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은 마법의 주문이 아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최근 5년 사이 한국 언론에 등장한 가장 큰 혁신은 JTBC 뉴스룸이다. 손석희 사장이 합류하기 전 JTBC 뉴스는 저널리즘의 밑바닥이라 불리는 TV조선이나 채널A와 비교해도 그다지 나을 게 없었다. 형광등 100개를 켜지 않았을 뿐 북한 뉴스로 도배하는 건 예사였고 존재감도 없었다. 동물원 토끼와 인터뷰하는 리포트가 그 시절 JTBC의 ‘흑역사’로 전해 내려올 정도다.

JTBC의 도전과 변화는 너도나도 외치는 디지털 혁신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디지털 보다는 오히려 아날로그 스타일이고 철저하게 저널리즘의 기본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손석희 사장은 일찌감치 “백화점으로 가는 순간 우리는 망한다”고 선언하고 “한 걸음 더 들어가는” 뉴스를 쏟아냈다. 적당히 하고 다음 뉴스로 넘어가는 게 기존 방송 뉴스의 포맷이었다면 JTBC는 중요한 이슈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서 새로운 팩트와 관점을 끌어냈다.

모든 뉴스를 다 다뤄야 하는 게 주류 언론의 숙명이고 한계고 비극이다. 뉴스 소비자들은 새로운 소식 이상의 것들을 원한다. 대부분 뉴스들은 관심이 없거나 몰라도 상관 없는 것들이고 8시 또는 9시 뉴스를 틀면 이미 듣거나 본 뉴스들을 다시 확인하는 데 그치는 게 현실이다. 단일 문화권인 한국은 특히 뉴스의 집중도가 매우 높다. 뉴스 소비자들이 TV 뉴스를 켤 때, 아침 신문을 펼쳐 들 때 원하는 것은 “한 걸음 더 들어간” 어떤 것들이다.

그래서 핵심 이슈에 집중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버리는 전략도 중요하다. 한정된 자원을 어디에 어떻게 선택과 집중하느냐에 따라 조직의 작동 방식과 구성원들의 의식이 바뀌고 결과물이 달라진다. 모든 혁신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잘 할 수 있는 것과 잘 해야 할 것들에 역량을 집중하고 개발하는 것. 하늘에서 떨어지는 혁신이 아니라 조직의 철학과 우선 순위를 정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게 변화의 시작이다.

세월호면 세월호, 어버이연합이면 어버이연합, 가습기 살균제면 살균제, 손석희 사장이 제한된 뉴스 시간의 상당 부분을 특정 이슈에 집중하면 그것 자체로 기자들에게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된다. 취재한 내용을 충실히 전달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고 뉴스에 영향력을 부여하는 것, 기자들에게 이만한 인센티브는 없다. 선택과 집중 과정에서 배제된 뉴스들은 디센티브로 작동한다. 뻔한 뉴스를 만들지 않는 것, 그게 JTBC의 경쟁력이라고 할 수 있다.

탐사보도 전문 매체를 표방한 뉴스타파의 도전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뉴스타파는 유튜브 기반으로 뉴스 서비스를 하고 있지만 콘텐츠는 지극히 아날로그 스타일이다. 뉴스타파의 혁신은 스타일이 아니라 콘텐츠의 접근 방식에 있다. 이슈를 좇기 보다는 주류 언론의 사각지대를 파고들면서 이슈를 만들어 내고 의제설정을 주도한다. 고정 방문자도 제한적이고 페이지뷰도 많지 않지만 존재감이 남다르다.

척박한 한국 언론 지형에서 3만명 넘는 고정 후원독자들이 모여 뉴스타파 같은 독립 언론을 만들 수 있다는 건 고무적인 현상이다. 뉴스타파는 성역과 금기를 깨는 탐사보도에 집중하면서 강력한 브랜드를 구축했다. 뉴스타파 독자들은 신념에 가까운 강력한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 콘텐츠 유료화라고 부르긴 애매하지만 한국 언론 가운데 콘텐츠 자체로 독자적인 수익 기반을 마련한 건 뉴스타파가 최초라고 할 수 있다.

미디어오늘이 “한국 언론 혁신과 생존”이라는 주제로 기획 연재를 진행하면서 거듭 강조했던 건 파괴적 혁신이 생존의 전제 조건이지만 때로는 생존을 위한 타협이 혁신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 버즈피드 등 물 건너 사례는 한국적 상황과 맞지 않거나 대부분 언론 기업들이 애초에 근본적으로 생존의 조건을 혁신하지 않는 이상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한국 언론이 당면한 생존의 조건은 엄혹하다. 콘텐츠는 경쟁력을 잃었고 조직은 늙고 비대하다. 한동안 광고와 협찬·후원으로 버틸 수 있겠지만 갈수록 독자들은 떠날 것이고 영향력도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 방송 역시 마찬가지다. 지배적인 플랫폼은 이제 없다. 철저하게 개별 콘텐츠 단위로 평가 받고 판매되는 시대로 가고 있다. 패키지 판매도 사라지고 브랜드도 희석되고 있다. 지상파 방송도 이제 콘텐츠 사업자로 전락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열악한 생존의 조건이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데 있다. 광고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줄어들 것이고 협찬과 후원에 목을 매겠지만 언론과 기업의 공생 관계는 지속가능한 모델이 아니다. 플랫폼 환경도 급변하고 있다. 네이버와 다음이 대안이 아닌 것처럼 페이스북도 대안이 될 수 없다. 콘텐츠를 수집하는 ‘가두리 양식장’이 늘어나고 있지만 수익도 트래픽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이다.

▲ 사진=ⓒiStock


뉴스는 이제 푸쉬(밀어내는) 방식이 아니라 풀(끌어오는) 방식으로 유통된다. 지배적인 플랫폼은 없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뉴스를 찾아보는 게 아니라 온갖 경로로 뉴스가 다가오는 시대가 됐다. 뉴스의 패키지가 해체되고 브랜드 충성도도 약화되고 있다. 독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대부분의 기사는 만드는 순간 버려진다. 선택하는 뉴스, 다가가는 뉴스를 만들어야 한다. 혁신은 바로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중앙일보는 지난해 11월 카카오 대표이사를 지낸 이석우씨를 디지털전략본부장으로 영입한 뒤 편집과 개발과 디자인 인력을 대거 충원하고 통합 뉴스룸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 새로운 시도인 것은 분명하나 기존 조직을 거의 흔들지 않으면서 포장만 덧씌운 것이라는 관측도 존재한다. 기존 인력의 전환 배치가 아니라 대규모 신규 충원으로 신설 조직을 구축한 것도 장기적으로 비용 부담이 될 수 있다. 기존 편집국 조직과 충돌을 해결하는 것도 관건이다.

조선일보는 최근 네이버와 합작 자회사를 만들고 취업정보 서비스를 내놓았다. 구글이 한겨레21 등과 협업해 저널리즘스쿨을 만들고 첫 졸업생을 배출하는 등 미디어 기업과 정보기술 기업의 합종연횡도 활발하다. SBS의 스브스뉴스 실험은 소셜 네트워크에서 확고한 존재감을 구축했다. 한겨레는 뉴스뱅이라는 버티컬 브랜드를 만들어 멀티 플랫폼 전략을 실험하고 있다. 이런 시도에 전혀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근본적인 혁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2014년 5월, 세계적으로 여러 언론사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던 뉴욕타임즈 혁신 보고서는 단순히 기존의 아날로그 콘텐츠를 디지털로 옮기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조직의 철학과 우선순위, 작동방식이 달라지지 않으면 변화가 없다는 처절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독자들이 뉴스를 어떤 경로로 어떻게 소비하는지 분석하고 플랫폼의 변화에 맞춰 콘텐츠의 질적 변화를 모색하는 것, 그 전제는 최고의 저널리즘에 투자를 계속한다는 것이었다.

혁신 보고서 발간 이후 뉴욕타임즈는 1면 편집회의를 디지털 스토리 회의로 전환하고 독자 개발에 핵심 역량을 투입했다. 88%의 독자들이 구글 검색이나 페이스북 링크 등 외부 플랫폼에서 유입된다는 분석 자체는 새로울 게 없지만 단순히 페이지뷰를 늘리는 전략이 아니라 독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끌어내려면 기사의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는 정공법을 선택한 게 변화의 핵심이었다. ‘최고의 저널리즘’과 ‘독자 개발’, 두 가지 키워드가 서로 맞물린다.

워싱턴포스트의 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2013년 5월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조스에게 팔린 워싱턴포스트는 지난해 10월 처음으로 월간 순방문자 수 기준으로 뉴욕타임즈를 따라잡았고 올해 2월에는 페이지뷰가 버즈피드를 앞질렀다. 워싱턴포스트는 한 가지 기사를 다섯 가지 버전으로 만들어 독자들의 반응을 테스트하고 가장 효과가 좋은 버전을 최종 편집본으로 내보낸다. AB 테스트가 아니라 ABCDE 테스트인 셈이다.

미국 노스이스턴대 댄 케니디 교수가 최근 공개한 ‘베조스 효과’라는 제목의 논문에 따르면 베조스는 순방문자와 페이지뷰 같은 통계는 이미 선택이 끝난 ‘결과지표(lag measures)’라고 보고 클릭과 체류시간, 공유건수 등 이른 바 ‘선행지표(lead measures)’를 강조했다. 결과지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선행지표를 늘리는 게 장기적으로 결과지표를 늘리는 방법이 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워싱턴포스트의 ‘고객 참여 깔대기(customer-engagement funnel)’ 모델은 어디선가 링크를 타고 방문한 뜨내기 독자들(casual visitors)을 고정 방문자로 끌어들이고 장기적으로 충성 독자로 전환하기 위해 다양한 ‘입소문 전략(viral approach)’을 활용한다. 뜨내기 독자들을 붙잡기 위해 종이신문과 달리 웹과 앱에서는 가벼운 제목을 쓰되 낚였다는 느낌이 들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의 혁신은 사실 엄청나게 새롭거나 대단한 기술력이 필요한 건 아니다. 좋은 기사는 읽히기 마련이지만 적극적으로 노출하지 않으면 흐지부지 사라지는 기사가 대부분이다. 혁신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콘텐츠 포맷을 바꾸고 비주얼을 강화했지만 메시지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한두 차례 이벤트가 아니라 콘텐츠의 기획과 작성, 유통 전반에 걸쳐 좋은 기사를 더 잘 읽히게 만드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험해야 한다.

해외 사례에 열광하는 업계 전문가들은 디지털 혁신의 외형에 초점을 맞춘다. 선도적인 콘텐츠 관리 시스템(CMS)를 도입하고 리스티클이나 카드뉴스, 인포그래픽 등 새로운 스토리텔링 기법을 시도하고 독자의 콘텐츠 소비 패턴을 추적해 반응을 끌어내는 등의 실험이 의미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콘텐츠의 질적 혁신이 없이 포장과 유통만으로 뜨내기 독자들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버즈피드나 바이스미디어, 쿼츠 등의 혁신 사례들도 마찬가지다.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가 기존의 경쟁력 있는 콘텐츠에 집중한다면 미디어 스타트업 기업들은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하는 전략을 쓴다. 잃을 게 없기 때문에 철저하게 잘 팔리는 콘텐츠에 주력하면서 인내심 없는 독자들을 사로잡는 전략이다. 기술은 거들 뿐, 모두 달라진 디지털 환경에 맞는 콘텐츠를 만들고 차별화에 성공한 언론사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JTBC 뉴스룸에 열광하는 건 JTBC가 진보적이어서가 아니라 일단 재미있고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뉴스를 내보내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청률은 크게 높지 않지만 포털과 페이스북 등에서 텍스트로 보는 독자들도 상당하다. 손석희 사장은 종편이라는 플랫폼의 한계를 극복하고 독보적인 콘텐츠를 만들어 냈고 차별화된 브랜드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멀리 갈 것 없다. 여기에 혁신의 비결과 본질이 다 들어 있다.

팩트체크라는 새로운 포맷과 대형 화면과 일러스트를 동원한 프레젠테이션 스타일의 앵커 브리핑, 그리고 여기에 손석희라는 안정적인 캐릭터까지. JTBC 뉴스룸은 콘텐츠의 내용 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혁신을 이뤄냈지만 스타일은 얼마든지 복제와 변용이 가능하다. 같은 MBC에서 나왔지만 김주하의 MBN이나 최일구의 TV조선이 JTBC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뉴욕타임즈의 혁신 보고서가 대부분 한국 언론에 무용지물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잃을 게 없으면 새롭고 핫한 데 모든 자원을 쏟아부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 언론사들은 그렇지 못하다. 냄비 안의 개구리처럼 끝이 멀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당장 냄비를 뛰쳐나갈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종합지의 함정을 경계해야 한다. 모든 이슈를 다 다루고 모두에게 읽히기 위해 만드는 그런 뉴스는 갈수록 경쟁력을 잃게 될 것이다. 다른 어디에 가도 다 있는 그런 뉴스를 포기할 때 비로소 혁신이 시작된다.

버즈피드의 창업자 요나 페리티는 “파도가 밀려 오기 전에 서핑을 시작했을 뿐”이라고 말한 적 있다. 콘텐츠 환경 변화를 일찌감치 내다봤기 때문에 새로운 실험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겠지만 모든 언론사들이 버즈피드를 따라갈 수 없고 따라가서도 안 된다. 뉴욕타임즈는 뉴욕타임즈의 방식이 있고 워싱턴포스트는 워싱턴포스트만의 경쟁력이 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강화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게 혁신의 출발이 돼야 한다.

파도는 이미 밀려왔고 이제 좋든 싫든 서핑을 해야 할 시간이다. 다만 달라진 문법과 새로운 콘텐츠 유통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될 거라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언론사들이 생존의 조건을 버리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주류 언론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고 스내커블 콘텐츠가 뉴스를 대체하는 시대, 언론의 위기가 민주주의의 위기로 확산되는 걸 경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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