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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보도 요구하는 후배 찍어누르는 KBS 간부들
공정보도 요구하는 후배 찍어누르는 KBS 간부들
[해설] 비판 기자 보복 인사에 “뒷감당은 당연”… 기자들 성명에 간부들도 성명으로 맞대응

“KBS인으로서 KBS를 팔아 이름값을 올렸으면 당당하게 뒷감당도 하는 게 당연한 자세가 아닙니까?”

청와대의 KBS 보도개입 무보도를 비판했던 7년차 정연욱 기자가 제주총국으로 발령받고 기수별 성명이 쏟아지자 KBS 보도본부 국‧부장단들은 18일 성명을 통해 정 기자를 비난했다.

KBS 간부들에게 자사 보도를 비판하는 기자의 외부 기고는 “KBS를 팔아 이름값을 올”린 행위이며, 그에 따른 보복 인사는 마땅히 감내해야 할 조치에 다름아닌 것이다. 한마디로 ‘죄를 졌으니 벌을 받으라’는 것이다.

KBS에서 핵심 보직을 맡은 적이 있는 한 인사는 이날 “결국 인사 조치로 정 기자에게 불편함 내지는 고통을 줬다는 얘기인데, 스스로 보복 인사임을 자인한 것”이라고 우려했다.

제주 발령에 발단이 된 기자협회보 기고에서 정 기자는 KBS의 침묵을 배후조종하고 있는 세력으로 ‘KBS 기자협회의 정상화를 촉구하는 모임’(이하 정상화모임)을 꼽았다.

현직 KBS 기자가 정상화모임과 이를 주도하는 간부들을 공개 비판한 것이라 주목을 받은 것이다. 정 기자를 비난하는 성명에 이름을 올린 KBS 보도본부 국‧부장단 간부들은 대부분 정상화모임 소속이다.

▲ 지난 3월 결성된 KBS기자협회정상화추진모임에는 정지환 KBS 보도국장, 최재현 정치외교부장 등 주요 부장급 이상 인사뿐 아니라 메인뉴스인 ‘뉴스9’ 황상무, 최문종(주말) 앵커, 1박2일 출연으로 화제가 된 ‘뉴스광장’ 강민수 앵커 등 현직 앵커들도 이름을 올렸다.(왼쪽부터, 사진=KBS, 방송기자연합회)
정상화모임은 지난 3월 KBS 보도본부 국‧부장급 간부들을 중심으로 꾸려졌다. 이미 130여 명의 기자‧간부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는데 KBS 보도본부 내에서 만만치 않은 규모다.

지난달 KBS 기자협회장 선거에 출마한 이 모임 소속 후보는 505표 가운데 179표(득표율 35.4%)를 받았다. 정상화모임 결성 당시 이들은 특이하게 가입자들의 명단을 공개하며 세를 과시했고, 사안마다 KBS 평기자들과 각을 세우고 있다.

정 기자는 “이 목적을 알 수 없는 (정상화모임의) 실명 공개 결성문이 게시된 뒤로 보도국 내부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너무나 뚜렷하고 명백한 경계선이 그어졌다. 간부들이 포함된 정상화모임이 비가시적이고도 일상적인 감시를 하고 있다는 공포,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이 통제되는 일종의 ‘판옵티콘’이 공영방송의 심장부에서 구현됐다”며 정상화모임을 직격했다.

KBS 기자들이 알면서도 쉬쉬했던 정상화모임의 ‘비정상적’ 행태에 대해 정 기자가 실명을 내걸고 문제를 제기했고, 이후 제주 발령이라는 보복이 가해졌다.

정수영 언론노조 KBS본부 공추위 간사는 “정 기자는 정상화모임이라는 보도본부 내 사조직이 기자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감시망이었고 보도 침묵을 강제하는 수단으로 악용됐다는 걸 짚어냈다”며 “정상화모임이 KBS에 끼치는 해악을 거론한 것이 수뇌부들을 격분하게 만든 요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 모임의 존재가 KBS 기자들의 자기검열을 강화하고 무보도에 침묵하게 만드는, 일종의 ‘보도지침’으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중립을 부르짖지만 이들의 ‘성명 정치’는 정부‧여당의 주장에 힘을 싣는 것으로 귀결됐고 무보도 또는 편향보도로 관철됐다. 그동안 이들은 KBS기자협회나 언론시민단체의 총선보도 감시 활동에 대해 “익명성에 숨어 특정 보도를 겨냥해 편향적인 비판을 가하고 이슈화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동료들의 등에 비수를 꽂는 행태”, “동네축구 심판보다 못한 자세로 선거보도를 감시한다”고 비난해왔다.

▲ 정상화모임의 주축 정지환 KBS 보도본부 통합뉴스룸 국장(왼쪽)과 최재현 정치외교부장. (사진=KBS)
이번 ‘이정현 녹취록’에 대해서도 “관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문제”라면서 사안을 축소했고 “특정 정파에 치우친 세력의 주도 하에 녹취록이 공개됐다”고 주장했다. 실제 KBS 기자협회 관계자들은 국‧부장단이 주축인 이들과 건건이 부딪히는 것에 난감해하고 부담스러워했다.

이는 공영방송 언론인들의 제작 자율성이 심각하게 위축됐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정작 고대영 KBS 사장은 “(간부들의) 집단행동은 친목단체의 활동일 뿐이라서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길환영 전 사장이 KBS 보도에 사사건건 개입했다가 김시곤 전 보도국장의 폭로로 논란에 휩싸인 뒤 방송법 위반을 이유로 검찰 고발까지 당한 상황은 현 KBS 수뇌부에도 부담이다.

고 사장의 경우 사장 임명 전 ‘청와대 낙점설’이라는 암초에 부딪힌 바 있는데, 이에 비춰보면 정상화모임은 고 사장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효자손’으로도 쓰임이 있다는 것, 그래서 방관하는 것 아니냐는 추론도 가능하다.

정 기자의 지역 발령은 또다시 위축효과를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KBS 기자협회는 인사발령이 있던 지난 15일 긴급운영위를 열어 이번 사태를 ‘부당 인사’로 규정하고 대응을 모색하고 있다.

언론노조 KBS본부는 오는 21일 조합원 총회를 통해 부당인사에 대한 여론을 모으고 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 신청을 제기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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