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정부 당시 MBC 담당 국가정보원 직원 ㄱ씨는 문재인 정부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사장님은 지금 들어가시면 못 나올 수 있습니다. 이제라도 방송 장악은 누구 지시였는지 말씀해주십시오.”

MB 정부 국정원과 공모해 MBC 방송 제작·편성에 불법적으로 관여한 혐의를 받고 있는 김재철 전 MBC 사장. 지난 6일 그가 ‘방송장악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출석, 취재진과 일문일답을 마치고 청사로 들어갈 때 그의 뒤통수에다 대고 기자가 한 말이었다.

‘김재철은 원세훈을 직접 만난 적 있을까’(김인규 전 KBS 사장에 따르면, 김재철 전 사장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크게 무서워했다고 한다), ‘방송장악 몸통 MB는 어느 수준으로 보고를 받았던 걸까’, ‘방송장악에 방송문화진흥회(MBC 대주주)는 어떻게 개입했을까’, ‘이에 가담했던 MBC 임원들은 국정원의 개입 사실을 어느 정도까지 파악하고 있을까.’

▲ MB 정부 국가정보원과 공모해 MBC를 장악한 혐의를 받는 김재철 전 MBC 사장이 지난 9일 오전10시36분경 영장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 MB 정부 국가정보원과 공모해 MBC를 장악한 혐의를 받는 김재철 전 MBC 사장이 지난 9일 오전10시36분경 영장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가 지난 9월 MBC 장악 시나리오가 담긴 국정원 작성 문건인 ‘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 방안’을 일부 공개한 뒤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기자는 김 전 사장에게 “지금 들어가시면 못 나올 수 있다”고 말했지만, 김 전 사장에 대한 구속영장은 10일 기각됐다. 법원은 “사실 관계에 대한 증거가 대부분 수집됐고 피의자(김재철)의 직업 및 주거 등에 비춰 도망의 염려가 크지 않다”고 밝혔다. 

영장 기각 이후 법원만큼이나 국정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컸다. 최승호 MBC 해직 PD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국정원 적폐청산 TF는 국정원 서버에 독자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보기관이니 여러 제약이 있겠지요. 그러나 그 결과가 말로만 청산이 돼서는 곤란합니다. 김재철 영장 기각이 국정원이 충분한 자료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지 걱정입니다. 국정원 정보관이 MBC 인사들을 접촉했다는데, 당연히 접촉보고서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증거들이 검찰에 전달된 것 같지 않습니다. 서훈 국정원장에게 과연 적폐청산 의지가 있는지 물어야 할 때가 됐습니다.”

실제 국정원이 언론에 조사 결과를 공개하고 검찰에 수사 의뢰한 뒤에도 상당 기간이 지나서야 검찰에 관련 자료를 보내는 등 개혁에 미온적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서두에서 언급한 MB 정부 MBC 담당 국정원 직원 ㄱ씨는 현재 국정원 ‘총무관리국장’을 맡고 있다. 국정원 인사와 예산을 담당하는 기획조정실에서 핵심 보직으로 꼽힌다.

검찰은 어렵게 ㄱ씨를 소환해 조사했고, ㄱ씨는 전영배 당시 MBC 기획조정실장 등을 만나 ‘국정원 입장’을 전달한 사실은 인정했지만 언론장악 공작 기획엔 가담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임찬종 SBS 기자는 지난달 ‘취재파일’을 통해 “검찰은 A국장(ㄱ씨)에 대해서 형사적 책임을 물을지 여부를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며 “A국장의 주장대로 정보관으로서 당시 국정원의 입장을 MBC 경영진 측에 단순히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면 형사적 책임을 묻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정원 개혁위 발표만으로 ‘MBC 장악’ 실체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고 검찰 수사 역시 ‘김재철 영장 기각’으로 한 차례 발목이 잡힌 상태. 하지만 MBC 방송장악에 대한 증언들은 계속 나오고 있다. 

전직 방문진 고위 관계자는 최근 방문진 한 인사에게 “MB정부 이후 방문진 이사장들이 서랍 속에 두툼한 문서를 숨겨두고 봤다. 특히 MBC 간부들을 개인적으로 잘 모르는 경우 그 문서를 힐끗 보고 어떻다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국정원에서 받아온 문건으로 보였다. 이사장이 바뀔 때는 국정원에서 새로 전달하는 듯 했으나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눈치를 챈 이는 거의 없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김우룡·김문환 등 전직 방문진 이사장들은 ‘국정원의 방송장악’에 개입한 적 없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이번 사안의 핵심 고리인 ㄱ씨는 기자와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 

▲ 고대영 KBS 사장이 지난달 26일 오전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KBS 국정감사에 출석했다. 이재석 KBS 기자(왼쪽)가 고 사장에게 국정원 금품 수수 의혹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고대영 KBS 사장이 지난달 26일 오전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KBS 국정감사에 출석했다. 이재석 KBS 기자(왼쪽)가 고 사장에게 국정원 금품 수수 의혹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MBC뿐 아니다. 고대영 KBS 사장이 2009년 보도국장 시절 국정원의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개입 보도를 비보도하는 대가로 국정원으로부터 200만 원 수수했다는 의혹 역시 ‘진실 공방’ 수렁에 빠져 있다.

지난달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가 “2009년 5월 KBS 담당IO(Intelligence Officer·국내 정보 담당관)가 KBS 보도국장을 상대로 불보도 협조 명목으로 현금 200만 원을 집행한 것에 대한 예산 신청서·자금 결산서 및 담당 IO 진술을 확보했다”고 발표하자 고 사장은 극구 부인했고 도리어 KBS를 통해 국정원 상대로 1억 원 손해배상 청구 소송까지 제기했다. 

이 건으로 고 사장을 국정원법 위반, 수뢰 후 부정처사, 방송법 위반 등으로 검찰에 고소한 뒤, 지난 3일 고소인 조사를 받은 성재호 언론노조 KBS본부장은 “검찰은 국정원과 관련한 적폐를 철저하게 수사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국정원에서 자료들이 넘어오지 않았다”며 “KBS와 MBC의 경우 2009~2011년 자료가 조금 있는 것인데 국정원이 마지못해 몇 조각 내놓은 것을 짜 맞춰서 검찰이 수사하느라 애를 먹고 있다. 국정원이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비는 게 적폐 청산인데 그러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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