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영화가 아니라 국가 권력이 동원된 과거 우리의 아픈 단면이었다는 것입니다. 법이나 국익에 따라 운영돼야 할 국가 정보기관이 독재 권력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진실은 결국 밝혀지고 마는 것입니다. 국가 권력이 저지른 일을 마냥 숨길 수만은 없다는 것이 이번 발표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됐습니다. (중략) 과거 국가 권력이 저지른 초법적 행위의 실체를 밝히는 작업에 소홀함이 있을 경우 정치적 논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과거사의 진실을 밝히자는 것은 어제를 올바르게 정리하고 내일로 나가자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서두르기보다는 실체에 보다 가깝게 가려는 노력이 우선돼야 합니다.”

2005년 5월28일 고대영 KBS 해설위원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 사건에 대한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진실 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 조사 결과 발표를 두고 이처럼 평했다. 그는 “국익에 따라 운영돼야 할 국가 정보기관이 독재 권력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고 지적했고 “진실은 결국 밝혀지고 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과거 국가 권력이 저지른 초법적 행위의 실체를 밝히는 작업에 소홀함이 있을 경우 정치적 논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다”며 진상 규명 의미를 강조했다. 당연하고 상식적인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발언이 현재 MB 국정원과의 유착 의혹을 받고 있는 고대영 KBS 사장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생경할 따름이다.

▲ 2005년 5월28일 고대영 KBS 해설위원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 사건에 대한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진실 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 조사 결과 발표를 두고 “국익에 따라 운영돼야 할 국가 정보기관이 독재 권력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고 지적했고 “진실은 결국 밝혀지고 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진=KBS
▲ 2005년 5월28일 고대영 KBS 해설위원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 사건에 대한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진실 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 조사 결과 발표를 두고 “국익에 따라 운영돼야 할 국가 정보기관이 독재 권력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고 지적했고 “진실은 결국 밝혀지고 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진=KBS
불과 4년 뒤인 2009년 5월, MB 정부 국정원은 ‘고대영 보도국장 협조’라는 문건을 작성했다. 문건 내용을 요약하면, 국정원에서 고대영 당시 KBS 보도국장에게 △안보 관련 KBS 기자 취재 분위기 파악 △남북 관계, 국익 저해 보도 자제 △국정 운영 지원 보도 등을 요구했고 그 대가로 200만 원을 지급했다는 내용이다.

국정원이 고 사장에게 요청한 비보도는 “원세훈 국정원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뇌물 수수 혐의를 수사 중인 검찰 고위층에 노 전 대통령을 불구속 기소할 것을 종용한 것으로 알려졌다”(2009년 5월7일자 조선일보)는 내용의 국정원의 검찰 수사 개입 의혹이었다.

고 사장은 지난 10일 국회 KBS 국정감사에 출석해 “(200만 원을) 받지 않았다”고 국정원 금품 수수 의혹을 부인했으나 KBS 담당 국정원 IO(Intelligence Officer·국내 정보 담당관)였던 이아무개씨, 당시 이종태 국정원 대변인과의 만남은 시인했다.

국정원과 고 사장의 부적절한 유착 의혹은 ‘노무현 전 대통령 뇌물 수수 의혹’ KBS 보도로도 이어졌다. KBS ‘뉴스9’은 2009년 4월22일 “회갑 선물로 부부가 억대 시계”라는 리포트를 톱뉴스로 내보냈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노 전 대통령 부부에게 2억 원 상당의 명품 시계를 선물했다는 것이다.

고가 시계 수수 건은 국정원의 ‘언론 플레이’로 활용됐다.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는 지난달 23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 측근이 2009년 4월21일 노 전 대통령 수사를 담당했던 이인규 당시 대검찰청 중수부장을 만나 “고가 시계 수수 건 등은 중요한 사안이 아니므로 언론에 흘려서 적당히 망신 주는 선에서 활용하시고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불구속으로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말한 사실을 공개했다. 

KBS 보도 소스(출처)가 국정원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던 이유였다. 하지만 국정원 개혁위에 따르면, ‘명품시계 수수’ 기사를 최초 보도한 KBS 기자는 보도 출처에 대해 확인을 거부했다.

KBS·SBS 등 언론사 보도 배후에 국정원이 있었다는 의혹은 이인규 전 중수부장을 통해서도 재차 확인됐다. 이 전 부장은 지난 7일 기자들에게 보낸 입장문을 통해 “2009년 4월22일 KBS ‘시계 수수 사실’ 보도, 5월13일 SBS ‘논두렁 시계’ 보도가 이어져 국정원 소행이라고 의심하고 나름대로 확인해 본 결과 그 근원지가 국정원이라는 심증을 굳히게 됐다”고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고 사장이 노 전 대통령 보도와 관련해 국정원 유착 의혹을 받는 까닭은 그가 이 사건 ‘소스’를 직접 확인했다고 발언했기 때문이다.

▲ 기자는 지난달 26일 오전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실에서 열린 KBS 국정감사에 출석한 고대영 KBS 사장(왼쪽)에게 국정원 금품 수수 의혹 등에 대해 물었으나 답변을 받지 못했다. 사진=민중의소리
▲ 기자는 지난달 26일 오전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실에서 열린 KBS 국정감사에 출석한 고대영 KBS 사장(왼쪽)에게 국정원 금품 수수 의혹 등에 대해 물었으나 답변을 받지 못했다. 사진=민중의소리
고 사장은 2009년 7월31일 보도 실무자와 책임자가 KBS 보도에 대해서 논하는 ‘보도위원회’에서 노 전 대통령 시계 수수 보도에 대한 추궁이 이어지자 “내가 사이드(side)로 취재를 해봤다”며 “내가 이미 소스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고 발언했다. 

고 사장은 지난 10일 국감에서 ‘사이드’가 누구냐는 신경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질의에 “검찰 측에 내가 물어봤다”며 소스를 국정원이 아닌 ‘검찰’을 지목했고 “기자가 취재원 밝혀야 하느냐. 취재원은 밝힐 수 없다”면서 국정원과의 유착 의혹을 부인했다.

2005년 고 사장은 “국가 권력이 저지른 초법적 행위의 실체를 밝히는 작업에 소홀함이 있을 경우 정치적 논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다”며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작 고 사장은 자신의 의혹에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도리어 고대영의 KBS는 지난달 30일 국정원을 상대로 1억 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고 사장을 비호하는 KBS 야권 이사들은 국정원 금품 수수 의혹 진상을 규명해보자는 여권 이사들의 요구를 외면하고 있다. “실체에 보다 가깝게 가려는 노력이 우선돼야 합니다.” 12년 전 고대영 해설위원 발언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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