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씨 품은 방송 비정규직, 모아 놓으니 화산이더라”
“불씨 품은 방송 비정규직, 모아 놓으니 화산이더라”
[인터뷰] 방송 비정규직 노동운동 마중물 ‘방송계갑질119’ 운영진 “역할 다해 종료… 변화는 이제 시작”

‘방송계갑질119’(이하 방송계119) 오픈채팅방은 “화산같은 방”이었다. 참가자 대부분 신원 노출 문제로 자기 얘기를 다하지 못해 평소엔 잠잠했지만 주제가 하나 던져지면 스태프가 끼어들 틈도 없이 분노가 폭발적으로 터졌다. ‘갑질’ ‘차별’ ‘밤샘노동’ ‘공정방송’ ‘지상파’ 등이 주제였다.

참가자들이 채팅방 개설 한 달 반 만에 오프라인 모임을 가진 것도 이 덕분이다. 2018년 1월5일 누군가 남긴 ‘노조 만들자’란 카톡이 순식간에 노조 설립 캠페인이란 들불로 번졌다. “노조가입동의 1”, “노조가입동의 2” 등이 1분 터울로 올라오더니 몇일 내 130명을 넘겼다.

“이 분위기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 노조 동의 선언이 순식간에 80개를 넘을 때 스태프들은 머리를 모았다. “100을 넘기면 이들과 오프라인에서 모이자”고 했다. 스태프는 잽싸게 카톡방 분위기를 ‘노조 설립 릴레이 선언’으로 이끌며 참여를 독려했다. 그렇게 2018년 2월3일 ‘방송계 을들 모여라’ 모임이 처음 열렸다. 현재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간부 대부분이 서로를 처음 본 날이다.

스태프들은 방송계119를 ‘불쏘시개’나 ‘접착제’라고 불렀다. “방송계엔 이미 제작현장을 바꿔보자는 불씨를 가진 사람이 곳곳에 있었고 119는 이들에게 소통 공간을 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불쏘시개 역할을 다했기에 오는 15일 방송계119 운영을 종료한다. 미디어오늘은 방송계119 시작과 끝을 함께 한 김수영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김유경 ‘돌꽃노동법률사무소’ 노무사, 김혜진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를 만나 지난 1년 6개월 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8월12일 서울 상암동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한 김수영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왼쪽), 김혜진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가운데), 김유경 '돌꽃노동법률사무소' 노무사. 사진=김용욱 기자
▲지난 8월12일 서울 상암동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한 김수영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왼쪽), 김혜진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가운데), 김유경 '돌꽃노동법률사무소' 노무사. 사진=김용욱 기자

“상품권1천만원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방송계119는 2017년 9월 ‘직장갑질119’ 준비와 동시에 추진됐다. 직장갑질119 활동가들은 노동권 보호에서 가장 취약한 현장 10곳을 꼽았고 그 중 하나가 ‘방송 비정규직’이었다. 궁극적 목표는 노동조합과 같은 단체 설립이었다. 이미 1년 전 고 이한빛 tvN 조연출의 사망으로 방송 비정규직 현장의 부조리는 공론화된 터였다.

김혜진 활동가가 한 명씩 사람을 모았다. ‘무보수 자원활동’이었음에도 방송작가, 프리랜서 기자, 노무사, 변호사 등 다양한 직종이 모였다. 작가모임을 운영했던 서명숙작가와 지금은 희망연대노조에서 활동하는 이만재 활동가, 권순택 언론개혁시민연대 활동가, 이정호 당시 뉴스타파 기자, 오진호 직장갑질119 활동가, 김유경·김한울 노무사 및 김수영·오민애·이용우 변호사 등이 최초 멤버다.

개설 보름 만에 ‘상품권 페이’가 터졌다. 2018년 1월 초 필명 “상품권1천만원”이 채팅방에 들어왔다. 심상찮음을 감지한 김유경 노무사는 “혹시 닉네임이 직접 겪으신 일인지” 물었다. “(SBS) 동상이몽 시즌1 당시 6개월 넘는 임금을 롯데와 신세계 상품권으로 받았다”란 대답이 돌아왔다. 김 노무사는 곧장 제보자를 만났다.

▲지난해 1월 임금을 상품권으로 주는 '상품권 페이' 관행이 최초 고발된 '방송계갑질119' 카카오톡 내용. 사진=방송계119
▲지난해 1월 임금을 상품권으로 주는 '상품권 페이' 관행이 최초 고발된 '방송계갑질119' 카카오톡 내용. 사진=방송계119
▲지난해 1월 한 익명 참가자의 '노조 만들자' 제안이 일으킨 '노조 설립 동의 릴레이 선언'. 사진=방송계119
▲지난해 1월 한 익명 참가자의 '노조 만들자' 제안이 일으킨 '노조 설립 동의 릴레이 선언'. 사진=방송계119

‘제보자·방송계119·전문가 스태프·언론’의 합으로 공론화에 성공했다. 한겨레21 보도는 “어떻게 임금을 상품권으로 주느냐”는 독자들 공분을 일으켰고 방송사를 압박하는 동력이 됐다. 법률 전문가, 노사 교섭 유경험자들인 스태프들은 대응에 집중했다. 사건이 알려진 보름 만에 SBS로부터 상품권 페이 중단 선언을 이끌어냈다.

방송계119는 이후 7월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2018년 7월4일 방송스태프지부 설립 직전까지다. 2월 ‘방송계 을들 모여라’ 최초 오프라인 모임은 이들에게 기념비적이다. 카톡방에서 노조 설립 의지만 확인한 30여명의 방송 비정규직들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였다.

스태프 3명은 당시를 ‘결기’로 기억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방송 스태프 십수명이 한 번에 “내가 노조 준비위원이 되겠다”며 손을 들었다. 실제로 이들은 끝까지 남아 방송스태프지부를 설립했다. 김두영 지부장, 곽헌상 사무국장, 각 분과장들 대부분이 손을 번쩍 든 인물들이다.

3월엔 SBS ‘뉴스토리’ 작가 부당해고 사건이 터졌다. 지난해 방송사와 작가 간 불공정계약 실태를 폭로한 대표 사례다. 동시에 노조 설립 모임을 계속 했고 방송제작현장 성폭력 실태조사도 진행했다. 김 노무사는 “외부로 알리지 못했을 뿐 119엔 성폭력 피해 사건 제보가 정말 많이 들어 왔다”고 말했다.

상품권 페이 관행은 근절됐고 피해 작가들은 복직했을까. 직장갑질119엔 불과 한 달 전쯤 ‘상품권으로 임금을 받고 있다’는 한 지역 방송사 스태프 제보가 접수됐다. SBS는 ‘추후 채용에 작가들을 우선 채용하겠다’ 구두로 밝혔으나 지키지 않았다. 대신 다른 SBS 내 작가들 계약서의 불공정 조항은 바로 잡혔다. 김혜진 활동가는 “스태프들 마음이 아픈 부분인데 작가들은 ‘미안해 말라’며 오히려 다독여준다”고 했다.

▲왼쪽부터 김유경 노무사, 김혜진 상임활동가, 김수영 변호사. 사진=김용욱 기자
▲왼쪽부터 김유경 노무사, 김혜진 상임활동가, 김수영 변호사. 사진=김용욱 기자

스태프 해고? 안 부르면 그만… 익명 고발 여전히 힘들어

김혜진 활동가는 방송 비정규직 노동운동에서 가장 어려운 점으로 ‘무기력’을 꼽았다. 법의 보호를 경험한 적이 없는 데서 온 무력감이다. 김 활동가는 “억울한 일이 있을 때 법에 호소할 수 있느냐 여부는 용기를 낼 수 있느냐의 문제다. 노동법·노조법 등 법의 테두리 밖에 있는 이들은 ‘과연 우리에게 법 적용이 되느냐’ 문제부터 마주한다”고 말했다.

스태프들이 공들인 부분도 ‘설득’이다. “노조를 만들어도 법외노조 아니냐” 식의 냉소가 워낙 뿌리 깊어 스태프들은 강연을 계속 열어 무력감을 해소하는 데 노력했다. 김수영 변호사는 “방송스태프들은 노조가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돌아보는 과정을 여러 차례 겪었다”며 “법적 요건을 갖춰야만 노조를 할 수 있고 노동권을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은 (지부의) 어느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다”고 말했다.

방송스태프노조 결성엔 “이 시기를 놓치면 안된다”는 절박함도 한몫했다. 지난해 7월 단행된 ‘노동시간 단축’이 기폭제였다. 노동시간은 방송작가, 독립PD, 드라마·예능 스태프 등 방송 비정규직이 업종을 초월해 공감할 수 있는 연결고리였다. ‘밤샘노동’은 스태프들 분노가 극에 달한 문제기도 했다. 김혜진 활동가는 “노동시간이 단축될 거란 기대와 방송사나 제작사가 어떤 대응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문제의식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방송계119과 직장갑질119 채팅방 풍경은 확연히 달랐다. 직장갑질119는 참가자들이 자신의 사건을 질문하느라 하루에 수천개 카톡이 쌓였다면 방송계119는 대부분이 분노나 한풀이였다. 자신이 어느 제작현장에서 일하는지, 언제 밤샘 촬영을 했는지 등 구체적인 상담은 거의 없었다. 구체적인 상담은 대부분 메일을 통했다. 신원이 드러나면 일감이 끊긴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김수영 변호사는 “방송제작 현장 취업 경로는 일반적인 채용과 다르다. 아는 사람이 아는 사람을 끌어주는 식이다. 블랙리스트가 돌면, 일반 회사는 해고 절차를 거치겠지만 여긴 그냥 안 부르면 그만”이라며 “한 다리 건너면 누구인지 뻔히 아는 좁은 바닥이라 극히 예민할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는 공포“라 말했다. 실제 방송계119에 사건을 제보했다 일감이 끊겨 애를 먹은 스태프들도 적지 않다.

▲지난해 2월, 방송스태프 노조 준비위원들이 처음 모였을 때 회의 내용을 정리한 메모. 개선이 필요한 사항, 요구조건 등이 A4 빼곡히 적혔다. 사진=방송계119
▲지난해 2월, 방송스태프 노조 준비위원들이 처음 모였을 때 회의 내용을 정리한 메모. 개선이 필요한 사항, 요구조건 등이 A4 빼곡히 적혔다. 사진=방송계119

김 변호사는 “이런 난망한 상황에서 노조가 생긴 것 자체가 하나의 시작이자 성과이고 가능성”이라 지적했다. 그는 “이제는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무엇이 문제라는 걸 안다.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다음 문제이지만 무엇을 해결해야 하는지를 집단적으로 알고 있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방송계119는 ‘지상파방송 드라마 제작환경 개선 공동협의체’ 논의 결과에 관심을 모은다. 표준근로계약서 내용을 어떻게 작성할 것인지, 어떻게 제대로 이행시킬 것인지, 스태프 표준인건비 기준을 어떻게 책정할 것인지 등이 당장 다음 과제이기 때문이다. 방송스태프지부가 짊어진 책무기도 하다. 공동협의체는 지상파 3사(방송사),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제작사), 언론노조(정규직 노조), 방송스태프지부(비정규직 노조) 등 4자가 참여하는 기구다.

이들은 방송사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갈등을 부각하기보다 두 집단이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구조를 봐달라 강조했다. 김 활동가는 “제작현장에서 개인들끼리 갈등하는 문제가 있겠지만, 방송스태프지부라는 비정규직 노조가 만들어지면서 구조적 문제를 집단적으로 해결할 단초가 생겼다”며 “4자 협의체에 방송스태프지부가 들어갈 수 있었던 배경에도 언론노조의 노력이 있다”고 말했다.

노조에 가입한 직군은 작가, 독립PD, 드라마 제작현장 스태프들이 대부분이다. 메일 제보를 총괄한 김유경 노무사는 “분장·소품·미술팀이나 편집·CG팀 등 후반작업 스태프들과는 소통한 적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소외된 방송 비정규직의 요구를 발굴하는 일도 남은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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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2019-08-14 13:31:12
김 변호사는 “이런 난망한 상황에서 노조가 생긴 것 자체가 하나의 시작이자 성과이고 가능성”이라 지적했다. 그는 “이제는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무엇이 문제라는 걸 안다.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다음 문제이지만 무엇을 해결해야 하는지를 집단적으로 알고 있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 노동자 스스로 알아야 바뀐다. 자기가 나무에 발 묶인 코끼리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면, 내 가족/나의 친구/내 동료도 똑같은 경험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