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990년대 당시 정치부 기자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김 전 대통령의 권유로 2000년 총선에 전남 함평·영광·장성 지역구에 출마해 정치권에 입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초선의원이던 이 대표는 2001~2002년 두 차례 새천년민주당 대변인을 지냈다. DJ의 입이라고 불릴만한 이력이다. 

2002년 7월10일 이낙연 대변인은 DJ의 차남 김홍업씨(현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가 구속기소되자 논평을 냈다. 그는 “대통령 아들이 잘못된 처신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법을 어겨 또다시 구속기소된 것을 매우 개탄스럽고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우선 본인과 주변 인사들이 통렬하게 반성하고 법에 따라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며 또 그렇게 되리라 본다”고 했다. 

이낙연 대변인의 논평은 ‘불미스러운 사건이 벌어져 유감이다’ 정도의 모호한 입장이 아니었다. ‘반성’과 ‘응분의 처벌’을 언급했다. 호남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가졌던 DJ의 위상, 자신과 DJ의 관계 등을 고려하면 하기 어려웠을 발언이다. 이는 당시 보수야당과 언론 비판에 대한 대답이면서 여권 스스로에 대한 반성을 담은 언어였다. 

최근 정치권에서 나오는 거대양당 대변인의 논평·브리핑 등을 보면 18년 전 이낙연 당시 대변인이 보였던 무게나 책임을 담은 메시지인지 의문이다. 

▲ 지난 9월7일 국회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는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사진=민주당
▲ 지난 9월7일 국회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는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사진=민주당

 

지난달 13일 박진영 민주당 상근부대변인의 “진중권씨는 삼국지의 ‘예형’의 길을 가고자 하십니까?”라는 논평은 현재 여당의 논평이 얼마나 당의 공식입장이라고 하기에 부족한지 보여줬다. “광기에 이르렀다”는 식의 표현이 적절한지 여부를 떠나, 당내에서도 거대여당이 한 개인에 대해 비판 논평까지 내는 게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이는 최근 민주당이 공식논평에서 반대파 저격에만 치중하던 가운데 벌어진 일이었다. 

지난 2일 민주당 대변인단이 내놓은 논평·브리핑은 총 7건이었다. ‘대학내 실험실 사고 근절(조은주 청년대변인)’을 제외하면 모두 진영논리에 기반한 정치 공세적 내용이다. 

최인호 수석대변인 “전당원 투표에서 보여준 뜻에 감사드리며, 내일 당헌개정을 완료하겠습니다”는 브리핑은 투표율 26%로 나타난 당원투표를 두고 “당원들의 높은 참여”라며 “이낙연 대표와 지도부 결단에 대하 전폭적지지”라고 자화자찬했다.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 공천 비판이나 성추행 피해자에 대한 입장, 원칙을 무너뜨린 것에 대한 사과나 당헌개정의 불가피한 내막 등은 생략했다.

나머지는 모두 이명박 수감 등 야권에 대한 공격이었다. 신영대 대변인의 “국민의힘은 두 전직 대통령과 함께 대한민국에 저지른 과오에 대해 사죄해야 합니다(신영대 대변인)를 비롯해 최인호 수석대변인, 박진영 상근부대변인 등이 비슷한 입장을 내놨다. 

이미 지난달 29일 신영대 대변인 논평과 함께 당 지도부나 언론에서도 전직 대통령 구속에 대한 국민의힘의 사과를 요구했다. 결국 2015년 만든 당헌을 스스로 허무는 것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자 대변인들이 나서 야권 공세로 화력을 집중하는 모양새다. 이러한 행태는 야당도 다르지 않다.

▲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가운데). 사진=국민의힘
▲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가운데). 사진=국민의힘

 

국민의힘은 공식논평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 관련 논평을 한번 냈다. 배준영 국민의힘 대변인이 지난달 29일 “국민이 선출한 국가원수이자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형사처벌을 받는 것은 우리나라에도 불행한 역사”라며 느닷없이 “대통령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준 헌법 체계에서 싹트지 않았는지 깊이 성찰하고 대안을 마련할 때”라고 대통령제의 한계를 말했다. 

이후 국민의힘 대변인단은 민주당의 당헌개정 이슈에 집중했다. 민주당 지도부에 대한 비판과 당헌을 만들 당시 대표였던 문 대통령에게 입장을 묻는 내용이다. 이날 황규환 부대변인, 다음날인 지난달 30일 윤희석 대변인과 허청회 부대변인이 각각 논평을 냈고, 주말 사이 김예령 대변인이 관련 논평 3건을 냈다. 지난 2일 배준영 대변인과 김예령 대변인, 3일 김은혜 대변인도 관련 논평을 추가했다. 

대변인뿐 아니라 최근 국민의힘 여성가족위원회 위원들, 서울시당 여성위원회, 성폭력특위 등에서 관련 기자회견과 성명을 쏟아내고 있다. 

양당의 현재 태도처럼 남의 허물은 들춰내면서 내 치부만 인정하지 않을 순 없다. 정치권에선 발언의 논리성도 중요하지만 누가 발언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성찰 없는 정치인 주장에는 힘이 실리지 않기 마련이다. 양당이 연일 동어반복하는 이유다. 

▲ 지난 9월1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예방하는 모습. 사진=민주당
▲ 지난 9월1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예방하는 모습. 사진=민주당

 

이러한 모습은 청와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민의힘에서 당헌개정 관련 수차례 문 대통령의 입장을 물었지만 청와대 관계자는 “공천은 당에서 결정할 사안”이라며 “언급할 이유가 없다”고 답변을 하지 않았다.

지난달 22일 윤석열 검찰총장이 대검 국정감사에 출석해 ‘대통령이 적절한 메신저를 통해 자신에게 임기를 지킬 것을 주문했다’고 말했다. 윤 총장과 추미애 법무장관과 갈등의 피로감이 높은 가운데 인사권자의 결단이나 최소한의 사실관계 확인 요구가 거세졌다. 

닷새 뒤인 지난달 27일 청와대 관계자는 기자들에게 “메신저를 보냈는지 여부에 대해 제가 정보가 없다”고 답했다. 문 대통령의 입장도 아닌 청와대 관계자 자신이 대통령에게 들은 내용이 없다는 다소 무책임한 답변이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지난 7월과 지난달 대통령의 국회 방문을 앞두고 각각 10가지 질문을 문 대통령에게 보냈지만 대통령은 관련 답을 주지 않고 있다. 지난 7월 청와대 관계자는 “야당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말씀으로 답변을 갈음하겠다”고만 답했다. 

청와대 입장에서 각각 조심스러운 사안이라 말을 아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수개월간 이어진 촛불집회 끝에 당선된 문 대통령은 2017년 5월 취임선서와 함께 “주요 사안은 대통령이 직접 언론에 브리핑하고 시민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겠다”고 약속했고, 야4당을 찾아 “5년 내내 야당과 소통하는 자세로 타협과 협력을 하며 국정에 임하겠다”고 했다. 3년반 사이 온도차가 너무 커졌다. 

▲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1월10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질문하기 위해 손을 든 기자 중에서 질문자를 지명하고 있다. ⓒ 연합뉴스
▲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1월10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질문하기 위해 손을 든 기자 중에서 질문자를 지명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일부 언론에선 문 대통령이 취임후 5번째 국회 시정연설이라며 1987년 개헌 이후 최단기간에 최다 시정연설 기록이라고 보도했지만 국회 시정연설은 일방적인 메시지 전달이다. 따라서 대통령의 연설 횟수보다는 대통령을 향한 질문에 대한 답변내용과 태도가 더 중요하다. 현재까지 대통령의 직접 브리핑은 6번에 불과했다. 

이낙연 대표가 선출되자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과 과거 인연을 다루며 언론은 ‘협치’를 주문했지만 여전히 각 당은 각자의 이야기를 며칠째 반복하고 있다. 청와대와 여야가 소통하겠다고 스스로 만든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는 2년째 방치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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