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2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국회에서 통과한 ‘태평양전쟁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지원법(태평양전쟁희생자지원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나흘 뒤 국무조정실 관계자가 한겨레에 직접 기고해 정부 입장을 변호했다. 해당 관계자는 “한일 청구권 협상과정에서 일본이 생존자 지원이 곤란하다는 태도를 수차례 표명했다”며 “국가 재정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같은해 11월 해당 법을 주장하던 희생자유족은 국회 경위들에게 끌려 나갔고, 지원을 축소한 수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 사건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노무현 정부가 유독 무책임해서가 아니라, 60년 이상 외면당한 피해자들이 유일하게 희망을 가졌던 정부여서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정부 문턱은 높았다. 정부는 2005년부터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신고를 받았다. 법 제정으로 피해자들은 보상을 기대했지만 정부는 친절하지 않았다.

백장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유족총연합회장은 8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2005년 정부에 피해신고했는데, 신고해도 2007년 법 통과한 이후에 다시 보상금을 신청해야 했다”며 “이걸 모든 피해자들이 알았겠느냐. 우리가 ‘신고했어도 다시 신청해야 한다’고 알릴 정도로 정부가 허술했다”고 말했다.

▲ 부산 일본영사관 앞에 있는 강제동원 노동자상. 사진=CBS 노컷뉴스
▲ 부산 일본영사관 앞에 있는 강제동원 노동자상. 사진=CBS 노컷뉴스

신청기간을 정한 것도 피해자들에겐 장벽이다. 2013년 말 끝날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강제동원조사지원위)’를 2015년 6월로 1년6개월 연장했다. 피해자와 유족 보상금 지급신청은 2014년 6월30일로 정했다.

신윤순 사할린강제동원억류피해자한국잔류유족회장은 12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뒤늦게 2015년 영주귀국한 사람들은 피해 판정을 받고 강제동원조사지원위가 있는데도 신청기간이 지났다며 보상을 못 받았다”고 말했다. 강제동원조사지원위 조차 없어진 지금, 피해자나 유족이 사실상 사할린에서 한국에 들어올 방법은 없다.

무책임한 정부에 피해자들 소송전 나서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소송한 건 이처럼 정부가 소극적으로 나와서다. 박근혜 정권은 피해자가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강제동원 판결에 개입했고, 문재인 정부는 강제동원 판결이 사인 간(피해자-일본기업) 다툼이라며 문제해결에 개입하지 않고 있다. 소송은 최종 해결책일 수 없다. 

백장호 회장은 “강제동원 소송은 군인·군속 등을 제외한 일부 노무자들이 했는데 일본 전범기업이 발행한 명단에 이름이 있어야만 원고가 됐고, 자료가 없으면 방법이 없었다”며 “소송에 상당히 허점이 많다”고 말했다. 신윤순 회장은 “사할린에 끌려간 사람들은 언제 돌아가셨는지도 잘 모르고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몰라서 우리는 소송할 수 없다”고 말했다.

▲ 일본 아베 신조 총리. 사진=연합뉴스
▲ 일본 아베 신조 총리. 사진=연합뉴스

소송으로 해결하지 못한 문제도 있다. 신 회장은 “사할린에서 (잔류 조선인들이) 일본에 우편저금 보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는데 일본 우정성에서 1억8900만엔을 보관 중인 걸 확인했다”며 “통장 가진 사람에게만 액면가 4배로 갚아주겠다는데 그러면 지금의 라면 한 봉지값 수준”이라고 했다.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받아오려면 정부가 협상에 나서야 한다.

강제동원조사지원위 조사과장을 지낸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위원은 12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는 연인원 약 780만명인데 소송 가능한 사람은 2~3만명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들 중 다수는 소송을 감당하기 힘든 형편이다. 정 위원은 “소송은 근본 대책이 아니다”며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 회장은 “국가 재정을 안 쓰려고 일본 핑계 대거나 기업들에 떠맡겨선 안 된다”고 했다.

신 회장은 “유족들 나이도 팔십인데 일본이 저렇게 나오면 우리 정부라도 협상해달라”고 했다. 백 회장도 “한국 정부라도 먼저 나서고 국민들도 관심을 가져야 일본이 이렇게 나오는 걸 지적할 명분이 생긴다”고 했다.

연구자와 피해자들은 한 목소리로 정부가 강제동원 명부를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혜경 위원은 지난 2015년말 강제동원조사지원위 활동을 마치며 180만명(중복 포함)의 피해자명부를 전산화해 국가기록원에 이관했다. 정 위원은 “주로 일본정부와 기업이 생산한 자료”라며 “명부 공개에 오랜 준비나 많은 비용이 필요하지 않다”고 밝혔다.

피해자명단은 강제동원 진상규명의 중요한 자료다. 피해자가 보상 등 권리를 찾을 근거이며 연구자에겐 지역사·경제사·사회사 등의 연구자료다. 정 위원은 “북한과 일본이 수교를 준비 중인데 북한은 (강제동원 관련) 일본 쪽 자료가 없다”며 “(해당 자료를) 포털에 공개하면 북한도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해당 명부 중 약 30%가 북한 쪽 명부라고 한다.

▲ 문재인 대통령. 사진=청와대
▲ 문재인 대통령. 사진=청와대

백장호 회장은 ‘고 김광렬 기록물’도 조속히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에서 온 명단인데 행정안전부에 알아보니 27만명 분이라고 한다”며 “전산작업 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는데 일단 11월부터는 공개하겠다는 (정부 쪽) 약속을 믿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후생성이나 우정은행, 세관 등에 금전 관련 기록물이 더 있다”며 “정부가 가져와야 한다”고 했다.

김동철 바른미래당 의원, 오제세, 김민기 민주당 의원 등은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안(대일항쟁기지원법)’을 발의했다. 백 회장은 “법안들은 ‘기회를 놓친 사람들’ 구제가 핵심”이라고 했다. 

법 통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위원회 위상을 올려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신윤순 회장은 “국무총리 소속이니 행안부에서 예산을 받아오니 부족하다. 대통령 직속기구로 만들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 회장은 “김민기 의원 법안이 위원회 존속기간 9년으로 가장 길다”면서도 “역시 한시법이라 예산배정도 잘 안 되고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강제동원 조사위원회는 ‘일본이 잘못했다고 할 때까지 이어져 연구자들이 계속 증거를 찾아 일본에 내밀어야 한다”며 “정권 바뀌면 없어질 조직으로는 일제가 40년간 고통을 준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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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정혜경, 조선인 이주강제동원 역사의 연구 국내 소장 전시체제기 조선인 인적동원 관련 명부자료의 실태 및 활용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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