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가 2020년 4월1일 100주년을 맞았다. 김재호 동아일보 사장은 1면에 “고맙고 감사합니다”라는 제목으로 “100년 동안 신문을 만들었다. 하루하루 펼쳐지는 현실과 성실하게 마주하면서 차곡차곡 쌓아올린 시간이 100년이 됐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따뜻하게 등을 두드려주던 독자 여러분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썼다.

김재호 사장은 “동아일보는 대형 창간 행사 대신 아낀 비용을 장애를 안고 있는 청년들이 좋은 일자리를 통해 자립하는 데 쓰이도록 전달했다”고 밝혔다. 김 사장은 “중심을 잃지 않고 ‘우리 아이들이 보다 나은 세상에서 살게 하는 것’, 그것이 동아일보가 꾸는 꿈”이라고 썼다.

▲서울 중구 정동에 위치한 동아일보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서울 중구 정동에 위치한 동아일보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1일자 동아일보 1면 기사.
▲1일자 동아일보 1면 기사.

동아일보는 장문의 사설을 2면에 배치했다. 제목은 “100년 전 청년의 꿈으로 다시 ‘젊은 100년’ 열어가겠습니다”다. 이 사설에서 창간부터 지금까지 역사를 정리하고 앞으로 가장 오랜 신문 아닌 가장 새로운 신문으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했다.

사설은 1920년 일제 강점기 창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아일보는 “동아일보는 100년 전 오늘, 나라 잃은 민족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하며 창간됐다. 망국의 황량한 터에서 태어나 광복, 분단, 전쟁, 가난과의 싸움, 독재와의 투쟁을 겪었다”고 썼다. 그러면서 “100년 전 8개 면으로 만들어진 동아일보 창간호를 손에 쥔 ‘서울의 시민들 가운데는 거리를 뛰어다니며 ‘동아일보 만세’를 외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고 했다.

▲1일자 동아일보 2면 기사.
▲1일자 동아일보 2면 기사.

동아일보는 광복 이후 탄압을 받은 사건을 나열했다. 동아일보는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 때 시민들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 실상을 앞장서 보도하는 동아일보 기자와 취재 차량이 가는 곳마다 정권의 탄압으로 광고 해약 사태를 겪었을 때는 텅 빈 광고 지면을 독자들이 채워 줬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보도를 주도해 6월 민주항쟁의 물꼬를 틀 수 있었던 것도 국민의 민주화 열망 덕분”이라고 했다.

동아일보의 창립자이자 발기인 대표였던 ‘청년 인촌 김성수’를 조명했다. 동아일보는 “김성수는 당시 29세였다. 인촌과 함께한 창간의 주역들 모두 신학문을 배운 청년들이었다. 국권을 빼앗긴 일제 암흑기였지만 청년들은 민족독립과 민주주의에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며 “그 꿈은 ‘민중의 표현기관’ ‘민주주의 지지’ ‘문화주의 제창’이라는 3대 사시로 압축됐다”고 썼다.

국내 최초의 여성 스포츠 행사를 동아일보가 열었다고도 강조했다. 동아일보는 “봉건적 남녀차별이 횡행하고 남녀유별이 강조되던 1923년, 동아일보는 국내 최초의 여성 스포츠 행사인 ‘전조선여자연식정구대회’를 열었다. 남들보다 수십 년을 앞서 ‘문화주의’라는 꿈을 꾸지 않았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며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휩쓸고 방탄소년단이 세계 청소년을 매혹시키고 있다는 소식과 동아일보의 역사를 엮었다.

역사 기술 이후 동아일보는 ‘팩트’를 강조했다. 동아일보는 “지금 언론이 위기라지만 그럴수록 언론의 역할이 중요한 시대다. 가짜뉴스의 범람은 누구나 쉽게 뉴스의 발신자가 될 수 있는 인터넷 시대의 어두운 면이다. 하지만 가짜뉴스나 풍문, 궤변은 결코 팩트(사실)을 이길 수 없다. 단단한 팩트를 찾고 알리기 위해 부지런히 뛰겠다”고 다짐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동아일보의 아픈 역사도 나열했다. 동아일보는 “창간 2주 만에 첫 발매 금지를 당한 후 1940년 8월 강제 폐간되기까지 무려 63회의 발매 금지, 489회의 압수, 2400여 회의 기사 삭제, 4회의 정간을 겪었다. 마지막 정간은 9개월여간 이어졌는데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웠다는 이유였다”고 쓴 뒤 “광복 이후엔 권력에 눌려 목소리를 내지 못한 시민의 대변자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동아일보가 권력에 저항했던 과거만 갖고 있었던 건 아니다. 친일, 친독재 기사를 써낸 구체적 사실들에 대한 통렬한 ‘반성’은 찾아볼 수 없다.

▲1일자 미디어오늘 4면 기사.
▲1일자 미디어오늘 4면 기사.

미디어오늘은 동아일보 100주년을 맞아 50가지 장면을 꼽았다.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동아일보는 중국을 비방하면서 일제 승리를 위해 조선민족도 임무와 성의를 다해야 한다고 보도했다. 1938년 1월1일 1면 일왕 사진을 실었고, 이런 보도는 1940년까지 지속됐다.

1937년 7월 중일 전쟁 후 창립자인 김성수의 친일 행각이 시작됐다. 1943년부터는 노골적이었다. 보성전문학교 교장 자격으로 1943년 8월5일 징병제를 찬양하는 논설을 ‘매일신보’에 기고했다. 징병제와 학병제를 독려했다. 제주 4·3항쟁을 ‘폭동’으로 보도했다. 1989년 3월16일 서울지하철노조 파업을 비판했다. 1991년 8월 동아일보 사장 김병관은 편집국장 김중배를 경질했다.

‘팩트’를 강조했지만, 오보도 많았다. 신동아는 2009년 2월호에서 정부 비판 누리꾼으로 유명했던 미네르바 단독인터뷰를 내보냈다. 그러나 실제 미네르바가 아니었다. 동아일보는 2013년 1월22일 1면에 “간첩 정체는 탈북자 행세한 화교였다” 기사는 오보였다. ‘유우성 간천 조작’ 사건이었는데, 보수정권과 이를 뒷받침하는 언론에 의해 간첩으로 몰린 유씨는 국정원 간첩 조작 피해자였다.

동아일보는 잘못된 지난 역사에 대해 ‘광기의 일본’을 이유로 들며 ‘사과’했다. 동아일보는 “하지만 일본 군국주의의 광기가 극에 달했던 일제 말 강제폐간을 앞둔 시기, 조선총독부의 집요한 압박으로 저들의 요구가 반영된 지면이 제작된 것은 100년 동아일보의 아픔이다. 정중히 사과드린다”고 썼다.

한편, 동아미디어그룹 종합편성채널 채널A 소속 기자의 부적절한 취재 행위가 도마에 오르면서 동아일보 100주년이 빛이 바랜 모습이다.

▲ 지난 3월31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 갈무리
▲ 지난 3월31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 갈무리

MBC는 채널A 법조 기자가 바이오업체 신라젠의 전 대주주인 이철 밸류인베스트먼트코리아 전 대표 측 대리인을 만나 여권 인사의 비리 연관 가능성을 캐물으면서 압박성 발언을 했다고 31일 보도했다. 가족까지 거론하며 검찰 수사를 받을 수 있다고 하고 심지어 검찰과의 신뢰 관계를 들어 선처까지 받을 수 있다고 회유하는 녹취가 고스란히 방송됐다. 이번 사건은 저널리즘 윤리 문제는 물론 검찰과의 유착 의혹으로까지 번질 수 있어 매체의 신뢰도에 치명타를 줄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채널A는 “이철 전 대표 측이 검찰에 선처 약속을 받아달라는 부적절한 요청을 해온 사실을 파악한 뒤 기자에게 취재 중단을 지시했고,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인 적은 없지만 취재원 대응 방식에 문제가 있었는지 진상조사 중”이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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