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열심히 일해 예멘에서 굶는 식구들에게 돈을 보내야 하는데, 마음이 너무 아파요.” (예멘인 인도적 체류자 H씨)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국내 난민신청자와 인도적 체류자들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법무부가 지난 1일부터 ‘난민신청자와 인도적체류자 건설업 취업 불가’ 내부지침을 시행하면서다. 지침의 법적 근거와 실효성을 놓고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당사자 난민과 이주민·난민인권단체들은 지침 철회를 촉구했다.

난민과함께공동행동과 이주공동행동은 8일 오전 서울 효자동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난민 건설업 취업 제한 법무부 내부지침 즉각 철회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지난달 전국 각 출입국·외국인청에는 법무부가 낸 안내문이 붙었다. 안내문은 7월1일부터 난민신청자와 인도적 체류자는 건설업에 취업할 수 없고, 사전 허가를 받고 취업해야 한다고 공지했다. 난민인정자와 신청자, 인도적 체류자들이 체류기간을 연장하고 취업 활동 허가를 받을 때 추가 수수료를 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안내문은 제재를 실시하는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난민과함께공동행동과 이주공동행동은 8일 오전 서울 효자동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난민 건설업 취업 제한 법무부 내부지침 즉각 철회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난민과함께공동행동과 이주공동행동은 8일 오전 서울 효자동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난민 건설업 취업 제한 법무부 내부지침 즉각 철회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이주공동행동에 따르면 법무부는 전국 출입국·외국인청에 해당 안내문을 배포했다. 난민과함께공동행동·이주공동행동 제공
▲이주공동행동에 따르면 법무부는 전국 출입국·외국인청에 해당 안내문을 배포했다. 난민과함께공동행동·이주공동행동 제공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난민신청자와 인도적 체류자들은 이에 따라 1일부터 일자리를 잃거나 ‘불법 취업자’ 신세가 됐다.

이는 지난달 말 전주의 한 건설업 공장에 취업한 H씨에게 청천벽력이었다. 예멘인 인도적 체류자 H씨는 이날 대독을 통해 “우리나라는 제가 12살이던 2011년부터 20살인 지금까지 쭉 내전 중이다. 2017년 10월 징집을 피해 한국에 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H씨는 “3달 간 일한 공장에서 임금체불을 겪은 뒤 지난달 말 건설업 공장에 취업했다. 드디어 예멘에서 굶는 식구들에게 돈을 보낼 수 있게 됐는데, 이 지침으로 일을 못하게 됐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픈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일자리를 잃은 2명의 예멘인이 참석했지만 신분 노출을 우려해 카메라 앞에 서지 않았다.

공동행동은 이날 “정부는 ‘일자리 잠식’을 내세워 지침을 정당화하지만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강조했다. 건설업은 이미 내국인 노동자가 기피하는 업종일 뿐더러 난민신청자·인도적 체류자들은 건설업에서도 가장 고된 노동을 떠맡는다는 것이다.

이주민 사건을 지원하는 김승섭 노무사(노무법인 승리)는 “국내 젊은이들은 아무도 건설현장에서 일하지 않으려 해, 건설업 종사자 평균 연령이 60세에 이른다”며 “더구나 아파트 방수업무 등 이주노동자들에게 주어지는 일은 더 고되다”고 지적했다. 김어진 난민과손잡고 대표는 “정부가 외면하지만, 이주노동자가 한국경제에 기여하는 바는 크다. 한국이민정책연구원의 2017년 조사에 따르면 2016년 이주노동자들이 유발한 생산과 소비 효과는 80조에 이른다”고도 했다.

내부지침이 나온 절차도 도마에 올랐다. 이들은 “법이나 시행령, 시행규칙과 달리 내부지침 개정에는 공개 절차가 없다고 한다. 난민 생계가 걸린 중차대한 일이 밀실에서 결정됐다”며 “ 전체 내부지침 내용은 공개하지도 않는다고 한다”고 했다.

▲난민과함께공동행동과 이주공동행동은 8일 오전 서울 효자동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난민 건설업 취업 제한 법무부 내부지침 즉각 철회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난민과함께공동행동과 이주공동행동은 8일 오전 서울 효자동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난민 건설업 취업 제한 법무부 내부지침 즉각 철회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이들은 “그간 현 정부가 난민기피 정부였다면, 이 지침으로 ‘난민혐오’ 정부임을 확실히 했다”며 “정부 정책이 전체 사회의 이주민 혐오와 차별을 조장한다”고 비판했다.

임준형 이주공동행동 집행위원은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기여한 게 없다며 최저임금을 낮추자 했다. 한 지방자치단체장은 다문화가정 혐오 발언으로 문제가 됐고, 최근 이주민 여성 폭행영상이 퍼져 사회 공분을 일으킨다”며 “이주민에 대한 인종차별적 혐오는 이미 퍼졌지만, 정부의 이주민 혐오 정책이 근본적으로 이를 양산한다”고 했다.

참가자들은 이날 기자회견을 마친 뒤 청와대에 법무부 지침 철회를 촉구하는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미디어오늘은 이날 낮 1시30분께 법무부에 반론을 듣기 위해 이메일로 취재요청한 뒤 오후 3시 현재까지 답을 듣지 못했다. 법무부는 전화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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