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의 페이스북 글을 필자의 동의를 얻어 전재합니다. 우라까이는 베껴쓰다는 의미로 흔히 쓰는 언론계 속어로 일본말 '우라가에스(裏反す, 뒤집다, 계획을 변경하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른 표현은 아니나 필자의 의도를 살리기 위해 부득이하게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편집자 주.

JTBC를 제외한 모든 언론사의 기자들은 지금 기분이 묘할 거다. (물꼬를 튼 TV조선은 약간 다를 수도 있겠다) 부러움, 호승심, 열패감, 회사에 대한 불만 등등이 복잡하게 교차할거다. (나도 그랬었다. 남에게 그런 감정을 심어준 자랑스러운 기억은 거의 없고 내가 그런 감정을 가진 기억은 많다.)

다음은 그런 언론인들에게 전하는 글이다.

벤자민 브래들리라는 사람이 있다. 내가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와 저런 인생은 정말 부럽다”는 느낌을 받은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보스톤 명문가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해군장교로 2차대전에 참전했다. 여러 인연이 겹치는데다가 집도 이웃이라 존 F 케네디의 절친이었다.

본인이 기자였고 1965년부터 1991년까지는 워싱턴포스트(WP) 편집국장을 지냈다.(그 밑에 부장, 부국장은 어쩔--;;) 브래들리가 편집국장을 지내는 동안 WP는 17개의 퓰리처상을 받았다. 2013년 버락 오바마로부터 ‘대통령 자유메달’을 받았고 2014년, 무려 9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벤자민 브래들리는 1995년 'A good life : Newspapering and Other Adventures'라는 회고록을 썼다. 이 책은 프레시안북스에서 '워싱턴포스트 만들기'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됐다. 당연히 나는 '워싱턴 포스트 만들기'를 읽었다.

이 책에 “우리는 문단을 바꿀 때마다 ’뉴욕타임즈(NYT)에 따르면‘이라고 쓸 수 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우리 눈에만 보이는 피가 흘렀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내 생각엔 우라까이의 슬픔을 읊은 이 대목이 이 책의 절창(絶唱)이다.

이건 1971년 NYT의 펜타곤 보고서 특종 보도와 연관된 이야기다. 로버트 맥나마라가 국방장관으로 재직중인던 1967년(그러니까 민주당 정부 때) 지시해서 만든 베트남 전쟁 관련 종합 보고서 작성에 관여했던 랜드연구소 연구원 대니얼 엘즈버그가 MIT로 이직한 후 NYT기자 닐 시한에게 통째로 넘겨준 것. 통킹만 사건의 진실이 보도된 바로 그 보고서다.

이에 대해 벤자민 브래들리가 “NYT는 그 보고서 한 부를 입수해 10여 명의 민완기자와 에디터를 석달동안 투입한 끝에 10여 개의 꼭지 기사를 만들어냈다. WP는 그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경쟁지 기사를 베껴 쓰는 창피스러운 입장이었다”며 ‘안 보이는 피’를 언급한 것.

그 이후 스토리도 박진감 넘친다. 민주당 정부 일이라고 고소해하며 손 놓고 있던 닉슨 정부가 “이건 아닌데” 싶어 개입했고 법무장관(아시다시피 미국 법무장관은 우리로 치면 검찰총장) 존 미첼이 법원의 허가를 득해 NYT에 보도를 중단하고 자료를 국방부에 넘기라고 명령한다. NYT가 주춤하는 사이 WP도 보고서를 얻어 닷새 뒤부터 독자 보도 대열에 합류한다.

하지만 법무부는 WP에도 동일한 명령을 내린다. 이 때 장면이 아주 박진감 넘치는데, 사실 워터게이트 보도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보다 덜 하다.

WP 사내에선 일대 혼란이 벌어진다. ‘정부 말 안 들으면 3500만 달러 증자 일정이 무산될 수 있다, 보유하고 있는 3개 TV방송국 면허가 취소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 격론이 벌어지는데 처음엔 반대하던 이사회 의장 프리치 비비(변호사)는 결국 “나는 (보도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물러선다. 사주인 케서린 그레이엄이 최종 결단을 내릴 차례. 침묵하던 케서린 그레이엄이 “좋다, 가자, 기사를 싣자”! (미드 뉴스룸의 사주 레오나 렌싱-제인 폰다-은 누가 봐도 케서린 그레이엄에서 따온 캐릭터다.)

NYT와 WP는 보도에선 경쟁을 했지만 정부와 법정투쟁에선 연대했다. 15일 간 법정투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연방대법원. 1971년 6월 30일 사전억제 명령 사건(prior-restraint case) 재판에서 연방대법원은 6대3 다수결로, 수정헌법1조의 정신에 따라 양 신문사는 보고서를 다시 게재할 수 있고 이 보고서의 공표를 제한하기 위한 연방정부의 주장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렇게 보면 이듬해 WP의 워터게이트 특종 사건은 같은 맥락이다. NYT의 단독보도, 물 먹은 경쟁사 WP의 절치부심, 그리고 탐사보도/정부 문건 폭로의 공간이 넓어졌음을(국익? 그게 뭔데? 먹는 건가?) 확인한 법원의 판결에 ‘터 잡은’(우병우 수석만 잘 쓰는 말인 줄 알았는데 얼마 전에 보니 문재인 전 대표도 쓰더만, 법조인들이 주로 쓰나보지) 금자탑이다.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들이 아니란 이야기.

그래서 하는 말인데, NYT가 될 기회를 놓쳤다고 실망마라. WP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아직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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