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미국 대선에서 선거 판세 못지않게 미디어의 대응이 눈길을 끌었다.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를 불문하고 선거 기간 허위정보, 선동, 혐오표현을 막기 위한 적극적인 대응을 보여 한국 미디어에 ‘고민 거리’를 던졌다.

“우리가 크게 이겼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개표가 한창 진행 중이던 4일(현지시간) 올린 글이다. 그는 “지난 밤에는 민주당이 주도하는 주요 주에서 내가 확고한 우위에 있었는데 갑자기 우편 투표용지가 쏟아져  마법처럼 사라졌다. 매우 이상하다”는 내용의 트윗을 올리기도 했다. 이들 트윗은 게시 직후 블라인드 처리됐다. 

미국 대선 기간 내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소셜미디어에서 번번이 제지당했다. 지난 5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는 사흘 동안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올린 게시물 중 38%가 블라인드 처리 등 제재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트위터 계정.
▲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트위터 계정.

블라인드 처리된 게시글은 내용이 보이지 않고 “이 트윗에 공유된 일부 또는 전체 콘텐츠에 대해 이의가 제기되었으며 선거 또는 다른 공적 절차에 참여하는 방법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문구가 뜬다. 이 문구를 클릭하면 게시글이 보이는 식이다. 트위터는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을 비롯해 음모론성 게시글과 영상에 “선거 사기에 관한 이 주장은 논란의 소지가 아주 크다”는 문구를 붙이기도 했다.

문제적 표현 대응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페이스북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섰다. 페이스북은 대선 관련 게시물에 “투표용지 집계는 투표가 종료된 후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계속되기 때문에 초기 투표 집계와 최종 결과는 다를 수 있다”는 공지를 내보냈다. 10일 현재 트럼프 대통령이 올리는 페이스북 게시물에는 “미국 대통령 선거 유력 후보는 조 바이든입니다”라는 문구가 따라 붙는다. 페이스북은 트럼프 지지자 그룹을 폐쇄하기도 했다. 또한 페이스북은 제휴 기관의 팩트체크에 따라 허위로 판명난 게시물에 팩트체크 결과를 알리며 블라인드 처리를 하고 있는데 선거 기간에도 적용됐다.

▲ 팩트체크 결과를 표시한 페이스북 화면.
▲ 팩트체크 결과를 표시한 페이스북 화면.

미국의 유력 방송사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근거 없는 발언을 끊어내곤 했는데 이번 대선에서도 적극적인 판단이 이뤄졌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지난 5일(현지시간) ABC, CBS, NBC, MSNBC는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 도중 ‘부정투표’ 발언이 나오자 중계를 중단했다. CNN과 폭스뉴스는 중계를 중단하지 않았지만 해당 발언이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CNN 앤더슨 쿠퍼 앵커는 “자신의 시간이 끝났지만 그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폭스뉴스는 9일(현지시간) 워싱턴DC 공화당 전국위원회(RNC) 본부에서 열린 매커내니 대변인 기자회견을 생중계했는데 부정투표 주장이 나오자 중계를 중단했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소셜미디어와 기성미디어가 보인 적극적인 대응은 플랫폼의 공적 책무 요구와 따옴표 저널리즘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는 한국 미디어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셜미디어의 공적 책무는 미국 사회에서도 논쟁적인 이슈다. 공화당 일각에선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의 대응을 ‘검열’로 간주하고 있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총기 진압을 암시하는 글을 올리자 트위터는 블라인드 처리한 반면 페이스북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는 트위터를 겨냥해 “플랫폼 사업자가 (이용자의) 판단에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페이스북 갈무리.
▲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페이스북 갈무리.

한국의 플랫폼 사업자들은 정치적인 사안에 개입하지 않는다. 네이버는 뉴스는 물론 블로그나 댓글에서 문제적 발언이 나와도 경고 표시를 붙이거나 자체적인 판단으로 블라인드 처리하는 일은 드물다. 페이스북과 같은 미국 기업이 자국에서는 적극적인 공적 책무를 고민하면서도 한국에는 소극적인 대응을 하는 문제도 있다. 

황용석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트위터의 판단에 대해 논쟁이 필요하다. 선거 기간 여론으로 심판 받는 후보자 발언의 진위 여부를 제3의 플랫폼 사업자가 판정해 대응하는 건 일종의 정치개입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김동원 전국언론노조 정책전문위원은 “5·18 민주화운동 북한군 침투설과 같은 이미 증명된 사실에 대한 보도나 언급에는 경고 표시를 하는 식으로 국내 플랫폼 사업자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며 “한국은 플랫폼 사업자들이 약관을 통해 관련 내용을 적시하고 있긴 하지만 직접 판단하지 않고 외부 단체나 기관에 판단을 구하는 식으로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 생중계를 중단한 방송사들은 따옴표 저널리즘이 일상화된 한국 언론과 비교된다. 지난 대선 때 국민의당은 투표를 나흘 앞두고 문재인 후보자 아들 취업 청탁 정황을 담은 동료 증언을 확보했다며 녹취 파일을 공개해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했으나 당원이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2012년 대선 때 ‘NLL포기발언’의 진위를 검증하지 못한 채 받아쓰기 보도가 이어지기도 했다.

유선희 한겨레 문화팀장은 9일 ‘한겨레 프리즘’ 칼럼을 통해 “이러한 미국 언론을 접하니 ‘받아쓰기 저널리즘’, ‘따옴표 저널리즘’이란 비난을 받는 우리 언론의 행태를 곱씹게 된다”며 “이제는 한국 언론이 인용 보도를 위한 따옴표 대신 사실 확인을 위한 물음표를 찍어야 할 때”라고 했다. 

이와 관련 한 방송사 기자는 “민경욱 의원의 개표부정 기자회견이나 지만원 기자회견에 기자 다수가 참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사한 문제에 대한 대응은 이미 이뤄지고 있지만 선거 기간 한국 방송은 기계적 균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후보자에 대해 이런 조치가 내려지긴 힘들 것 같다.  이렇게 방송 내보내면 정치권에서도 논란이 되고 심의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 지난 6일 서울역에서 미국 대선 결과를 지켜보는 시민들. ⓒ 연합뉴스
▲ 지난 6일 서울역에서 미국 대선 결과를 지켜보는 시민들. ⓒ 연합뉴스

미국 미디어의 적극적인 대응 이면에는 미국에서 활성화된 ‘팩트체크’가 자리잡고 있다는 점도 곱씹어볼 대목이다. 정은령 SNU팩트체크센터장은 “방송사들의 중계 중단은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게 아니라 미국 주류 저널리즘에서 팩트체크를 해온 누적된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고 했다. 

정은령 센터장은 “팩트체크를 통해 진위여부에 대한 판정을 할 수 있었고, 맥락을 보여주기 위한 고민도 많이 해왔다. 또한 잘못된 정보가 나오면 빠르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고민이 있었기에 실시간 팩트체크 실험이 등장하기도 했고, 이번처럼 즉각적인 판단도 이뤄질 수 있었다고 본다”고 했다.  

황용석 교수는 “미국에서는 언론사 뿐 아니라 다양한 민간 영역에서 팩트체크가 활성화돼 유용한 정보 제공이 이뤄지고 있다. 사실확인 정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유권자에게 검증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한국에서도 ‘민간 영역’의 적극적인 팩트체크가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국과 미국의 제도적 차이를 고려할 필요도 있다. 황용석 교수는 “미국은 공직선거법이 따로 없고 언론이 후보자 지지를 포함한 정치적 의견 표명을 할 수 있는 맥락 속에서 이 같은 판단이 나온다는 점을 살펴야 한다”며 “반면 한국에는 공직선거법상 선거 관련 심의 제도가 막강하다. 미국에서 팩트체크가 주목 받은 경향도 이 같은 차이에서 기인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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