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영 KBS 사장이 퇴장했다. 지난 21일 KBS 이사회는 고 사장 해임 제청안을 의결했다. 문재인 대통령 재가가 남았지만 시간문제일 뿐이다. 고 사장은 해임 건을 법정으로 가져갈 태세다. 2014년 길환영 전 KBS 사장 해임 사례에 비춰보면 무의미한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고 사장 퇴진이 KBS에서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그의 퇴진은 KBS라는 공적 자산을 사유화한 KBS 주류의 몰락을 의미한다. 지난 10년 동안 그는 보도국장, 보도본부장, 사장 등 요직을 꿰찬 ‘KBS 권력’이었다. 10년은 KBS가 ‘국민의 방송’이 아닌 ‘권력의 방송’으로 무너진 시간과 일치한다.

그는 ‘동원 정치’의 달인이었다. 2008년 정연주 전 KBS 사장을 몰아내는 움직임을 주도했던 KBS 정치부 기자들의 모임 ‘수요회’. 고 사장은 이 모임을 이끈 인물로 평가받는다. 내부의 정연주 퇴진 운동은 정치권력에 개입 여지를 제공했고, MB 정부는 2008년 8월 국가권력을 총동원해 정 전 사장을 해임했다. ‘MB 언론 특보’ 김인규 전 KBS 사장(현 경기대 총장)을 차기 KBS 사장으로 세우기 위함이었다. 그들 바람은 2009년 11월 현실이 됐다.

▲ 고대영 KBS 사장이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취재진과 KBS 기자들에 둘러싸여 회의장 출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진=전국언론노조 KBS본부
▲ 고대영 KBS 사장이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취재진과 KBS 기자들에 둘러싸여 회의장 출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진=전국언론노조 KBS본부
김 전 사장 재임 시절(2009년 11월~2012년 11월) KBS 주류 세력들은 수신료 인상에 사활을 걸었다. 방송통신위원회, 청와대, 국회 여·야 정치권, 보수 언론사 사주에 대한 로비를 김 전 사장이 지시하거나 직접 행했다. 핵심 실세였던 당시 고대영 보도본부장은 “오늘이라도 (정치부 기자들) 동원할게요”라고 1인자의 뜻을 적극 받들었다.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헌신해야 할 KBS 정치부 기자들이 자사 이익을 위해 도구화한 것이다. 

KBS 권력의 사유화는 2011년 6월 터진 민주당 도청 의혹 사건(KBS 기자가 수신료 논의를 하던 민주당 대표 회의실을 몰래 녹음해 그 내용을 한나라당 한선교 의원에게 전달했다는 의혹)의 시작이기도 했다. 수신료 인상 국면에서 KBS 주류 눈 앞엔 정치권력만 있었을 뿐 ‘국민’은 없었다. 

고 사장 재임 시절인 지난 2016년 KBS에는 또 하나의 사조직이 있었다. 그해 4·13 총선을 앞두고 정지환 KBS 보도국장(현 KBS대전방송총국장)을 중심으로 결성된 ‘KBS기자협회정상화추진모임’(정상화모임)이다. KBS 보도본부 간부들 100여 명이 성명을 통해 자사 보도를 감시하는 KBS 기자협회와 새노조 등을 공격·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안팎에서 ‘고대영 호위대’라는 비판이 제기됐지만 그들은 사내 편 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정치·경제·사회부, 법조팀 등 통상 기자들이 가고 싶어 하는 선호 부서가 있지 않나. 그런데 팀장이나 국회 반장 등은 철저히 본부장과 국장 등 정상화모임을 따르는 기자들로 채워져 있다. 배제와 차별이 보이는 명백한 선 긋기가 존재한다.”(정연욱 KBS 기자, 2017년 파업 중 오마이뉴스 인터뷰)

정연주 전 KBS 사장도 이들의 움직임에 대해 “(정상화모임의 경우) 4·13 총선 전 새누리당 장기 집권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에 부합하는 행동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라며 “이는 기회주의적인 행태”라고 일갈했다. 보수 정부·여당이 4·13 총선에서 패배하자 KBS 사조직 일원들의 목소리는 사그라들었다.  

▲ 140여일 동안 고대영 KBS 사장 퇴진을 위한 새노조 총파업을 이끈 성재호 위원장이 21일 KBS 이사회의 고대영 해임 제청안 의결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사진=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 140여일 동안 고대영 KBS 사장 퇴진을 위한 새노조 총파업을 이끈 성재호 위원장이 21일 KBS 이사회의 고대영 해임 제청안 의결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사진=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파업 투쟁에 나섰던 KBS 언론인들에겐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여전히 KBS 내부에는 고대영 체제에서 KBS 사유화에 앞장섰던 인사들이 있다. ‘적폐 인사’들이다. KBS 출신 최문호 뉴스타파 기자는 “100여 명이 KBS 보도를 움켜쥐고 특정 정파와 유착하고 있다”며 “모든 의사결정 과정을 장악하고 있다. 간부들이 지시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정부 비판 아이템들이 걸러졌다”(2016년 3월 미디어오늘 인터뷰)고 말했다. 

사내 주류에 저항했던 기자들은 좌천되거나 회사를 떠나야 했다. 뉴스타파 김용진 대표가 대표적이다. KBS 정상화를 바랐던 언론인들은 KBS 내부에서 남은 싸움은 마저 끝내야 한다. KBS 기자 출신 최경영 뉴스타파 기자가 “KBS엔 명확한 공범자들만 기백명이다. 고대영 해임이 다가왔는데도 KBS가 또 다른 내전에 들어갈 것임이 자명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시민들이 계속 끊임없이 지켜보고 감시해줘야 한다”고 말한 까닭이기도 하다. 김인규·고대영 체제에서 그러했듯 ‘과거 주류’들은 새로운 줄을 잡기 위해 하이에나처럼 권력 주변을 배회할 것이다. 

KBS는 국민의 방송이어야 한다. KBS 기자들은 정치권력이나 사내 권력의 도구가 되어선 안 된다. 동원 정치의 도구를 자처해선 안 된다. 방송법은 “KBS는 방송의 목적과 공적 책임, 방송의 공정성과 공익성을 실현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KBS 사유화는 애초부터 거론될 수 없는 것이다. 지난 10년은 당연한 것을 망각한 시간이었다. 공적 자산의 사유화를 뿌리 뽑는 KBS 정상화는 이제 막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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