책 측면으로 적극 지원해달라는 요구도 하고 있다. 방송사와 교섭 재개를 포함해 노조 내에서도 여러 노력을 해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한별 부지부장도 “이재학 PD가 고통스러워할 때 전혀 모른채 함께 하지 못했다는 부채감이 있다”며 “어떻게 보면 한 차례 시행착오가 있었기 때문에 절대 같은 일을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방송 비정규직들의 근로자성을 어떻게 다툴 것인지 등의 고민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려면 조직화도 필요하고 여론도 필요하고, 단순히 법리 싸움으로 되는 일이 아니어서 고민이 깊다”고 덧붙였다.

문화·예술 분야 프리랜서 노동인권 보호 운동을 하는 안명희 집행위원은 ‘비고용 노동자’ 일반의 문제를 더 적극 제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비고용 노동자는 노동을 하지만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프리랜서, 플랫폼노동자, 특수고용직 등이다. 안 집행위원은 “규모가 작은 사업장과 문화예술 노동자 조직화를 고민 중이고, 정책적으로는 비고용 노동자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노동관계법을 어떻게 개정할 수 있을지 대안을 찾는 워크숍 등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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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7일 오전 '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대책위원회'가 서울에서 1주기 추모주간 선포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속 이름은 사고로 목숨을 잃은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름이다. 사진=손가영 기자.

 

안 집행위원이 또 “이 사건은 비정규직 현장이 나빠만 지다가 이젠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걸 보여줬다. 마치 지난 20년 간 프리랜서 등 비정규직 남용이 늘어난 걸 몰랐던 것처럼, 아무 아무 일 없다는 듯 살다가 결국 누군가 목숨을 잃었다”며 “노조가 최선을 다했지만 힘이 역부족이었다고 말할 입장이 아니라 나빠지는 현실에 아무 대응을 하지 못했다. 결국은 현장에 노조를 만드는 등 조직화를 기본으로, 좀 더 목적의식적으로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내부 정규직 조합원들의 반발과도 싸울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영기 독립피디협회 사무국장은 방송법 개정을 지목했다. 방송법상 ‘방송 노동자’ 정의 법제화가 대표적이다. 영화산업노조는 2005년부터 노동권 보호를 주장하며 싸워 왔고 2015년 영화 및 비디오물 진흥에 관한 법률 2조에 ‘영화 근로자’ 개념을 신설했다. 영화산업노조는 이를 근거로 근로계약서 작성 등 스태프들 노동 환경을 개선 시켜왔다. 최 사무국장은 “법 개정을 통해 구속력을 발휘케 해 갑(방송사 등)들 스스로 어쩔 수 없이라도 변화케 하는 것이 오로지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유족은 이르면 이달 재개될 항소심에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대책위 관계자들은 사망 사건 책임자들의 대응을 지켜보고 있다. 지난해 10월 징계해고된 전 기획제작국장은 해고 직후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넣었으나 지난 3일 기각됐다. 전 경영기획국장은 지난해 12월 정직 3개월을 받은 직후 효력 취소 가처분 신청을 내 회사와 법적 싸움 중이다.

회사가 남은 책임자 2명의 징계도 얼마나 적극적으로 추진할지도 감시 대상이다. 이행 합의를 주도한 이성덕 현 사장의 임기는 오는 3월 중순까지다. 이두영 의장을 비롯한 이사회가 현 사장과 반대 입장을 낸 상황에서 사장 교체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대책위 내에선 이 경우 후임 사장이 책임자 징계를 비롯한 남은 이행 과제를 무산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높다. 남은 징계 대상자 중 1명이 이 의장과 인척 관계다.

청주방송 관계자는 1주기와 관련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빌고, 이유를 불문하고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에 대해 통렬히 반성한다"며 "청주방송은 지난 1년간 무거운 사회적 책임감으로 이행 방안을 실천해 왔다"고 밝혔다. 책임자 징계와 관련해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시시비비를 가려서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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