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미애 법무부장관 후보자에겐 “조국 전 장관 보다 센 사람”(박지원 의원), “추고집”, “추다르크” 등의 평가가 따라다닌다. 

추 후보자에게 왜 이런 이미지가 붙어있을까. 추 후보자가 지난 2013년 12월 쓴 자서전 ‘물러서진 않는 진심’(위애드)에는 왜 자신이 그런 평가를 받는지 엿볼 사례들을 소개했다.

그는 1999년 12월16일 국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통과된 제주 4·3특별법을 대표발의하고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현대사를 보는 역사관이 분명해졌다. 추 후보자는 제주 4·3의 비극을 알았을 때 “모르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고 썼다. 그는 “인권 잔혹사를 풀어내는데 가장 큰 적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라며 “무관심이 가장 큰 적이었고 다음은 좌우 이념의 문제로 매사를 버무려 묻어버리려는 집단적 무지가 걸림돌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자신이 제주 4·3을 위해 했던 일은 바로 우리 사회의 무관심을 깨뜨리고 집단적 무지를 넘어서는 일이었다며 당시 한나라당은 만장일치로 법안을 통과시켜놓고도 이듬해 4월 헌법소원을 낸 점을 지적했다.

추 후보자는 우리 현대사가 ‘힘이 있는 자의 논리로 왜곡돼 있었다’며 “정의는 언젠가는 그 모습을 드러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추 후보자는 제주 4·3특별법이 통과되던 날, 4·3 학살 당시 명령을 거부하고 해임당한 김익렬 연대장이 “역사의 도적이 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소개했다.

‘추고집’의 또 다른 사례는 국회 환경노동위원장 시절인 지난 2009년 7월1일부터 시행된 비정규직법(기간제법)을 지킨 일이다. 비정규직 인력을 2년 넘게 쓰려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인 법안에 당시 집권 한나라당이 4년으로 늘리려는 개정안(유예안)을 밀어붙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추 후보자는 이 과정에서 홍준표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일하기 싫으면 뱃지 떼고 집에 가서 애나 보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퍼부었다며 “막말이라도 해서 상대를 깎아내려 이기고자 하는 마초적 정치 때문에 문제 풀기가 더 어렵다”고 지적했다. 언론도 당시 ‘추미애 실업’이라는 말까지 붙였다. 추 후보자는 “언론이 독불장군, 추설공주, 추고집 등 온갖 비난을 퍼부었어도 괜찮았다”며 “이 순간 어디선가 미래를 향한 비상을 꿈꾸며 무거운 현실을 묵묵히 참아내는 젊은 친구들이 ‘거위의 꿈’을 마음껏 부르게 할 수 있으니까 좋았다”고 썼다.

추 후보자는 “이제 어느 누구도 현재의 비정규직법보다 비정규직 지위를 후퇴시키지 못한다”며 “그러나 이는 시작일 뿐 비정규직 차별을 없애는 일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밖에도 추 후보자는 이미 판사시절 군사정부의 공안사건에 소신 결정을 했다. 추 후보자는 판사로 첫 부임지인 춘천지방법원에서 1986년 10·28 건국대 점거농성 사건 이후 불온서적 압수수색 영장청구를 기각했다. 추 후보자는 춘천 시내에서 제일 큰 서점인 ‘청구서점’의 압수수색 영장이 청구된 사건을 두고 “청구서를 읽는 순간 가슴이 콱 막혀왔다”며 “법적 정당성이나 논리적 근거도 없고 상식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김대중의 ‘옥중서신’,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이 목록에 들어있는 점을 들어 추 후보자는 “‘국민을 바보로 알고 있거나, 바보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세상에 이찌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을까?’”라며 “영장 청구서에 기재된 죄명은 단순히 경범죄처벌법상 ‘유언비어 유포’라고만 적혀있을 뿐 무엇이 문제가 된다는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없었다”고 썼다. 추 후보자는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그 사유로 “국민의 알 권리는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인데, 경범죄처벌법에도 이 법을 남용해 기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남용 금지 조항이 있다”며 “영장 청구서에는 어떤 것이 혐의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책을 유언비어라고 볼 근거자료도 없다”고 썼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9일 오전 서울 양천구 목동 서울남부준법지원센터에 마련된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첫 출근 하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추미애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9일 오전 서울 양천구 목동 서울남부준법지원센터에 마련된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첫 출근 하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후 새로 부임한 법원장이 시국 사건에 관한 즉결 심판시 자신을 불러 당부했던 사례도 소개했다. 그 법원장은 추 후보자에게 “기관에서 이 사건에 관해 미리 부탁한 바가 있소, 이런 학생은 법정 최고의 구류형 29일을 선고하지 않으면 나가서 또 다른 시위를 주동해서 잡힐 거요. 그 학생을 생각해서라도 큰일 저지르기 전에 장기간 구류를 선고해서 시위하지 못하게 잡아둬야 해요!”라고 했다고 썼다. 추 후보자는 그가 “추 판사도 살고 나도 삽시다”라고 했다고도 전했다. 그러나 추 후보자는 법정으로 가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정보과 형사 3명을 내쫓고, 불법집회를 한 학생에게 구류 3일을 선고했다.

1987년 3월 무렵 시위를 주도한 일로 수배된 강원대생 3명에 영장이 청구된 사건에서 2명의 영장을 기각하자 경찰서장이 새벽에 전화온 사건도 전했다. 추 후보자는 “막 잠이 든 새벽 2시, 전화벨이 울렸다”며 “경찰서장이라면서 ‘기각한 영장을 갖다 줄테니 다시 영장을 발부해 주시오. 우리 정보과 형사들이 그 놈들 잡으려고 며칠 밤을 새웠는데, 판사라고 제멋대로 영장을 기각하나요’라고 했다”고 전했다. 추 후보자는 서장에게 “서장님, 한번 서명한 영장은 다시 번복할 수가 없다”며 “판사가 헌번 결정해 외부로 나가면 절대 번복할 수 없고 영장 청구권자가 검사인데 서장께서 왜 제게 직접 전화를 하느냐, 검사와 상의한 후 검사 지휘를 받으시는 것이 좋겠다”고 반박했다고 썼다. 추 후보자는 법원장이 다음날 자신을 불러 아버지 같은 서장에 뭐라고 했기에 화를 내게 했느냐며 자신을 다그쳤다고 했다. 하지만 아는 검찰 선배에게 이 같은 경위를 문제제기하자 오히려 그 서장이 자신에게 찾아와 사과했다고 밝혔다.

반대로 1988년 여소야대가 되자 법원 내에서 대법원장 퇴진 운동이 벌어졌을 때 추 후보자는 성명서에 반대했다. 그는 “성명서에 서명하지 않았다”며 “다른 법원에서 서명하는 판사들의 명단을 뉴스로 지켜보면서 아쉬운 점은 (포함된 판사들이) 침묵으로 불의의 시대를 용인하고 방관한 때가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썼다. 그는 “마치 다 된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듯이 뒤따라 서명하기엔 사법집단의 침묵은 너무나 큰 방조죄에 해당됐다”고 “서명 대신 정말 해야 할 일은 사법집단이 시대적 사명과 양심을 외면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반성하고 그후에 제대로 사법정의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법부를 두고 추 후보자는 “어두운 시절 내가 경험한 사법부는 우리나라 사법 역사의 얼룩진 상처이기도 하다”며 “내가 정권 교체를 염원했던 것도 정치가 국가의 중추인 언론·교육·행정·사법에 미치는 영향이 커 진정한 사법 발전도 올바른 정치를 선택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 2009년 7월1일 당시 한나라당이 국회 환노위에서 비정규직법 유예안을 기습상정하자 추미애 환노위원장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09년 7월1일 당시 한나라당이 국회 환노위에서 비정규직법 유예안을 기습상정하자 추미애 환노위원장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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