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사실로 밝혀진 게 없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 내용은 당사자들이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언론에게 중요한 건 사실확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새누리당이 워딩을 만들면 받아쓰고, 확대재생산하기 바쁘다. 훗날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더라도 대중에게 인식되는 건 ‘의혹제기’그 자체일 가능성이 크다. NLL포기 논란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발단은 송민순 전 장관의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의 한 대목이다.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2007년 UN 대북인권결의안 표결 준비 과정에서 송민순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은 ‘찬성’입장을 밝혔지만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이 남북 채널을 통해 북한 의견을 확인해보자고 제안했다.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이 김만복 국정원장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북한으로부터 쪽지를 받은 후 기권을 결정했다.

사실관계 확인 안 됐는데, 기정사실화

그러나 회고록 내용이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당사자들이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재정 당시 통일부장관(경기도 교육감)과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은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이다. 김경수 당시 청와대 연설기획비서관(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기권 결정 후에 북에 통보했다”면서 “쪽지는 통상적인 주변국 동향보고”라고 밝혔다.

언론은 일각의 주장을 사실로 전제했다. 지난 16일 TV조선 ‘이봉규의 정치옥타곤’에서 황장수 미래경영연구소장은 “UN 결의안을 북한에 물어본다, 그러면 북한이 싫어하는 일들을 전부 북한에 물어보고 결정을 하는게 이게 나라입니까?”라고 비판했다. 지난 15일 ‘이봉규의 정치옥타곤’에서 민영삼 사회통합전략연구원장은 “적성 국가에게 니들 어떻게 해줄까라고 물어본다? 애들도 병정놀이 할 때 이러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19일 MBC 뉴스데스크는 “북과 ‘기권’ 교감…미엔 막판 통보?”에서 “UN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과 관련해 노무현 정부는 문의였든 통보였든 사전에 북한과 접촉했다”면서 사전접촉이 사실인 것처럼 단정했다. 

▲ TV조선 '이봉규의 정치옥타곤'(10월15일), TV조선 '뉴스를 쏘다'(10월14일) 화면 갈무리
한쪽 워딩만 퍼나르기

이병호 국정원장이 19일 국정감사에서 한 말이 왜곡됐으나 언론은 받아썼다. 새누리당은 김만복 전 국정원장이 북한입장을 묻자고 했는지 이병호 국정원장에게 물은 결과 “맞다”는 답을 들었다고 발표했지만 더불어민주당이 반발해 회의록을 열람한 결과 “맞다고 본다”는 사견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TV조선 뉴스쇼판은 19일 “이병호 국정원장은 ‘송민순 회고록’이 진실에 가깝다고 밝혔다”고 보도했고 민주당의 반론은 언급되지 않았다. KBS 뉴스9는 “국정원장 ‘회고록, 진실이 있다는 느낌’”으로 MBC 뉴스데스크는 “상상할 수 없는 일…‘쪽지’ 존재 확인 중”으로 국정원장과 새누리당 입장을 부각했다.

인권결의안 기권하면 종북? 생략된 ‘맥락’

종편은 사전접촉 논란 외에도 대북 인권결의안에 기권을 한 참여정부를 도마에 올렸다. 지난 14일 채널A ‘김승련의 뉴스TOP10’에서 여상원 변호사는 “인권에 관한 문제를 타협의 대상으로 놓았다”면서 “우리가 친일파 욕할 자격이 없다. 통탄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 14일 TV조선 ‘최희준의 왜’에서 황장수 미래경영연구소장은 참여정부 일부 관료를 우회적으로 “북한의 대리인 비스무리한 사람들”이라고 지칭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에는 중요한 맥락이 빠졌다. 우선, 당시 남북관계를 현재 기준으로 단정하면 안 된다. 2007년 대북인권결의안 표결은 10.4선언 직후에 추진된 것으로 남북관계 개선이 되던 때다. 참여정부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북한에 우호적인 모습을 여러차례 보인 것도 이 때문이다. 참여정부가 무조건 기권만 한 것도 아니다. 앞서 2006년 북한이 1차핵실험을 강행하자 참여정부는 인권결의안에 찬성했다. 매년 UN이 대북인권결의를 했지만 실제 북한 인권개선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참여정부 때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던 유시민 작가는 지난 20일 JTBC ‘썰전’에서 “북한인권결의안을 통과시켜도 북한 주민의 실질적 인권개선은 어렵다. 북한의 인권은 북한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면서 “우리는 특수 관계이기 때문에 국제 사회와는 다른 방식으로 북한의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그게 햇볕정책의 핵심”이라고 밝혔다. 참여정부는 햇볕정책을 통해 북한 경제를 활성화시키면 인권이 개선될 것이라고 본 것으로 북한 인권개선을 위한 방법론이 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출처없는 수상한 단독

익명의 소식통을 통해 나오는 수상한 단독보도들도 있다. 지난 19일 MBN은 뉴스8에서 “[단독] ‘쪽지는 국정원 보관’”, “[단독] ‘쪽지 문구가 증거’” “북의 ‘반말쪽지’를 잇따라 내보냈다. 이병호 국정원장도 ”쪽지의 존재여부에 대해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겠다“고 밝힌 상황에서 MBN은 북한이 인권결의안에 대해 입장을 밝히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전달한 쪽지가 국정원에 있다고 단정하는 보도를 내보냈다. 

보도를 살펴보면 수상한 대목이 있다. MBN은 “정보 소식통에 따르면 당시 북한에서 온 쪽지는 존재하고 있으며 국정원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보도했을 뿐 정작 쪽지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는다. 보도에 나온 쪽지 내용은 송민순 전 장관의 회고록을 발췌한 것이다.

▲ MBN의 북한 쪽지 관련 보도. 정체불명의 정보통이 취재원이다.
대개 이런 정보를 제공한 소식통을 인용한 보도가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더군다나 그 소식통이 국정원에 있는 문서의 존재 여부를 안다는 점은 국정원 관계자일 가능성이 높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간 ‘논두렁 시계’ 보도는 국정원발 조작이었다. 동아일보가 단독보도한 ‘유우성씨 간첩사건’ 역시 국정원발 정보를 받아 쓴 것으로 재판을 통해 조작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최순실은?

송민순 회고록 논란이 벌어지면서 공영방송과 종편이 보도공세에 나선 이후 최순실 의혹에 대한 보도가 묻히고 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이 지난 14일부터 20일까지 지상파, 종편, 보도채널 등 9개 방송 메인뉴스 보도량을 비교한 결과 송민순 회고록 논란은 197건, 최순실 보도는 139.5건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JTBC 뉴스룸(41건)을 제외하면 최순실 관련 보도량은 98.5건에 불과하다. 특히, MBC 뉴스데스크는 송민순 의혹관련 보도를 12건이나 내보낸 반면 최순실 관련 보도는 4.5건에 그쳤다. 

시사토크 프로그램 역시 집중포화를 했다. 민언련에 따르면 지난 14일부터 17일까지 방영된 종편, 보도채널의 시사토크 프로그램 (중복 포함) 65편 중 45편이 송민순 회고록 논란을 다루는 등 올인하는 모습을 보였다. 

참고자료: 송민순 회고록 논란 관련 민주언론시민연합 ‘시사토크 프로그램 모니터보고서’, ‘방송뉴스 모니터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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