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 사건 파기환송심 결심을 앞두고, 재판부가 지난 30년 동안의 삼성그룹 총수 범죄 8가지를 지목하며 삼성에 소명을 요구했다. 사건마다 준법 감시 시스템이 제대로 적용됐는지를 확인하는 취지다. 실효성이 확인되지 않으면 삼성그룹 준법감시제도는 양형 요소로 반영되지 못할 수 있다.

서울고법 형사1부(정준영 부장판사)는 지난 21일 열린 9차 공판에서 이같이 밝혔다. “준법감시위 전문심리위원에 제출될 자료였지만 (제출되지 않아) 의문이 있는 사항을 정리했다”며 “과거 형사판결을 통해 유죄가 인정된 불법 행위에 법적 위험 평가와 발생 원인 분석, 방지 수단 마련 등이 이뤄졌는지”를 확인한다고 목적을 말했다.

▲1980년대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사진=삼성
▲1980년대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사진=삼성

 

지목된 사건은 8개다. 모두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 등 개인 범죄다. 먼저 1996년 함께 법정에 섰던 전두환씨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뇌물 사건 관련이다. 이들은 대기업들로부터 각각 2205억원 및 2628여억원을 비자금으로 받아 뇌물수수가 인정됐다. 이 가운데 고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은 1983~1987년 간 220억원 뇌물을 8회에 걸쳐 전씨에게 줬다. 고 이건희 회장은 1990~1992년 동안 노 전 대통령에게 4번에 걸쳐 총 100억원을 줬다.

총수 일가가 불법으로 부를 증식한 1999년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사건도 있다. 이 부회장과 그의 동생들은 당시 비상장회사였던 삼성SDS의 BW를 7150원으로 샀는데, 2008년 관련 사건을 수사한 특검은 시장 가격을 주당 5만5000원으로 봤다. 특검은 삼성SDS 손해액을 1539억원으로 계산했다. 이 사건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2009년 최종 손해액을 227억원이라고 판단, 이건희 전 회장에게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2008년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비자금 의혹 사건을 수사한 조준웅 특검팀. 이치열 기자 truth710@
▲2008년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비자금 의혹 사건을 수사한 조준웅 특검팀. 이치열 기자 truth710@

 

2000년대 불법 정치 자금 사건 2개도 포함됐다. 하나는 2002년 김대중 전 대통령 차남 김홍업씨 조세포탈 사건 관련이다. 수사 과정에서 김인주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사장이 김씨에게 ‘활동비’ 명목으로 5억원을 준 사실이 밝혀졌다. 삼성은 2008~2011년 동안엔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다스 미국 소송비 등의 명목으로 61억원 뇌물을 건넸다. 대납 사실을 감추려 허위 컨설팅 계약도 맺었다. 이 전 대통령은 뇌물 등 혐의로 2018년 재판에 넘겨져 지난 10월 징역 17년을 최종 선고받았다.

나머지는 근래 기소된 사건 3건이다. ‘재산관리인’으로 불렸던 전용배 삼성벤처투자 대표는 삼성 임원들 명의로 이건희 회장 차명계좌를 만들어 계열사 주식을 보유케 하고, 이와 관련 이 회장이 77여억원 세금을 탈루하는데 관여해 2018년 유죄 선고받았다. 또 최영우 전무 등 삼성물산 임직원 3명은 이건희 회장 소유 한남동 주택공사비 33억원을 삼성물산 자금으로 대납해 2018년 횡령죄로 기소됐다. 이들은 지난 2월 1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등을 선고받고, 지난 8월 형이 확정됐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관련 증거인멸 사건엔 삼성전자 재경팀 이왕익 부사장과 미래전략실 해체 후 신설된 ‘사업지원TF’ 임원들이 다수 관여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계열사 직원들 노트북에서 ‘JY’, ‘합병’, ‘미전실’ 단어를 검색해 삭제를 지시하거나 회사 공용서버를 공장 마룻바닥과 직원 집에 숨긴 혐의다. 이들은 지난해 12월 1심에서 혐의가 인정됐고 2심이 진행 중이다.

재판부는 사건마다 “△법적 위험의 평가와 △발생 원인 분석 및 △방지 수단 마련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밝혀달라”고 삼성 측에 요구했다. 모두 준법 감시 제도의 기본 사항이다. 특히 위험 유형화(법적 위험 평가)는 ‘식별되지 않은 위험은 관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 선행돼야 할 기초다. 2018년 법무부가 한국상장회사협의회와 만든 ‘상장회사 표준준법통제기준’에도 주요하게 명시됐다.

▲2018년 2월5일 항소심에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353일만에 석방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 연합뉴스
▲2018년 2월5일 항소심에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353일만에 석방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 연합뉴스

 

모두 총수 일가 사익 범죄와 관련된 점에서 재판부의 관점도 엿보인다. 삼성 준법감시위원회가 최고 경영진의 위법 행위를 실효적으로 통제하고 있는지에 방점이 찍혔다. 재판부는 준법감시위를 양형 요소에 반영한다면서도 “기업 총수도 무서워 할 정도의 실효적 감시제도가 작동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삼성은 이미 관련 자료가 없다고 한 차례 답했다. 지난 11월 준법감시위를 심리한 전문심리위원 3명이 경영권 승계,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보험업법 개정에 따른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 처분 등의 사안에서 ‘위험을 유형화하고 예방·감시·보고 체계를 마련했는지’를 삼성 측에 물었다. 이들은 "관련 자료가 없다"는 답을 듣고 감시 체계가 미흡하다는 평가를 냈다.

때문에 삼성 측의 답변에 관심이 쏠린다. 법원 요구에 충분히 소명하면 전문심리위원에겐 공개하지 않은 자료를 제출하게 돼 모순이 발생한다. 반대로 충분히 소명하지 않으면 재판부의 준법감시위 평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변호인단은 24일 오전까지 재판부에 관련 입장을 서면으로 제출키로 했다. 재판부는 이 답변을 보고 추가 공판기일을 지정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결심 공판은 오는 30일 오후 2시로 예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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