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한국 e스포츠를 상징하는 게임이 블리자드의 ‘스타크래프트’였다면, 2010년대 한국 e스포츠를 상징하는 게임은 누가 뭐라해도 라이엇게임즈의 ‘리그 오브 레전드’(이하 LoL)이다. 스타크래프트 리그가 점차 황혼기에 접어들고, 후속작으로 출시된 ‘스타크래프트 2’의 e스포츠 리그가 여러 분쟁에 휘말려 정착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LoL은 빠르게 그 빈자리를 채워나가는 것에 성공했다. 동시에 기본적으로 함께 팀을 짜서 플레이하는 것이 원칙인 LoL은 PC방에서 친구와 함께 게임을 하는 것이 문화로 정착한 한국에서 더욱 인기를 끌 수 있었다. 블리자드의 ‘오버워치’, 카카오게임의 ‘배틀그라운드’ 등이 이 위세에 계속 도전하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 PC방 게임 순위의 맨 꼭대기에는 LoL이 있다.

그런 LoL에 무척이나 낯부끄러운 소식이 전해졌다. 문제의 발단은 라이엇게임즈의 한국 지사이자, 한국에서 LoL과 LoL e스포츠 리그 ‘리그 오브 레전드 챔피언스 코리아’(이하 롤챔스)를 관리·운영하는 라이엇코리아였다. 라이엇코리아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매주 진행되는 롤챔스에 대한 소식을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6월 25일 업로드 된 랭킹쇼 프로그램인 ‘김민아의 어떤 랭킹’이 문제가 되었다. LoL에 등장하는 캐릭터들과 그 캐릭터들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던 중, 그 캐릭터들이 실제 경기 시 성능이 미묘하다는 이유로 “이거 다 혜지”라는 발언이 나온 것이다. 프로그램에서 직접적으로 ‘혜지’라는 표현을 완전하게 표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금만 LoL을 비롯한 온라인 게임 전반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표현되어 있었다.

▲라이엇게임즈 제작 프로그램에서 여성 게이머를 '혜지'라고 표현한 영상. 해당 영상은 현재 삭제된 상태다.
▲라이엇게임즈 제작 프로그램에서 여성 게이머를 '혜지'라고 표현한 영상. 해당 영상은 현재 삭제된 상태다.

대체 왜 ‘혜지’라는 단어가 문제가 된 것일까. 아무리 봐도 ‘혜지’라는 말에는 게임과 관련된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지만, 놀랍게도 ‘혜지’라는 표현은 온라인 게임에서 ‘실력이 부족하면서, 게임을 잘 하는 다른 (남성) 게이머의 덕을 보는 여성 게이머’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2018년 디시인사이드 리그 오브 레전드 갤러리에서 ‘실력이 없는 여성 게이머’ 전반을 비하하며 여성 게이머에게 ‘혜지’라는 표현을 쓴 것이 게임 커뮤니티 전반으로 널리 퍼지며 어느덧 ‘혜지’라는 말은 여성 게이머나 프로게이머가 ‘여성 게이머’들처럼 실력이 없다며 공격하는 표현으로, 더 나아가서는 게임 내 성능이 부족한 여성 캐릭터 전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게임 내 심각한 수준의 여성 혐오가 담긴 유행어를 라이엇게임즈는 무분별하게 자사가 제작하는 공식 프로그램에서 사용했던 셈이다. 결국 라이엇게임즈는 빠르게 문제의 영상을 삭제했지만, 이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나 의견 표명은 없었다.

하지만 더욱 씁쓸한 것은 여성 게이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른 스포츠 장르에서도 비슷한 일이 종종 일어났지만, 여성 프로게이머들은 소위 ‘눈요기’ 취급을 벗어나지 못했다. 애시당초 e스포츠 리그에 여성부가 존속했던 역사가 길지도 않았지만, 가까스로 여성부 리그가 열릴 때에도 다른 프로게이머들은 물론 시청자나 팬들의 반응은 이들을 한 명의 ‘게이머’로 대하는 대신 ‘실력이 떨어지지만’ ‘잘 생긴’ ‘여성’ 게이머라는 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2000년대 초중반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로 활동한 서지수의 경우, 2005년을 끝으로 여성부 리그가 폐지된 이후 계속 프로게이머로 활동하기 위해 남성 프로게이머와 함께 경쟁을 해야만 했다. 비록 다른 강자에게 밀려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그보다 힘든 것은 서지수의 경기 결과에 대한 반응들이었다. 여러운 상황에서도 계속 꾸준히 승리를 거뒀지만, 서지수에게 가해진 이미지는 ‘지는 것이 당연한’ 선수였다. 서지수가 남성 프로게이머에게 이기는 것은 언제나 ‘이변’으로 취급받았고, 서지수에게 진 프로게이머는 한동안 조롱을 받아야만 했다.

▲ 2000년대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였던 서지수.
▲ 2000년대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였던 서지수. ⓒstx soul 

누군가는 여성 프로게이머들에 대한 이러한 취급이 그저 여성 프로게이머들의 전반적인 실력이 낮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강력한 실력을 지닌 여성 프로게이머라면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로울까. 현재는 중국의 프로게임단 ‘상하이 드래곤즈’에서 활동하고 있는 FPS 게임 ‘오버워치’의 김세연 프로게이머(닉네임 ‘게구리’)는 ‘여자 프로게이머’인데 무척이나 실력이 좋다는 이유로 부정 행위를 했다는 의심을 받아야만 했다. 몇몇 남성 게이머는 “혹시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게구리 집 앞에 칼 들고 찾아갈지도 모른다”는 등 협박성 발언을 남겼다.

다행히도 김세연 프로게이머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실력이 한치의 거짓도 없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나 실력이 뛰어난 여성 프로게이머가 주변에서 가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 ‘공개 실력 증명회’를 벌여야만 하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동시에 공개 증명을 하기 전 온갖 모욕과 협박성 발언을 남긴 이들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거나 사과하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자신이 보기에 그저 기분이 나쁘니, 무심코 돌을 던져 ‘게구리’를 죽이려는 행동을 벌인 셈이었다.

이는 비단 ‘프로게이머’라는 한정된 영역에서 그치지 않는다. 앞서 문제가 되었던 ‘혜지’가 일반적인 여성 게이머 전반을 모두 싸잡아서 부르는 멸칭인 것처럼, 이미 오래 전부터 게임 커뮤니티 내부에서 여성 게이머에 대한 취급은 바닥을 기었다. 대다수의 온라인 게임은 남성 위주로 굴러가는 상황에서 여성은 소위 ‘홍일점’이거나, 실력이 없는 ‘걸림돌’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같이 게임을 하는 동료들에게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들키기 싫어 음성 채팅을 할 때 일부러 남성 목소리처럼 들리게 음성을 변조한다는 이야기는 결코 인터넷에서만 돌아다니는 풍문으로 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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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 유튜버의 게임방송 화면 갈무리. 

여기에 2016년부터는 성우나 프로그래머, e스포츠 캐스터를 비롯한 게임 관계자가 페미니즘 지지 발언을 하면 ‘대다수 (남성) 게이머들의 심기를 거스른다’는 이유로 즉각적인 배제와 해고가 이뤄졌다. 한국 온라인 게임 내에서 여성은 철저히 상대화된 존재로 취급받았고, 그러도록 강제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역설적으로 게임 개발자와 팬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게임 질병코드’의 도입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더욱 힘을 주고 있다. 게임웹진 ‘인벤’이 지난 6월 5일 국회에서 열린 ‘게임 장애 질병코드 도입 관련 긴급 전문가 간담회’에서 이해국 가톨릭대 교수가 제출한 문서를 확인한 결과, 이 교수는 “한국 게임계는 인권 감수성이나 노동문제에 무관심”하며 “지나친 폭력성과 선정성, 인권 감수성 없는 콘텐츠에 무분별하게 노출되는 것이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는 과학적 근거를 굳이 제시하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다”며 게임 장애의 질병 코드 도입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했다.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를 쉽게 내치며 배제하는 움직임은 아이러니하게도 게임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자는 목소리를 더욱 키우고 있다.

이와 함께 여성 게이머들 또한 그저 차별과 혐오에 침묵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외치는 길을 선택했다. 지난 2016년 설립된 여성 페미니스트 게이머 단체 ‘페이머즈’(Famerz, 구 ‘전국디바협회’)가 대표적이다. 페이머즈는 게임 내 콘텐츠나 온라인 게임 내 다른 유저나 제작진이 가하는 여성 혐오에 항의하는 움직임을 펼치고 있다. 블리자드의 비주얼 디렉터 제프 카플란은 페이머즈에 대해 “자사가 게임을 통해 전하고자 한 ‘고정관념에 도전하라’는 가치를 실천하고 있는 단체”라며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금씩 세상이 변화하는 와중에도 어떤 이들은 과거 익숙했던 고정관념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 게임을 만들고 즐기는 자신들의 문제를 성찰하지 못하는 현실이 게임 자체를 수면 아래로 가라 앉게 만드는 진정한 ‘걸림돌’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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