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던 아들이 비참하게 살해를 당했다. 가해자들은 체포돼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었다. 재판이 거듭될수록 재판부에 신뢰를 잃어가던 아버지는 마침내 직접 ‘심판하리라’ 결심했다.

삶의 의지를 잃은 아버지는 암시장에서 수류탄을 구입, 재판정에 가서 그것을 터뜨렸다. 가해자 3명 중 한 명은 절명시키고 나머지는 부상을 입혔다. 자신도 목숨을 바쳤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과 재판부에 대한 절망감은 평범한 아버지를 ‘분노의 화신’으로 몰아갔다. 아들을 따라간 아버지의 법정폭탄사건은 최근 외신으로 전세계에 전해졌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일이다. 우크라이나는 경제선진국(OECD) 회원국 42개국 가운데 사법부 신뢰도가 꼴찌를 기록한 나라다. 국민 12%만이 사법부를 신뢰한다는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이지만 남의 나라일 같지 않다.

한국 역시 경제선진국 42개국 가운데 사법부 신뢰도 수준이 39위로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우크라이나 사이에는 딱 두 나라, 콜롬비아(26%), 칠레(19%)뿐이다. 한국 국민은 27%가 사법부를 신뢰한다고 답했다.  콜롬비아보다 1% 앞서고 있을 뿐이다.

OECD 전체 사법부 신뢰 평균치가 54%인 점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국민의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는 그 절반 수준인 셈이다. 그만큼 우리 국민의 절대 다수는 사법부가 사회 정의를 제대로 실현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 대법원 직원이 정의의 여신상 앞을 지나가고 있다. ⓒ 연합뉴스
▲ 대법원 직원이 정의의 여신상 앞을 지나가고 있다. ⓒ 연합뉴스
그러나 이런 국민의 사법부 불신에 대해 한국의 사법부는 다른 판단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국민이 오해하고 있거나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오판하고 있다고 부정하는 곳이 바로 한국의 사법부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전관예우’는 안된다고 주장해도 사법부는 그런 것은 없다고 강변한다. 신뢰 최하위 수준에 대해 수치스러움도 상실하고 검사, 판사,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심지어 대법원장도 딴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하다. 

국제사회에서 이 정도로 초라한 수준의 성적을 내는 분야는 사법부 외에는 드물다. 문제는 국제사회에서조차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한국의 사법부를 개혁하려는 개혁주체들은 개혁의지를 보이지 않거나 개혁한답시고 ‘셀프개혁’이나 내놓고 있다는 점이다. 국격에 걸맞는 사법부 신뢰회복을 이끌어내지 못하면 국민은 또 다시 실망과 좌절에 빠지게 될 것이다.

2007년부터 2014년까지 8년간 조사한 결과, 사법부 신뢰 상위 1~3위는 덴마크(83%), 노르웨이(83%), 스위스(81%)로 모두 유럽국가들이 차지했다. 핀란드 74%, 독일 67%, 인도 67%, 일본 65%, 호주 60%, 영국 60%, 미국 59% 등이다. 사법개혁 없이 선진국은 없다는 것이 수치로 입증된다.

촛불혁명으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지만 최근 대법원장과 현직 부장판사의 발언을 보면 기대보다 우려가 앞선다. 서울중앙지법이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 등 구속 피의자를 구속적부심에서 연이어 석방하자 국민적 불만이 높아졌다. 이에 김명수 대법원장은 지난 1일 정치권과 소셜 미디어에서 신광렬 부장판사에 대한 비난이 쏟아진 점을 우려하며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재판 결과를 과도하게 비난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는 헌법 정신과 법치주의 이념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했다.

▲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가 지난 9월12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청문위원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가 지난 9월12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청문위원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김 대법원장은 국민적 불만을 ‘정치적 이해관계’로 표현하며 ‘법치주의 이념’에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 불만, 비판을 ‘헌법정신과 법치주의 이념’이 아니라며 근엄하게 꾸짖었다.

김 대법원장의 발언은 법원 내부에서도 논란을 빚었다. 김동진 인천지법 부장판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반론을 제기했다. 김동진 부장판사는 “법관 생활 19년째인데 구속적부심에서 이런 식으로 하는 걸 본 적이 없다”며 “특정한 고위 법관이 서울시 전체의 구속 실무를 손바닥 뒤집듯이 마음대로 바꿔 놓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광렬 형사수석부장이 재판장인 서울중앙지법 형사51부가 최근 구속적부심에서 ‘정치 댓글 공작’ 혐의로 구속됐던 김관진 전 장관과 임관빈 전 국방정책실장 등을 “범죄 성립 여부에 다툼의 여지가 있다”며 연이어 석방한 것을 비판한 것이다.

김 부장판사는 김 대법원장 발언을 두고도 “(재판부의 석방 결정을) 비판하는 것이 왜 정치 행위라는 식으로 폄훼돼야 하는가”라며 “벌거숭이 임금님을 향해 마치 고상한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일종의 위선”이라고 비판했다.

누구 말이 맞는지 판단은 유보하더라도 이렇게나마 법원내부의 소통망이 살아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사법부 신뢰회복은 국민이 할 수 없다.

신뢰회복 주체는 판사, 대법관, 대법원장, 사법부 모두가 위기의식을 느끼고 발벗고 나서야 한다. 그런 움직임 없이 거꾸로 국민을 탓하는 대법원장의 발언은 현실감이 없어 더 큰 위기로 다가올 수 있다.

법은 상식의 집합체다. 상식선에서 법이 집행되고 그 대상에 가림이나 차별이 있어선 안된다. 1심 판결이 2심으로 가면 집행유예로, 감형으로, 솜방망이 처벌로 약화되는 것이 공식이어서는 안된다. 재벌 2·3세는 술을 마시고 변호사 뺨을 때리고 난동을 부리고 공공기물을 파손해도 기소유예, 집행유예, 선고유예를 받는 식으로 법의 특혜를 베풀어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국민을 향해 ‘개돼지’라고 모욕을 주고 계급의식을 강화하는 비뚤어진 고위교육공무원을 파면해도 사법부가 ‘봐주기식’으로 판결을 내리는 한 어떤 법리를 들먹여도 사법부의 신뢰는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검사, 판사들이 밟고사는 땅이 대중이 발을 딛고사는 땅과 같아야 하지 않을까. 선민의식이나 특권의식이 체질화돼 사고방식이나 현실인식이 국민과 동떨어져 있다면, 특권층과 어울리기만 한다면 법은 강자온정주의에 빠지고 신뢰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사법부 적폐청산, 개혁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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