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신임 원내대표로 선출되자 두 장의 사진이 SNS를 달궜다. 87년 6월 우 의원이 이한열 열사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고, 왼편으로 나란히 배우 우현씨가 서 있는 장면이었다. 또다른 사진은 우 의원이 20대 총선 유세현장에서 우현씨와 배우 안내상씨, 그리고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가 함께 찍은 것이었다. 

두 장의 사진은 과거와 현재 우 의원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우 의원은 연세대 학생회장과 전대협 부의장을 맡아 서울지역 대학생들의 집회와 시위를 조직했다. 우현씨와 안내상씨는 운동권 친구였다. 그러다 87년 6월 9일 연세대에서 열린 시위 중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이한열 열사가 맞아 7월 5일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우 의원은 이한열 열사의 부검 과정을 지켜봤다. 이후 우 의원은 재야에서 민주화운동을 했다. 그리고 2000년 정치에 입문한 뒤 17년 만에 우상호 의원은 87년 6월 항쟁 주역에서 능수능란한 협상력을 발휘해야할 현실 정치의 꽃인 원내대표 자리에 올랐다. 

▲ 1987년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 왼쪽부터 배우 우현씨와 우상호 의원. 우상호 의원 홈페이지.
우 의원은 운동권에 거리를 둔 학생이었다.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81학번인 우 의원은 문학회에서 활동했다. 윤동주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조선비즈와 인터뷰에서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인생을 민주화 운동에 바치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회색 지대에서 방황하고 있는 소시민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1985년 복학을 하면서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와 시민사회활동가 박래군씨를 만났다. 복학생 신분으로 운동권이 되기가 부담스러웠던 그는 오연호 대표의 소개로 사회과학 세미나에 참가했고, '국문과 84 강타'라는 가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지난 2011년 박래군씨가 용산 참사 문제로 수배생활을 할 당시 우 의원은 박씨에게 "박래군은 대학시절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고 시인을 꿈꾸던 나를 학생운동을 하도록 꼬셔서 결국 전혀 다른 길을 걷게 한 웬수"라는 글을 썼다. 또한 박씨가 구속됐을 때 탄원서에 동문 자격으로 이름을 올렸다.

우 의원이 현실 정치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00년 16대 총선이었다. 우 의원은 학교 동문이었던 이성헌 한나라당 의원과 격돌해 관심을 모았지만 1%포인트 차로 낙선했다. 그리고 2004년 17대 총선에서 이성헌 의원과 리턴매치를 통해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당시 우 의원은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했던 만큼 시대개혁과 통일에 관심이 많다"며 국민과 공감 속에서 개혁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4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로 선출된 우상호 당선인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당선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현실정치는 냉혹했다.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152명 중 108명이 초선이었다. 자연스레 386 그룹의 국회 대거 진출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뒤섞였다. 

한나라당은 386를 ‘주사파’로 지칭했고 '386마리의 베짱이'(주성영 한나라당 의원)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우 의원은 우원식, 강기정 의원과 함께 국가보안법 폐지모임에 소속돼 당내 가장 강한 의견이었던 형법보완론을 주장했다. 한나라당은 국가보안법 등 4대 개혁 입법에 대해 '공산화로 가는 트로이의 목마'라고 색깔론을 제기했다. 386그룹은 한편에선 '운동권의 상품화'라는 비아냥을 들었고, 다른 한편에선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2004년 6월 이라크 파병반대에 서명하지 않은 386 의원이라는 비난을 받음과 동시에 "9. 11 테러 진상조사위원회 조사 결과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테러조직 알카에다에 협조했다는 증거가 없는데도 미국이 잘못된 정보를 토대로 명분없이 전쟁을 일으켰다"(우상호 의원 경향신문 인터뷰)며 386 의원들이 속한 '새로운 모색'은 조지 부시 대통령을 비난하는 성명을 준비했다. 

우 의원은 386 의원과 함께 '선명성'을 강조하는 의정활동에 앞장섰지만 여타 386 출신과 달리 유연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변인으로 이름을 알리면서다. 우상호 의원은 충실히 당의 입장을 전하는 ‘대변인 전문가’가 됐다. 2006년 5. 31 선거운동 과정에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피습을 당하고 9일만에 유세 현장에 복귀하자 당시 열린우리당 대변인이었던 우상호 의원은 "자신의 문제를 정략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일침을 날렸다.

2008년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청문회에서 청와대가 유 장관을 '전북 완주 출신'으로 발표하고, 유 장관이 "서류상 출생지는 전북이지만 나는 56년간 서울에 산 서울 사람"이라고 하자 우 의원은 "그러면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이 대통령은 일본 사람이냐", "장관 자리는 드라마 배역이 아니다"라고 몰아붙였다.

우 의원은 2009년 10. 28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이번에는 꼭 선거 승리 논평을 한 번 내고 싶다"고 논평해 주목을 받았다. 2006년 열린우리당 대변인으로 시작해 2008년까지 5번의 선거를 치렀지만 모두 패배한 경험을 대변인의 입으로 전하면서 지지를 호소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2010년 8월 김근태, 손학규, 정세균 당 대표 아래에서 대변인으로 일했던 '807일'에 대해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면서 "우린 대한민국 정치 동반자였으며 은밀한 공범이었다. 이제 그 공범관계를 청산한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정치가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정치인과 언론 모두 책임이 있다"며 국회 정론관을 떠났다. 

하지만 이후에도 우 의원은 대변인이라는 직함이 따라다녔다. 2011년 10. 26 재보궐선거에 출마한 박원순 시장 캠프의 대변인을 맡았고, 2012년 문재인 후보의 대선 기획단 공보단장을 맡아 화력을 지원했다. 2006년 여당과 2007년 이후 야당의 대표 대변인으로 활약했던 우 의원은 논리가 정연하고 순발력이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변인 역할에만 충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 의원은 각 계파의 수장과 함께 두루 경험을 쌓으면서 자기 정치에 대한 철학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원내대표로 선출된 자신을 ‘새로운 정치세대의 출현’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는 손학규 대통합민주신당 대표 아래서 대변인을 지냈고, 김근태 당 의장 시절에도 대변인을 맡았다. 정세균 당 대표를 포함해 국민의당 카운터펀치인 박지원 의원이 정책위의장과 원내대표를 맡을 당시에도 우 의원은 대변인이었다. 

과거 운동권 출신으로 묶여 분류됐던 우 의원은 현실정치에선 어느 특정 계파로 속하지 않은 행보를 걸어왔고, 대변인 경험이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각 계파의 수장과 인물이 대표하는 조직에서 두루 '입'을 맡았던 경험이 역으로 계파 정치를 혁파해야 한다는 자기 정치의 철학으로 굳어진 것이다.

우 의원은 지난 2012년 5월 전당대회 당 대표로 출마하면서 계파 혁신을 본격적으로 주장했다. 그는 "지금 민주통합당은 계파정치로 병 들어가고 있다. 의욕상실과 패배주의가 만연하며 점점 수렁에 빠지고 있다"면서 "이명박 정권의 보수적 대안들이 실패로 판명이 난 지금 대한민국은 안정감과 균형감각 이는 합리적 진보노선의 강화가 시대정신이다. 당 대표가 되면, 계파 정치의 고리부터 끊어내고 정당문화를 혁신해 당의 공공성과 공익성을 튼튼하게 하겠다"고 말했다.

우 의원은 지난 2013년 민주통합당 86그룹 '진보행동' 해체를 선언하면서 "선배 정치인들의 당직 요청에 많은 486 정치인이 합류하면서 당권파나 ○○계로 분류됐다. 그러다보니 내부 문제를 극복하기 보다 주류의 논리를 대변하거나 변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친노 진영도, 이에 대응하는 비주류 연합세력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 의원은 2014년 12월 ‘빅3계파’ 수장인 정세균, 박지원, 문재인 의원을 향해서도 의원 30여명과 함께 성명을 내고 "세 분의 출마로 전대가 분열과 분파, 당내 기득권 구조의 현실을 확인하는 자리로 변질된다면 당이 좌절과 분열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은 자명하다"고 밝혔다.

▲ 더불어민주당 신임 원내대표로 선출된 우상호 의원(오른쪽)이 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국회 원내대표 선거를 마친 후 김종인 비대위 대표 등과 함께 축하 꽃다발을 받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외곽에서 계파 해체를 외쳤던 우 의원이 원내대표로 선출된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총선 이후 김종인 대표와 문재인 의원 계파와의 갈등이 불거졌고, 전당대회를 앞두고 계파 싸움으로 대통령 선거를 망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했다. 이런 가운데 우상호 의원의 선출은 계파 갈등을 잠재우라고 책무을 지우는 성격이 있다. 역으로 계파 해체를 주장했던 우 의원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이거나 계파 해체에 반하는 행동을 보일 경우 반작용은 더욱 커질 수 있다.

우 의원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86세대 국회의원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사회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 저는 의심스럽다"(지난해 새정치민주연합 임미애 혁신위원)는 주장이 언제든지 제기될 수 있다는 얘기다. 

우 의원이 수석부대표에 박완주 의원과 원내대변인에 기동민 당선자를 맡기면서 86그룹을 전면에 배치한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지만, 특정 계파로 분류하기 어려운 우 의원의 성향이 반영된 것 뿐이라는 분석도 있다.

우 의원은 계파 정치 청산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의식한 듯 원내부대표단 구성과 관련해 검사출신과 회계사, 사업가 출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가를 배치했다는 입장이다. 계파 정치 청산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인선을 통해 정당화하면서도 운동권 출신들의 전문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우 의원은 CBS 라디오에 출연해 "제가 생각하는 새로운 정치 콘셉트는 공존의 철학이다"며 "우리 당이 합리적 진보부터 개혁적인 중도 보수까지 표방하는 정당이 되었을 때 집권할 수 있다"고 밝혔다.

우 의원의 원대대표 역할 수행은 86그룹의 '실력'을 검증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통할 수 있다. 제1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이었던 이인영 의원이 최고위원을 지냈지만 86그룹이 정당 협상 테이블에 대표로 앉은 것은 우 의원이 처음이다. 

대변인 경험을 살려 청와대의 국정운영에 대한 쓴소리를 적시에 쏟아낼 것이라는 기대도 크다. 우 의원이 박근혜 정부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출신인 조응천 당선자를 염두에 두고 "권력 내부의 속성과 잘못된 국정운영 방식을 낱낱이 아는 부들이 우리 당에 왔다"며 폭로를 예고하는 듯한 발언을 내놓으면서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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