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산의 부장들’ 원작은 같은 이름의 논픽션 연재물이다. 지금은 가천대 부총장인 김충식 동아일보 기자가 1990년 8월부터 매주 신문에 연재한 결과물이 1992년 출간된 ‘남산의 부장들’이다. 박정희 정권 중앙정보부의 속살을 파헤친 이 논픽션은 10명의 정보부장들의 암투와 음모, 최고 권력에 대한 ‘충성’과 ‘애국’을 인물·사건 중심의 팩트로 채웠다.

22일 개봉하는 영화는 이병헌, 곽도원, 이성민 등 당대 최고 배우들이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지만 10·26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조명했는지 이목이 집중된다. 4번째 정보부장인 김형욱(곽도원 분)과 박정희(이성민 분) 정권의 갈등과 폭로, 8번째 정보부장 김재규(이병헌 분)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이희준 분)의 충성 경쟁과 폭주하는 권력, 김재규의 배신과 박정희 최후 등 영화에 담긴 팩트는 음울한 ‘남산의 역사’에 기반한 것들이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 관훈클럽 사무실에서 만난 김 부총장은 “동아일보 연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과 같았다”며 “청와대 출입 기자로 대통령 해외순방을 챙기면서도 연재를 마감하고 원고를 팩스로 보내던 그 시절은 매 순간이 나와의 싸움이었다”고 술회했다.

김 부총장은 이른바 ‘태극기’와 ‘촛불’로 양분된 현재 광장 정치에 “태극기 세력들은 여전히 박정희와 박정희 정신을 신봉하고 있다. 한편으로 재야의 민주화 세력이 박정희 정보부 지하에서 창자가 터지고 뼈가 부러지면서도 저항하고 헌신했던 시대, 그 시대정신 위에 촛불이 있다”고 진단한 뒤 “우리 시대는 여전히 박정희 그림자에 갇혀 있다”면서 ‘남산의 시대’를 제대로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남산의 부장들은 자동차에 비유하면 백미러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뒤를 제대로 돌아봐야 한다. 제대로 보지 못하면 사고가 난다”며 이번 영화 의미를 강조했다.

▲ 지난 15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 관훈클럽 사무실에서 만난 김충식 가천대 부총장은 ‘남산의 부장들’ 연재 당시에 대해 “동아일보 연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과 같았다”고 술회했다. 사진=김도연 기자.
▲ 지난 15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 관훈클럽 사무실에서 만난 김충식 가천대 부총장은 ‘남산의 부장들’ 연재 당시에 대해 “동아일보 연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과 같았다”고 술회했다. 사진=김도연 기자.

- ‘남산의 부장들’이 같은 이름의 영화로 개봉을 앞두고 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남산의 부장들은 1990년 8월부터 2년2개월 연재한 기획 보도였다. 당시 출간이나 영화화는 눈곱만큼도 생각지 않았다. 지난 1월9일 스태프 시사회가 있었다. 원작이 삼촌이면 영화는 그 조카랄까.(웃음) 다큐멘터리가 예능 영역에 들어서면 왜곡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영화화를 허락한 만큼 내가 감내해야 할 부분이다. 관객들도 영화를 하나의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로 바라볼 뿐 신문 읽듯 하지 않으리라는 기대도 있다. 두 시간 몰입을 위해선 생략, 비약, 압축, 가공이 있을 수밖에 없다.”

- 영화를 연출한 우민호 감독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두 사람 첫 만남은 언제였나?

“2016년 초로 기억한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전이다. 우 감독이 원작을 읽고 영화를 찍겠다고 찾아왔다. 우 감독이 말하길 자신이 중앙대 영화과 복학생 시절 원작을 읽고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이 책으로 언젠가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다짐했다는데 권력 비호 아래 KCIA(중앙정보부)가 자행한 도청, 납치, 미행, 암살, 밀수 등을 누아르 영화 소재로 본 것 같다. ‘충분히 영화 대부(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1972년 만든 영화) 이상으로 그릴 수 있지 않을까’라며 가슴이 뛰었다고 하더라. 나도 지인들이 영화 ‘내부자들’을 꼭 보라고 권유해 우 감독 존재를 알고 있었다. 영화 내부자들을 보면 오른팔 잃은 언론사 주필이 ‘까짓것 왼손으로 쓰면 된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언론 출신이 아닌 사람이 그런 장면을 연출한 실력에 감탄했다. 내부자들이 성공해 자신감을 갖고 원작을 다루고 싶다고 나를 찾아왔다.”

- 원작자로서 특별히 주문했던 것이 있나?

“시나리오를 봤을 때 차지철(배우 이희준 분)이 단순한 권력 지향 불나비처럼 묘사돼 있었다. 차지철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는 걸 강조하면 훨씬 더 중층적이고, 작품이 더 진중해지지 않겠냐고 이야기를 전했다. 또 유튜브를 보면 김재규의 노래라고 ‘사나이 결심’이라는 노래를 들을 수 있는데 그 노래 가사 가운데 ‘사나이 가는 길 앞에 웃음만이 있을 소냐’라는 대목이 있다. 대사여도 좋겠다 싶어 의견을 전했는데 김재규가 박정희를 총으로 쏘기직전에 등장하더라.”

- 영화의 핵심 인물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다. 배우 이병헌씨가 김재규 역을 맡았다. 따로 조언한 것이 있었나?

“이병헌씨가 ‘김재규는 어떤 사람이냐’고 물은 적 있다. 주변에서 ‘김재규라는 인물은 경솔하게 다루면 안 된다’, ‘김재규는 제대로 영화화한 적 없는데 병헌이 네가 첫 길을 제대로 열어야 한다’ 등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 부담을 느꼈던 것 같다.”

▲ 22일 개봉하는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컷 사진. 사진=남산의부장들.
▲ 22일 개봉하는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컷 사진. 사진=남산의부장들.

- 김재규는 여전히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10·26 당시 그가 처해 있던 상황은 어땠나?

“당시 판결문을 보면 10·26을 ‘계획적이라 보기에는 우발적이고 우발적이라 보기에는 너무 계획적’이라는 취지로 설명한다. 김재규는 법정 최후 진술 등을 통해 10·26을 전적으로 계획된 것이라며 자기 합리화하는 면을 보이지만 계획적이라기엔 후속 상황 준비가 미비했고 허술했다.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알력다툼, ‘박정희는 더 이상 안 된다’는 미국 조야 여론, 부마사태 같은 민심 이반, 78년 12월 총선에서 야당 신민당에 뒤처진 여당 공화당 득표율 등도 10·26 배경이다. 박정희는 국민을 책임질 사람이 나 말고는 보이지 않는다는 신념에 가득 찬 상태였다. 18년 사이 ‘권력 꼰대’가 돼 버렸다. 반면 국민들은 ‘유신 체제는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로 민주주의 의식이 성장해 있었다. 10·26은 예고된 빅뱅이었다. 김재규가 빅뱅의 트리거를 당긴 것이다.”

- 박정희는 김재규를 두텁게 신뢰하지 않았나? 상당히 아꼈다고 들었다.

“박정희가 김재규를 얼마나 총애했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1975년 김재규가 건설부장관 때 일화다. 당시 한 청와대 기자가 전한 이야기를 보면, 내무부장관 아무개가 건너편에 있는 박통(박정희)에게 술을 따르지 않고, 테이블을 빙 둘러 바로 옆으로 가서 술을 따랐다. 기자들도 있던 자리였다. 그런데도 박통이 ‘이 사람아 건너편에서 따르면 되지 왜 여기까지 와서 과잉 충성하느냐’고 화를 내고는 그 잔을 바로 옆자리 김재규에게 줬다고 한다. 그런 행동은 ‘김재규는 너희들 급이 아니다. 내가 모시는 장관’이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정보부장으로 박정희에게 열심히 충성하다가 결국 총으로 쏜 것이다.”

- 김형욱 암살 사건도 영화에서 다뤄진다. 2005년 국정원이 공식 조사·발표한 사건이다.

“박정희와 갈등으로 한국을 떠난 김형욱 입장에서 박정희에 악화한 미국 여론, 야당 정치인 김영삼·김대중에 의한 국내 민심 이반 등은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1977년 그는 미국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 증인으로 나서 박정희 정권에 폭격을 가했다.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문제 해결을 지시하고 김재규는 이를 수행하고자 한다. 차지철도 공을 세우기 위해 김형욱 제거를 별도로 음모했다는 설도 있다. 영화는 이를 보다 극화해 두 사람이 김형욱 제거 작전을 경쟁하는 것으로 나온다. 2005년 국정원 과거사진실위는 김재규 (지시에 따라) 부하들이 김형욱을 죽였다고 발표했다. 김형욱을 사살한 뒤 시체를 낙엽 속에 파묻었다고 공식 발표했는데 실은 권총 사살 후 파리 근교 양계장 분쇄기에 집어넣었다는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는 내용이다. 정부가 이와 같은 양계장 암살 공작을 공식 인정하면 프랑스와 외교 분쟁이 불거질 것을 우려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 원작 ‘남산의 부장들’은 김충식 가천대 부총장이 동아일보 기자 시절 연재한 취재물이다. 출판사=폴리티쿠스
▲ 원작 ‘남산의 부장들’은 김충식 가천대 부총장이 동아일보 기자 시절 연재한 취재물이다. 출판사=폴리티쿠스

- 민주화 이후지만 1990년 KCIA 민낯을 연재하는 일은 어려웠을 것 같다.

“1990년은 ‘보통사람들의 시대’라는 노태우 정권 2~3년차였다. 1963년 정승화 방첩대장이 조사·작성해 중앙정보부에 보낸 육사 11기 소령 대위들의 ‘7·6거사’ 수사기록을 입수해 보도하자 ‘죽인다 살린다’ 아주 난리가 났다. 자료와 취재는 노태우·전두환 등을 포함한 훗날 ‘5공 세력’들이 김종필(JP)계 인사들을 제거하려는 ‘친위 쿠데타’를 시도한 내용이다. 이걸 기사로 쓰니까 국가원수 모독이다, 군 수사 기록 유출이다, 정권의 반발이 매우 컸다. 또 1961년 민주당 정권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장도영이 5·16 쿠데타 이후 반혁명죄로 갇히게 되는데 장도영을 호송하던 게 당시 방첩대 소속 노태우 대위였다. 1961년 국방부가 공표한 사진을 다들 노태우인지 모르다가 내가 1992년 보도했다. 널브러진 사료를 호미질로 파낸 기록이자 박정희 사후 전두환·노태우 시대를 예고케 하는 사료들이다. 이런 보도 후 ‘죽이네 마네’ 압박이 거셌다. 당시 청와대의 어떤 수석이 ‘일을 더 키울 수 있다’며 보도 논란을 수습했다.”

- 원작을 보면 취재와 기록의 방대함에 놀라게 된다.

“20~30%는 이미 노출돼 있는 자료에 근거했다. 1945~1984년을 기록한 한국정치연표를 참고했다. 이 사료에 줄을 쳐가며 중정의 사건 개입 혐의를 찾았다. 숨어있는 70%를 찾는 데 집중했다. 이를 테면 김종필 초대 중정부장이 박정희와 김대중이 대결을 펼친 1971년 대선에얼마를 썼는지는 그가 술자리에서 흘린 발언(“국가 예산의 텐 프로를 썼다”)을 취재해 보도한 것이다. 이런 발언들은 정치학 논문에 인용되는 등 가치 있는 사료로 남았다. 결국 내 취재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는 강박의 소산이었다. 기자 업무와 또 취재 대상인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를 테면 김계원 정보부장이 날 안 만나겠다는 걸, 일요일 밤 10시 눈 덮인 거리로 차를 몰고 나가 만나는 등 취재 완성도를 높이고자 했다. 그 사람이 살아있는데 만나지 않고 먼발치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자신에 대한 모독이었다.”

- 저널리즘 차원에서 의미가 있는 저작이다. 전두환 정권의 보도 지침을 폭로한 한국일보 출신 김주언 전 KBS 이사는 “일역판을 포함해 52만부가 팔린 이 책은 한국 언론사에 길이 남을 대표적 저작물”이라고 평했다.

“역사학자였던 천관우 동아일보 주필은 사학도라면 모름지기 개설서의 한 페이지, 한 구절이라도 고치거나 보태야 한다고 말한 적 있다. 기자도 새겨야 할 말이다. 집게를 들고 팩트를 줍는 기자들은 많다. 그러나 호미를 들고 팩트를 캐내는 기자들은 드물다. 출입처를 다니면서 집게로 집어드는 것만 해서는 저널리스트라고 하기 어렵다. 시궁창에 처박힌 기록들을 햇볕 앞에 내놓고 역사 사료로 만들 수 있는 사실 확인과 취재가 저널리스트에게 요구된다.”

▲ 김충식 가천대 부총장이 지난 15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 관훈클럽 사무실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기록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모습. 사진=김도연 기자.
▲ 김충식 가천대 부총장이 지난 15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 관훈클럽 사무실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기록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모습. 사진=김도연 기자.

- 눈길이 한 번 더 가는 정보부장이 있는가?

“취재원 그 누구도 혐오하거나 애착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이후락 부장을 혐오하지만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박정희를 도와 여러 꾀를 내고, 행정과 정치 전반에서 왕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행위에 당연 그림자가 따라다니지만 긍정적 성과가 1도 없진 않다. 저잣거리에서 어떻게 평가하든 나는 기자 관점에서 이후락을 다루고자 했다. 다만 인간적 매력이 있는 사람은 김종필이었다. 중정의 초창기 1년여 동안 초대 정보부장을 맡고는 ‘목수는 자기가 살기 위해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며 떠난 인물이다. 이후 중정은 김형욱, 이후락에 의해 폭행, 납치, 미행, 고문, 암살 조직으로 위상을 굳혀 갔다.”

- 원작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태민 목사 관계도 언급돼 있다. 저자 입장에서 2016년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을 바라보는 느낌이 남달랐을 것 같다.

“2016년 ‘최순실’ 이름을 들었을 때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남산의 부장들을 취재하는 과정에 최태민을 아는 그 어떤 사람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전직 중정부장이었던 김계원씨도 그를 ‘기독교 종단 어디에도 등록된 바 없는 사이비 목사’라고 평했다. 최태민을 두고 제정러시아를 망친 파계승 라스푸친이나 고려 말 승려 신돈 등에 비유하기도 했다. 2010년경 여의도 한나라당 총재실에 최순실 남편이 비서실장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소름 끼쳤다. 박근혜라는 사람이 두문불출하는 동안 최순실 테두리 안에 갇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에 나서기 전까지 자폐적 생활이 길어지는 동안 최순실 일가가 그를 뒷바라지해줬던 것이다. 최순실 손바닥 위에서 나라가 놀아났고 우리는 대통령을 다시 뽑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 김재규는 최태민을 경계했다. 박정희에게 여러 차례 최태민 비위를 보고했지만 박정희는 묵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재규는 박근혜를 업은 최태민이 벌이는 각종 비위와 비리로 민심이 나빠질대로 나빠졌다고 봤다. ‘최태민은 결코 박정희 정권에 이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박근혜가 최태민을 옹호하는 행태로 인해 김재규에게 또 다른 응어리와 환멸이 쌓인 것이다. 영화에 최태민은 등장하지 않지만 10·26의 여러 요인으로 최태민과 박근혜 관계를 꼽을 수 있다.”

- ‘남산의 부장들’이 영화화하는 시대적 맥락도 있을 것이다. 왜 다시 ‘남산’을 주목할까?

“지금 국민들은 태극기와 촛불로 나뉘었다. 마음속에 태극기를 신봉하거나 촛불을 태우는 사람들로 갈라져 있다. 과연 태극기 세력들은 박근혜를 신봉하는 것일까. 정확히 말해 박정희와 ‘박정희 정신’을 신봉하는 거다. 최순실 치맛자락에 휘둘려 실패한 박근혜에게 연민과 동정을 가질지언정 ‘박근혜 정신’은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재야의 민주화 세력이 박정희 정보부 지하에서 창자가 터지고 뼈가 부러지면서도 저항하고 헌신했던 시대, 그 시대 정신 위에 촛불이 있다. 결국 우리는 여전히 박정희 그림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는 이걸 털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만약 박정희 공과(功過)가 7대 3이라면 태극기를 든 사람들은 70을 100이라 우겨선 안 된다. 과(過) 30을 겸허하게 바라봐야 한다. 반대로 과를 강조하는 세력도 공(功) 70이라는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남산의 부장들을 자동차에 비유하면 백미러 역할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뒤를 보는 것이다. 뒤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사고가 난다.”

▲ 김충식 가천대 부총장이 지난 15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 관훈클럽 사무실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김충식 가천대 부총장이 지난 15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 관훈클럽 사무실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다시 기자 시절로 돌아간다면 민주화 이후 사건 중 기록하고 싶은 일이 있나?

“개혁과 진보를 표방하는 세력들이 저지른 과오와 실책은 전 시대의 박정희에 비하면 극적이지 않다. 별로 쓸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관심 갖는 인물은 있다. 갑신정변의 김옥균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두 사람은 개혁이라는 유사한 꿈을 갖고 있었다. 하층민이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바랐고 외세에 흔들리는 나라를 어떻게 바로세울 것인가 고민했다. 개혁운동(갑신정변)은 3일 만에 끝이 났고 김옥균은 암살됐다. 노무현은 세간의 비아냥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책 부제는 ‘개혁은 왜 조롱당하는가’로 정하고 싶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지 않나. 김옥균 평전을 써보고 싶다.”

-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애정을 갖고 있나?

“정치인으로서 품격이나 화법 모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무현 정신’은 분명 있었다. 한국사회 비주류로서 정의에 열망이 있던 사람이다. 현실에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도자로서 고뇌하고 스스로를 던질 줄 알았다. 노무현 정신으로 김옥균 시대를 재해석하는 논픽션을 고민 중이다. 자료는 다 모았는데 집필할 시간이 없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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