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형 일자리’는 한국 사회 노동시장 문제를 개선할 새로운 실험일까, 노동의 양보만 바라는 기업 주도 투자일까. 문재인 정부가 광주형일자리를 본 따 ‘상생형일자리’를 100대 공약으로 추진하면서 전국 10여개 지자체에 도입이 확산됐다. 사회적 대화 틀 속에서 양보·타협으로 질 좋은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목표다. 노동계 일각은 노동조건 하향화 정책의 전국 확산이라며 참여를 거부한다.

독일 폭스바겐의 AUTO5000 프로젝트는 상생형일자리의 모델이다. 첫 사례 광주형일자리의 이론적 기반이 됐다. 경제위기와 높은 실업률 문제를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의 일자리를 창출해 극복한 노사 타협이 눈길을 끌었다. 임금체계부터 작업 공정까지 곳곳에 실험을 시도한 혁신성은 교훈이었다.

교훈은 한국 사회에 잘 전달됐을까. 광주형일자리는 민주노총의 불참으로 ‘반쪽 사회적대화’라는 오명을 들었고, 실제 노동 측 교섭력이 약해 양보만 강요한다는 비판을 산다. 다른 지역 상생형일자리도 상생에 대한 고민이 빠졌다는 평가가 높다. 미디어오늘은 AUTO5000 프로젝트 논의에 참가했던 독일 금속노조 볼프스부르크 사무소의 요하임 페르만씨와 마르틴 쿨만 괴팅겐대 사회학연구소 박사 및 금속노조 국제담당 플라비오 베니테스씨를 만나 관련 이야기를 들었다.

▲독일 볼프스부르크에 위치한 폭스바겐 공장 전경. 사진=김용욱기자
▲독일 볼프스부르크에 위치한 폭스바겐 공장 전경. 사진=김용욱기자
▲볼프스부르크 폭스바겐 노동자들이 오후 2시 경 출퇴근을 하는 모습. 사진=김용욱 기자
▲볼프스부르크 폭스바겐 노동자들이 오후 2시 경 출퇴근을 하는 모습. 사진=김용욱 기자

같은 공장 다른 임금체계, 독일 노조엔 ‘금기’

AUTO5000 ‘5000×5000’은 월 5000마르크로 실업자 5000명을 새 자동차공장에 채용하겠단 폭스바겐 프로젝트였다. 1999년 11월 인사책임자 피터 하르츠가 독일 금속노조에 공개 제안하며 시작됐다. AUTO5000은 새 자동차공장 명칭이다.

당시 폭스바겐 공장이 있는 볼프스부르크 지역은 위기감이 팽배했다. 90년대 중후반 독일 전체 실업률은 10%를 넘었고 볼프스부르크 경우 17%에 달했다. 볼프스부르크 공장 생산량도 1989년 88만6000대에서 2001년 54만1000대로 대폭 줄었다. 생산량은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낮은 스페인, 슬로바키아 등 해외공장으로도 빠져나가고 있었다.

1년 6개월이 넘는 긴 협상 끝에 2001년 8월 노사는 AUTO5000 설립을 위한 ‘프로젝트 협약’을 체결했고, 2009년 1월 AUTO5000은 경제적 성공을 거두며 폭스바겐에 통합됐다. AUTO5000은 직원 4200명이 본사로 그대로 옮기며 7년 만에 사라졌다. 폭스바겐은 이 협약으로 동유럽 생산 계획을 철회하고 미니밴 ‘투란’을 AUTO5000에서 생산했고, 2004년 투란은 독일 미니밴 시장의 25%를 점유하는 성과도 기록했다.

▲독일 금속노조 볼프스부르크지사 공보실에서 근무하는 요하임 페르만씨(왼쪽)와 국제담당 플라비오 베니테스씨. 사진=김용욱 기자
▲독일 금속노조 볼프스부르크지사 공보실에서 근무하는 요하임 페르만씨(왼쪽)와 국제담당 플라비오 베니테스씨. 사진=김용욱 기자

독일 금속노조는 이 제안이 “금기를 깨는 일”임에도 협상에 나섰다. “볼프스부르크 지역의 존립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볼프스부르크는 1936년 폭스바겐 공장이 들어서면서 처음 생긴 도시로 지역 주민들 삶도 폭스바겐과 직결됐기에 위기감이 한층 더 했다. 독일 금속노조 볼프스부르크지사 공보실의 요아힘 페르만씨는 “경영진이 늘상 하는 구조조정, 공장이전 등 옵션이 아니면 노사가 머리를 맞대 공통의 해법을 찾아야 했다”고 말했다.

이 프로젝트는 ‘한 공장에 두 개의 단체협약’이 생기기에 노조에겐 ‘금기’였다. AUTO5000의 임금 월 5000마르크는 폭스바겐 공장 노동자 평균임금의 80%였다. 노동시간도 폭스바겐 단협의 주 28.8시간보다 긴 35시간이었다. 독일 노사문화에서 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서로 다른 단체협약을 맺는 건 단일한 협약 체계를 깨는 것으로 상상할 수 없었다.

폭스바겐 노동자들도 동요했다. 1985년 폭스바겐에 입사한 페르만씨는 AUTO5000이 가동되는 동안 사업장평의회(한국의 기업노조 개념과 유사) 대의원으로 협상에 줄곧 참여해 당시를 소상히 기억했다. 그는 “같은 일을 하는데 더 낮은 임금·노동 조건을 가진 직원이 생기면 언젠가 우리 임단협도 저 조건에 맞춰진다는 두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차별 자체도 문제였다. 폭스바겐 노조는 회사와 협상하는 한편, 독일 금속노조 전체와 현장 노동자들을 함께 설득해나가야 했다.

쿨만 박사는 이와 관련 독일 자동차산업도 임금 격차 문제를 겪었다 지적했다. “볼프스부르크가 있는 니더작센주의 금속-전기부문 임금협약 수준이 폭스바겐보다 낮았는데 당시 임금 격차는 폭스바겐 뿐 아니라 독일 전체 자동차 산업, 독일 사회가 공감하는 문제였다”는 것이다. 세계 최대 산별노조인 독일 금속노조는 지역별, 부문별로 지부가 따로 협상을 진행하고 협약은 지역 내 동일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 모두에게 적용된다. AUTO5000의 월 5000마르크는 니더작센주 협약임금과 같았다. 임금은 독일 금속노조의 산별 교섭 테두리 내에서 정해졌다.

▲요하임 페르만씨. 사진=김용욱 기자
▲요하임 페르만씨. 사진=김용욱 기자
▲플라비오 베니테스씨. 사진=김용욱 기자
▲플라비오 베니테스씨. 사진=김용욱 기자

‘강한 노조’가 타협 전제

AUTO5000이 가능했던 배경엔 ‘강한 노조’가 있다. 실제 협약이 타결되기까지 1년 8개월 가량 노사는 치열하게 대립했다. 타결 한 달 전엔 노조가 협상 결렬도 선언했다. 페르만씨는 “노동시간을 두고 회사가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다”고 말했다.

독일 금속노조는 주 35시간 노동 협약을 역사적 성과로 여기는데 폭스바겐은 AUTO5000에 주 48시간을 기본으로 주 60시간까지 연장노동을 허용해달라 요구했다. 또 생산량 목표를 못 채울 경우 무급으로 생산량을 채우는 ‘프로그램 임금’도 요구했다. 협상 결렬 한 달여 후, 노동시간은 주 35시간에 ‘숙련화시간’ 명목의 3시간을 추가한 주 38시간으로 극적 타결됐다.

노조 활동가 일부는 이미 AUTO5000 진행 와중부터 프로젝트를 어떻게 끝낼지 고민했다. 페르만씨는 “(현장에선) 애초 이 프로젝트가 오래 지속될 거라 보지 않았다”며 “한 공장 안의 서로 다른 임금체계와 노동조건의 공존은 절대 지속될 수 없다”고 말했다.

AUTO5000 노동자들의 ‘노조 조직’ 움직임도 활발했다. 설립 후 2년 간은 폭스바겐 노동자들이 AUTO5000 사업장평의회를 대신 맡았는데 본사 직원이 자회사 직원을 대의하는 격이라 AUTO5000 내 불만이 쌓였다. 2004년부턴 AUTO5000 노동자들이 노조 대의원 격의 ‘소통담당자’를 임의로 만들고 직접 선거로 100명을 뽑아 불만을 해소해갔다. 2005년 AUTO5000 노동자 90% 이상이 금속노조에 가입했다.

2001년 맺은 프로젝트 단협의 5년 기간이 끝나고 2006년 독자적인 단체협약을 처음 체결할 때 AUTO5000 노동자들은 경고파업도 벌였다. 그해 3% 임금인상을 따냈다. 점차 본사 직원과 임금이 같아져 금속노조는 회사에 통합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2008년 11월 노사가 통합협약을 체결하며 AUTO5000은 사라졌다.

“사람이라면 다르게 일할 수 있어야” 혁신의 전제

한국과 가장 다른 점이 노조의 결정권이다. 양보·협상이 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광주형일자리는 이를 노·사·민·정 사회적 대화기구로 대체했다. 한국 노사 관계는 갈등적이라 이같은 교섭이 어려운 뿐더러 지역 공동체의 문제를 사회적 대화로 모색하는 과정에서 혁신을 일으킬 수 있다는 취지가 더해졌다. 그러나 사회적 대화 기구에서 노조의 폭넓은 참여권한이 실질적으로 보장되는지는 미지수다. 실제로 광주형일자리 협약엔 ‘자동차 35만대 누적 생산까진 노사협의회에서 노동조건을 협의한다’는, 노조를 부정하는 듯한 모호한 조건이 달렸다.

베니테스씨는 정부가 최종 중재자 역할을 할 때의 위험성을 언급했다. 그는 “독일 역사적 경험이 가르쳐 준 건 직접 당사자가 협상장에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어떤 누구도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보다 전문성이 없기 때문”이라며 “일반화할 수 없지만 정부의 최종 중재는 많은 경우 사측에 유리한 결론을 낼 위험이 있는 시스템”이라 말했다.

▲마르틴 쿨만 독일 괴팅겐대 사회학연구소 박사. 사진=김용욱 기자
▲마르틴 쿨만 독일 괴팅겐대 사회학연구소 박사. 사진=김용욱 기자

쿨만 박사도 “AUTO5000에도 4개 주체가 있는데 노조, 사용자, 지역 정치, 국가정치”라며 “우선 노조와 기업 양쪽에 최소한 실험을 해보려는, 같이 춤 출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소수라도 있어야 한다. 독일 노사 관계 특성인데 노조는 투쟁도 잘 하지만 협력도 잘한다”며 “이들을 강화하는 게 지역·중앙 정치 역할”이라 밝혔다.

쿨만 박사에 따르면 AUTO5000 실험을 시도했던 경영진 중 폭스바겐에 남은 인사는 거의 없다. 폭스바겐은 대외적으론 AUTO5000으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었다고 밝히지만 사내엔 언급을 꺼리는 분위기가 남아있다. 실제로 당시 실험을 이끈 이들은 폭스바겐 특유의 폐쇄적인 문화를 혁신하고 싶어했던 젊은 경영진이었고 후임 경영진은 AUTO5000의 실험적 요소를 다 뺀 채 통합했다.

그 중 하나가 ‘노동자 자주 관리 시간’이다. 연구자들이 AUTO5000를 고평가하는 부분 중 하나다. AUTO5000은 오로지 직원의 자율 숙련교육과 팀 회의에 쓰는 3시간을 노동시간에 포함해 협약으로 정했다. 팀장과 팀원은 작업분배, 인원 투입 계획, 교대제, 숙련계획, 휴가 등 관리를 자율적으로 정했다. 숙련 학습, 자주 관리 등은 협약 상 노동 의무로도 적혔다.

쿨만 박사는 이런 프로젝트를 하면서 임금·노동시간만 얘기한다면 노조를 협상에 끌어들일 수 없을 것이라 제언했다. “독일 사례를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그는 “이런 프로젝트에서 케익 하나를 두고 이를 어떻게 나눌지만 말한다면 노사 협력은 불가능하다”며 “노조에게 어떤 권한과 영향력을 위임할지, 노동의 질적인 부분과 조직화 측면 등 노조가 따라오게끔 구체적인 것을 제시해야 한다. 그건 사람이 찾아내야 된다”고 말했다.

그는 “좋은 노조는 무엇이고 좋은 경영은 무엇이냐는 물음과도 통한다”고 덧붙였다. 노조 또한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에만 제한되지 않고 ‘사람이라면 다른 방식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고민을 해야 실험에 나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이는 또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얼마나 스스로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지를 말하는 것이고, 노조가 얼마나 민주적인지와도 통한다”며 “노조가 반드시 토론해야 할 주제고 정치가 노조를 토론에 끌어들여야 할 주제”라 말했다.

* 이 기사는 민주노총과 협력사업으로 진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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