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9일 한겨레 토요판에 실린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과 박성민 정치컨설팅민 대표의 대담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다.

박성민 대표는 “안철수는 대통령 후보가 될 가능성과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합이 100%의 관계에 있다”고 분석했다. 대통령 후보가 될 가능성이 낮지만 일단 후보가 되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고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면 정작 대선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의미다.

박 대표의 제안은 안철수가 앞장서서 선거구제 개편과 결선투표제 도입을 제안하고 그걸 받겠다는 후보와 손을 잡으라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이하 직책 생략)가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그렇지만 안철수와 손을 잡는 정당과 후보는 당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박 대표의 제안은 안철수가 더불어민주당 뿐만 아니라 새누리당과 손을 잡을 가능성까지 열어둔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선거구제 개편과 결선투표제 도입은 그동안 안철수가 강조해 왔던 ‘새 정치’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대권 주자로서 영향력을 높이면서 최소한 킹메이커로서 존재감을 확보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물론 안철수가 그 정도 정치적 식견과 배포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 안철수는 2011년 6월 박원순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했다. 사실 그 때가 안철수의 대중적 지지도는 피크였다.

이 대담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또 있다.

“안철수는 지금 자신이 왜 정치판에 나왔는지를 잊은 것 같다. 사람들이 그를 불러낸 것은 정치를 배우지 말고 바꾸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시니어들과 모여서 뭐를 해보려고 하면 기회는 없다고 본다. 젊고 새로운 사람들과 해야 한다. 어설프더라도 정치를 바꾸려고 해야 한다. 그러자면 이탈리아 오성운동처럼 운동을 해야 한다. 지금 방식은 아니다.”

정치 혐오에서 출발해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으로 탄생한 오성운동은 언뜻 안철수가 주창했던 ‘새 정치’와 비슷해 보이지만 지금의 국민의당과는 결이 많이 다르다. 안철수를 왜 불러냈는지 잊은 것 같다고 지적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먼저 오성운동의 창시자는 베페 그릴로라는 코미디언이다. 오성운동의 오성(五星)은 공공수도(물)과 지속가능한 교통수단, 지속가능한 개발, 인터넷 접속권, 그리고 생태주의다. 시민 참여정치를 강조하면서 3선 금지를 법제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정치혐오에 뿌리를 둔 것도 중요한 포인트다. 재선까지 하고 나면 정치판을 떠나라는 극단적인 주장이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이런 공약이 먹혔고 폭발적인 변화를 끌어냈다.

코미디언 시절부터 신랄한 정치 풍자로 유명했던 베페 그릴로는 “우리 모두 청소부가 돼서 우리 사회 쓰레기들을 쓸어버리자”는 등의 선동적인 구호를 내걸고 유권자들을 끌어들였다.

▲ 이탈리아 오성운동의 베페 그릴로(왼쪽)와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오른쪽).
오성운동의 포퓰리즘 전략은 언뜻 안철수가 국회의원 정원 축소와 세비 삭감 등의 공약을 내건 것과 비슷하지만 베페 그릴로가 독자적으로 정치세력화에 성공한 것과 달리 안철수는 민주당과 손잡고 새정치국민연합을 창당했다가 탈당해서 다시 더불어민주당 탈당파들을 끌어모아 국민의당을 창당했다. 기성 정치를 바꾸기 보다는 기성 정치의 한 부분이 된 것이다. 오성운동이 생활 밀착형 공약으로 유권자들을 끌어모은 것과 달리 안철수는 아직까지 4년이 넘도록 ‘새 정치’의 실체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진순 와글 대표 등이 최근 펴낸 단행본,  ‘듣도 보도 못한 정치’에는 이탈리아 오성운동과 스페인의 포데모스, 스페인의 아다콜라우 등  대안 정치 운동의 다양한 실험 사례가 소개돼 있다.

이 책에서는 오성운동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좌파니 우파니 하는 이념적 성향을 기준으로 정당을 결성하지 않았다. 이념이 아니라 이슈를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했다.
둘째, 기존의 정치적 메커니즘과 과감하게 단절했다. 3선 금지와 전과자의 입후보 금지 등이 대표적인 원칙이었다. 심지어 TV 토론 프로그램 출연을 금지해서 이를 어긴 후보가 제명되는 사건도 있었다.
셋째, 모든 소통과 의사결정 과정을 온라인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했다. 후보자 선출과 선거 유세도 모두 온라인으로 공개적으로 진행됐다.

오성운동은 2013년 총선에서 상원 의석의 24%, 하원 의석의 25%를 차지해 명실상부한 제1 야당으로 부상했다.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는 오성운동 소속의 비르지니아 라지가 로마 시장에 당선돼 파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2018년 총선에서는 정권 교체도 기대해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스페인의 포데모스도 정치혐오에서 출발했다는 건 비슷하다. 포데모스(podemos)는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로스 인디그나도스’ 행진이 모태가 됐다. 로스 인디그나도스(los indignados)는 ‘분노하는 사람들’이란 말이다. 2011년 5월15일 마드리드의 푸에르타 델 솔(태양의 문) 광장을 점거하면서 15M 운동이라고도 부르고 나중에 ‘오큐파이(occupy, 점령하라) 월스트리트’ 운동의 원조로 평가된다. 포데모스는 지난해 12월 스페인 총선에서 국민당(PP)와 사회노동당(PSOE)에 이어 3위에 올랐다. 지난해 5월 지방선거에서는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좌파연합 후보를 당선시키기도 했다.

▲ 포데모스를 이끄는 잘 생기고 똑똑한 데다 젊은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사진=위키미디어, 위키커먼즈.
오성운동의 베페 그릴로가 포퓰리스트라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과 달리 포데모스를 이끄는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는 학벌과 외모, 달변 등 스타성을 갖춘 ‘정치 아이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78년생으로 젊고 잘 생긴 데다 철학과 정치학, 영화, 심리학을 두루 전공해 웬만한 주제로 ‘말발’이 꺾이지 않고 TV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 활동하면서 대중적 인기도 확보했다.

‘듣도 보도 못한 정치’에서는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를 “기름기 쫙 빼고 청바지에 꽁지머리 차림으로 다니는 풋풋한 이미지까지 매력적인 정치 아이돌이 돌 만한 조건을 두루 갖춘 인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의 매력도 중요하지만 포데모스의 운영 방식도 매우 독특하다. 포데모스는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시민총회(Asamblea Ciudadana)와 시르쿨로(Circulo)라고 부르는 오프라인 지역모임과 당무 기구로 구성된다.

첫째, 후보 선출과 선거 공약 입안 등의 논의는 모두 시민총회를 거친다.
둘째, 시르쿨로는 공개 회합의 형태로 진행되는 자치 조직으로 토론 주제도 참가자들이 직접 정한다. 지역별로 주제별로 전국에 1000개가 넘는 시르쿨로가 운영되고 있다.
셋째, 당무 기구의 모든 당직자들을 당원들이 직접 투표로 선출한다는 것도 중요한 차이다.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를 비롯해 집행부 26명은 모두 ‘아고라 보팅’이라는 온라인 투표를 통해 선출됐다. “다양한 시민들의 요구를 포괄하고 정당의 주요한 의사 결정과 후보 선출을 시민 주도로 진행한다”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의 모태가 된 스페인의 포데모스. 사진=위키미디어, 위키커먼즈.
눈여겨 볼 대목은 오성운동과 포데모스가 디지털 미디어를 직접 민주주의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 혐오는 사실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한다. 포데모스는 월스트리트 시위에서 처음 등장한 루미오(loomio)를 토론과 의사 결정에 활용했다.

루미오는 투표와 댓글이 결합된 이른바 ‘협력적 의사 결정(collaborative decision-making) 서비스’로 세계적으로 일상의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디어 이론가 더글러스 러시코프는 “루미오는 양극단으로 치닫는 논쟁 대신 온라인을 통해 원만한 합의에 도달하도록 유도한다”고 평가했고 정치 웹사이트 테크프레지던트의 편집위원인 미카 시프리는 “루미오는 개인의 의견이 집단적인 결정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적절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고 추천하기도 했다.

▲ 합리적 의사 결정 서비스를 표방한 루미오.
루미오 뿐만 아니라 브리게이드나 데모크라시OS, 오픈미디스트리 등 다양한 토론 툴이 공개돼 있다. ‘듣도 보도 못한 정치’에서는 소셜 네트워크가 정치 혁명의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도구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강조한다. “기술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는 있지만 그 기저에 있는 사회적 관계가 변화하지 않으면 그 잠재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한 마디로 기술은 거들 뿐, 디지털 미디어가 소통과 토론, 참여로 이어지지 않으면 변화를 끌어낼 수 없다는 지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영국 에버딘대 사회학과 플레셔 포미나야 교수는 “디지털 미디어는 시민운동의 취지를 반복해 전하고 증폭시키는 역할은 할 수 있지만 신뢰와 연대, 상호호혜의 집단행동 네트워크를 대체할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소셜 미디어는 중요한 도구지만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위해 활동가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운동 양식과 커뮤니케이션 도구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소셜 네트워크의 확산으로 고대 그리스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직접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정보의 독점과 불균형도 크게 개선됐고 사회적 차원의 수평적인 의사소통도 가능하게 됐다. 낡은 정치에 대한 환멸과 함께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도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한국에서도 내년 대선에 오성운동이나 포데모스 같은 정치 혁명이 가능할까.

박성민 대표의 제안과 달리 안철수의 ‘새 정치’는 이미 바닥이 난 상태다.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운동이 불붙었던 2011년, 안철수가 정치적 대안으로 막 등장했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안철수가 구심점으로 작동하기에 그동안의 실망이 너무 크다. 게다가 안철수는 이미 기성 정치의 한복판에 들어가 있는 상태다.

오히려 오성운동의 베페 그릴로는 안철수보다는 방송인 김제동이나 김어준에 가깝고 포데모스의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는 진중권 교수나 조국 교수에 가깝다. (물론 진중권은 잘 생긴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와 비교하려면 일단 똑똑해야 한다.)

지난 8월 김제동의 성주 연설은 김제동이 그 어느 정치인 못지 않게 탁월한 정치 감각과 냉철한 현실 인식을 갖춘 정치 유망주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김제동은 “뻑하면 종북이란다, 나는 경북이다, 이 새끼들아”라고 거침없이 보수 언론을 조롱했고 “외부 세력은 오히려 대통령과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이라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헌법 조문을 줄줄 외우면서 “여러분들이 하는 모든 행위는 대한민국 헌법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라며 “여러분들은 쫄 필요 없고, 기죽을 필요가 없다”면서 성난 민심을 달래기도 했다.

김제동은 굳이 자신을 포장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대중의 눈높이에서 가장 쉬운 말로 핵심을 짚어 이야기했다.

“제가 이 말을 외교부 사람이나 학자들 만나서 이야기하면 뭐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전문대 나온 놈이 뭘 아냐 그럽니다. 그래서 제가 그럽니다. 전문대 나온 나도 안다, 이 새끼야.”

김제동의 연설은 선동적이고 그 자체로 지극히 정치적이었다. 과거 노무현을 연상하게 할 정도였다. (실제로 김제동은 주변에서 말렸던 노무현 전 대통령 추도식 사회를 본 뒤로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하곤 한다.)

▲ 2010년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1주기 추도식 사회를 보는 김제동. 국가정보원에서 사회를 보지 말라는 압박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수락했고 그 뒤 여러 방송에서 줄줄이 하차했다. 사진=이치열 기자.

누군가는 한갓 개그맨 출신이 무슨 정치를 하느냐고 할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정치 혐오로는 정치를 바꿀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는 프로패셔널과 아마추어가 따로 없으며 정치가 일상의 영역으로 내려와야 하고 무엇보다도 소통과 참여가 지금보다 훨씬 더 확대돼야 한다는 데 다른 의견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지금은 정치 혐오를 적극적인 에너지로 끌어내 낡은 정치를 바꾸는 데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아야 할 때다.  정치를 희화화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책은 무겁고 신중하게 결정하되,  정치는 가볍고 신나는 것이 돼야 한다. 

안철수가 바람만 잡다 제풀에 꺾였던 ‘새로운 정치’를 김제동이나 김어준이나 진중권이나 조국이나 심지어 김용민까지도 그 어떤 새로운 정치 신인이 불을 붙일 수 있을지  모른다.  낡은 정치의 바깥에서 정치의 관행을 허물어 뜨리는 새로운 실험이 필요할 때다. 

▲ 유아인. LG유플러스 광고.

이를 테면 유아인은 또 어떤가. 한국일보 박선영 기자는 지난해 11월, “유아인을 국회로”라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정치는 젊은이들이 이렇게 내버려둬도 좋을 직역이 결코 아니며, 정치에야말로 스타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잘 생기고 말도 잘 하고 글도 잘 쓰는 유아인은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에 가장 잘 어울리는 캐릭터다.

물론 여성 중에서 이효리나 김규리, 문소리, 김윤아 등도 얼마든지 대중 정치인으로서의 가능성이 있다.

▲ 노숙인들의 자활을 돕는 잡지 '빅이슈' 커버 모델로 나섰던 이효리.


사실 정치에는 안과 밖이 따로 없다. 분명한 것은 더이상 정치를 그들의 것으로 내버려둘 게 아니라 우리의 것으로 찾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김제동이 대통령까지는 어렵겠지만 정치 혁명의 기수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건 결코 허황된 전망이 아니다.

대안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는 더 나은 정치를 꿈꿔야 한다.  냉소와 무력감을 떨쳐내고 좀  더  신나는 정치를 가능하게 할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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