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냐 넌, 트럼프!"

영화 '올드보이'의 유명한 대사가 떠올랐다. 미국의 기업인이자 방송인, 이제는 정치인이기도 한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그의 '막말'은, 한국 정치의 막말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도 놀랄 만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놀란 것은 그런 그의 지지율이 쭉쭉 올라갔다는 점이었다. 이러다가 정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라는 여덟 글자가 현실이 되는 날이 올 것인가! <거래의 기술>(도널드 트럼프/ 살림/ 2016년)을 읽은 까닭은 그가 대체 누구인지 알아야겠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 <거래의 기술> 도널드 트럼프/ 살림/ 2016년

<거래의 기술>은 1987년에 나온 일종의 자서전이다. 당시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논픽션 부문에서 32주 연속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관심을 모은 책. 그리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 막말과 함께 찾아온 '트럼프 현상'의 영향으로 이 책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혹여 막말에 가려 그의 진짜 모습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8쪽)는 번역자의 말처럼, 나 역시 그의 진짜 모습을 알기 위해 책을 집어들었다.

448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 열네 개의 장(章)으로 구성돼 있다. 제1장에서는 그가 일주일 동안 어떤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하루하루 시간의 흐름에 따라 꼼꼼하게 정리했다. 제2장 '나의 사업 스타일 : 11가지 원칙' 이후 제3장에는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담겨 있다. 부동산 사업을 시작하고 그랜드 하얏트 호텔, 트럼프 타워, 트럼프 플라자 등을 만들며 성공을 거듭해온 이야기는 제4장부터 제13장까지 이어진다. 마지막 제14장에서는 제1장에서 언급된 일주일의 업무들이 어떻게 정리됐는지 소개하며, 그의 꿈에 대해 밝혔다.

번역자는 트럼프를 "강하고 빈틈없고 야비할 정도로 냉정한 사람"(10쪽)이라고 정의했다. 나도 '냉정하게' 이 책을 평가하자면, 진도가 잘 안 나갔다. 흥미진진하리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30쪽 이상 시시콜콜한 무용담을 읽다보면 '아, 여기쯤 사진이라도 하나 나와주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애당초 그의 거래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성공담에서 뭔가를 배우겠다는 마음도 당연히 없었다. 트럼프라는 한 사람의 '정치인'을 이해하기 위해 읽었을 뿐. 이 책이 지루하게 느껴진 것은 내 태도 탓이 큰 것 같다. 그의 성공과정과 비결이 너무 궁금한 사람들이라면 이 책에 대한 평가는 꽤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소기의 목적'은 어느 정도 이뤘다. 트럼프라는 사람을 대표하는 세 가지 키워드, '막말', '독선', 그리고 '이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막말'이라는 키워드를 확인했다고 해서 이 책에 그의 막말이 그렇게 많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젊은 여성들을 "몇몇은 머릿속이 텅 비어 있었고, 다른 몇 명은 반쯤 미쳐 있었으며, (줄임) 대부분은 애완동물과 다름없었다"(129쪽)라는 식으로 비난하는 등, 막말이라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두어 번 등장하긴 한다.

트럼프를 대표하는 세 가지 키워드... 막말, 독선, 그리고 이윤

대신 내가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막말을 하는 이유'였다. 한마디로 그의 막말은 '거래의 기술' 가운데 일부다. 그는 논란을 통해 장사를 할 줄 아는 인물이다. "좋은 평판은 나쁜 평판보다 낫다. 그러나 나쁜 평판은 때때로 평판이 전혀 없는 것보다 낫다. 간략히 말해서 논란은 장사가 된다는 것이다."(217쪽)라는 문장에서 그의 머릿속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제2장에 정리한 '나의 사업 스타일 : 11가지 원칙' 중에서도 "언론을 이용하라"는 원칙을 전했다. 그는 "나는 일을 조금 색다르게 처리했으며, 논쟁이 빚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내가 관여한 거래는 다소 허황돼 보이기도 했다"(82쪽)라고 고백했다. "흥미로운 것은, 개인적으로 피해를 입게 되는 비판적인 기사일지라도 사업적인 측면에서는 크게 도움이 된다"(82쪽)라고 한 부분에서 그가 막말로 논란을 만들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추측해볼 수 있다.

두 번째 확인한 것은 바로 독선.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 그의 자세는 '어쨌든 나는 성공했고, 결국 나의 말은 옳았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어쨌든'이다. 그는 그 '어쨌든'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 그런 반성을 요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성공하면 직면하는 문제 중의 하나가 시샘과 질투다. 상대방을 저지함으로써 성취감을 느끼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들을 인생의 실패자라고 규정하고 있다."(85쪽)라는 말로 간단히 정리해버린다.

의사결정의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다양한 시각에서 검토하는 것을 그는 "쓸데없이 많은 경로를 거쳐야 하는 비능률"(255쪽)이라고 일축한다. 기업 안에서의 의사결정뿐만 아니라 공공의 정책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도, "위원회라는 것은 우유부단한 사람들이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 위험 부담을 회피코자 만드는 조직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았다"(342쪽)라고 솔직하게(?) 단언하기도 한다.

압권은 한 칼럼니스트가 그를 평가한 글의 일부를 책에 인용해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이성적인 인물은 아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인간은 이성에만 의지해서 살 수는 없다. 과도한 것도 미덕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트럼프다. 그는 미국의 분출하는 에너지를 상징하는 맨해튼의 마천루와 같은 미국인이다. (줄임) 성급함과 열정, 그리고 충동은 미국의 특성 중 일부다."(410쪽)라는 글을 일곱 줄에 걸쳐 인 용해놓은 이유는 뭘까. 자신의 독선을 “미국의 특성”으로 합리화해준 칼럼니스트가 꽤나 고마웠나 보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키워드는 이윤이다. 이 책 본문의 첫 문장은 "나는 돈 때문에 거래를 하는 것은 아니다"(17쪽)이다. 그리고 이어서 "나는 거래 자체를 위해서 거래를 한다. 거래는 나에게 일종의 예술이다."(17쪽)라고 밝혀 놓았다. 정말 그럴까? 마지막 제14장에 나오는 다음 문장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책의 첫머리에서 내가 거래를 행하는 것은 단지 거래 그 자체를 위해서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현재 얼마나 많은 거래를 하고 있느냐 하는 것보다 결과적으로 무엇을 성취해냈으냐에 의해 평가된다."(429쪽) 결국 그것이 예술이든 아니든, 거래는 이윤을 통해 평가된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그의 목적은 뚜렷했다. 거래를 통해 '이윤'을 남기는 것. 그는 이윤을 남기기 위해 행정, 정치, 언론 등 여러 가지 수단을 활용하는 수완을 가졌다. 1976년 뉴욕에 그랜드 하얏트 호텔을 지으면서 뉴욕 시로부터 무려 '40년간 제산세 면제'라는 혜택을 받은 에피소드(제6장)는 특히 인상적이다. 뉴욕 시가 트럼프에게만 "불공정한 특혜"(174쪽)를 베푼다는 비판 여론이 거셌지만, 그는 오직 "덕분으로 나는 수천만 달러를 절약할 수 있게 됐다. 그 싸움은 예상 이상으로 값어치가 있었다."라고 자신의 승리를 즐길 뿐이었다.

이해는 하되 따라 배우지는 말기를... '이 할배는 안 된다'

이윤에 대한 그의 뚜렷한 목적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또 있다. 제4장에 나오는 그의 부동산 사업 초창기 이야기. 그가 "유능한 세일즈맨이었고 놀랄 만한 경영 수완이 있었다"(115쪽)라고 평가한 '어빙'이라는 아파트 관리인에 대한 이야기다. 트럼프는 어빙이 회사 돈을 몰래 빼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빙을 해고하지 않았다. "1년에 5만 달러쯤 빼돌렸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지만 설사 그렇더라도 그를 고용함으로써 그만큼의 이득은 있었다고 생각"(116쪽)했기 때문이다. 부도덕, 심지어 자신의 회사를 향한 부도덕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주는 이득이 더 크다면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빙은 대체 어떻게 일을 하기에 그토록 "유능한" 관리인이 될 수 있었을까? 어빙은 임대료가 밀린 집에 가서 직접 받아오곤 했는데, "생각 할 수 있는 모든 욕과 위협을 퍼붓는"(116쪽)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열 살쯤 되는 여자아이한테도 예외 없이 "아버지한테 가서 임대료 내라고 해. 만약 내지 않으면 엉덩이를 차버리겠다고 전해."(117쪽)라고 막말을 쏟았다.  그리고 아이의 엄마가 미인인 것을 보고는, 180도 태도를 바꿔서 같이 저녁을 먹자고 추근대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트럼프가 인정한 어빙의 '유능함'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책의 성격을 다시 한번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트럼프의 자서전. 이 책에 등장하는 '사실'들은 개인의 기억 속에서 '일방적으로' 정리된 사실이라는 점이다. 임대료 체납 가정의 열 살짜리 딸의 입장에서 이 '사실'을 생각해보자. 떠올리고 싶지 않은 끔찍한 기억으로 기록됐을 것이다. 책에 등장하는 다른 사실들 역시 그 정도의 '거리 두기'를 통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거래의 기술>이 처음 나온 것은 30여 년 전. 마흔 살의 트럼프가 20년이 채 못 되는 동안 이룬 성공 이야기다. 그는 마지막 제14장에서 "내가 앞으로 20년 동안 해보려고 가장 야심차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갖게 된 것의 일부를 되돌려주기 위한 무엇인가 창조적인 방법들을 찾아내는 일이다"라며,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관대해지기란 쉬운 법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442쪽)라고 밝혔다. 무슬림이나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 여성에 대한 멸시, 언론과 민주주의에 대한 모욕의 발언들은 지금도 인터넷 검색창에 "트럼프 막말"이라고만 치면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관대한 사람이 돼야 한다던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인가?

이 책의 번역자는 "어쩌면 이렇게도 꾸밈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일 수 있을까 하는 점이 더 강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445쪽)라고 썼다. 원래 솔직한 것과 뻔뻔한 것은 한 끗 차이다. 그리고 혹시나 그 솔직함(또는 뻔뻔함) 역시 거래라는 승부에서 승리하고 더 많은 이윤을 차지하기 위한 '기술'이라면?

이 책의 광고 문구 중에 "트럼프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이라는 것이 있었다. 유일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이 책은 트럼프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제발 이해하는 것으로만 그치고, 따라 배우지는 말기를. 자극은 있으나 교훈은 없고, 시시콜콜하나 흥미진진하진 않다. '정치인' 트럼프에는 관심 없고 '사업가' 트럼프에게 돈 버는 법이나 배우겠다고? 그럼 제발 다른 사람을 보고 배워라. 솔직히 저렇게 '돈 많고 고집 세고 뻔뻔한' 할배들은 쌔고 쌨지 않은가. 적어도 이 미국 할배는 안 된다. 제발.


(인터파크도서 북DB와의 콘텐츠 제휴를 통해 제공합니다. 북DB 기사 보기)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