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토막사건의 피의자가 잡힌 지난 7일 조선일보 조선일보 홈페이지에 걸린 제목은 “안산 토막살인 서른살 조성호, 이렇게 생겼습니다”였다.

정말 막장이다. 아찔하다. 그러나 합법이다. 조선일보는 “특정강력범죄 처벌법은 범행 수단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범죄 피의자의 신상정보를 공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도주 중인 용의자도 아니고 체포된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하는 게 수사→재판→처벌의 과정 어디에서 도움이 되는지 묻고 싶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법이 정하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짓이다.

그렇게 법이 개정된 근거는 두 가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1) 여론이 들끓었고(“살인자의 인권만 인권이냐”) 2) 미국도 그렇게 한다는 것.

안산 토막살인 피의자로 붙잡힌 조아무개씨. 연합뉴스
먼저, 미국이 하는 일은 다 옳은가? 아니다. 미국이 사법제도의 선진국인가? 아니다. 미국의 사법제도는 바로 그런 어리석은 여론에 편승한 정치인들의 뻘짓으로 선진국이라고 말하기 힘든 수준이다. 그리고 미국의 정치인들도 그걸 잘 안다. 그래서 개혁의 대상이다. 그런 마당에 미국도 하니까 우리도 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리고 그런 법 개정 과정에서 조선일보가 사설 등으로 앞장서서 바람몰이를 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 기사는 말하자면, 조선일보의 뿌듯한 결과 보고서다.

조선일보는 2009년 1월31일 1면에 연쇄 살인 피의자 강호순의 사진을 공개하면서 “조선닷컴에서 이틀간 100만명이 넘는 독자들이 열람했고 많은 이들이 댓글에서 얼굴 공개에 찬성했다”면서 합리화했다.

조선일보는 다음날인 2월1일 “반(反)사회적 범죄자 얼굴 공개하는 게 옳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흉악범 얼굴을 가리는 것은 변양균·신정아 사건처럼 공인(公人)의 얼굴 공개와 비교해서도 불공정하고, 경찰이 수배 범죄꾼들의 얼굴사진을 전국 곳곳에 붙여놓는 것과도 모순된다”면서 “학계에서도 ‘중대 범죄자는 자발적으로 공적(公的) 인물이 된 셈이니 얼굴과 신상을 공개해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있다”고 자신들이 한 보도를 스스로 정당화했다.

조선일보는 2012년 9월 나주 성폭행 피의자의 체포 소식을 보도하면서 일반인의 사진을 1면에 게재해 물의를 일으킨 적도 있다. 조선일보는 곧바로 사과하고 정정보도를 냈지만 피해자는 평생 씻지 못할 상처를 입게 됐다.

▲ 2012년 9월1일 조선일보 1면
피의자 신상공개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1981년 윤 노파 살해 사건이다. 당시 신문들은 “물증이 나와도 범행을 시인하지 않는 세상에 둘도 없는 끈질긴 여자”라는 표현을 쓰면서 피의자 고숙종씨의 현장검증 사진을 모자이크도 없이 게재했다. 그러나 고씨는 고문에 의한 허위 진술을 한 사실이 밝혀져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고 5년 뒤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 승소했다. (관련 기사 : 고종석 오보 사진과 30년 전 고숙종 사건의 교훈)

▲ 1981년 8월16일 조선일보 12면
여론이 피의자 얼굴공개를 요구한 이유는 무엇인가? 피의자의 얼굴이 알려지는 게 어떤 공익이 되는가? “그 놈 얼굴이나 좀 보자”는 심리 이상이 아니다. 막 밉고 화가 나는데 분노를 쏟을 얼굴이 없으니까 답답한, 청소년수준의 심리상태에서 출발한 요구이고, 대중적 분노의 대상을 찾는 다분히 파시스트적인 사고방식이다.

궁극적으로 얼굴공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적 형벌이다. 그런 처벌을 대중이 원한 것이고, 언론과 정치인들이 편든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동의하듯 처벌은 수사가 끝나고, 재판이 끝난 뒤에 하는 것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이 그것이다. 세상은 요지경이고, 아무리 우리가 확신해도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면서 수사당국의 초기 결론은 얼마든지 뒤집어 질 수 있다.

▲ 2012년 9월2일 조선일보 온라인판
절대 뒤집어질 리 없다면 왜 귀찮게 수사를 하고 재판을 하는가?

경찰은 "범행수법이 잔혹하고 사망이라는 중대한 결과가 초래된 점에 고려해 피의자의 얼굴과 실명을 공개했다"고 한다. 1) 사안이 심각하면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해도 좋다는 건 무슨 논리이며 2) 그 사안의 심각성은 누가 결정하는가?

사안이 심각할수록, 대중의 관심이 쏠려 있을수록 혹시 모를 무죄선고에 대비해 공개를 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논리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법이 생겼더라도 공개는 영장발부와 마찬가지로 판사가 결정해야 하는 사안이어야 하지 않은가?

IMF(국제통화기금) 총재였던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이 호텔 종업원 성폭행 혐의로 뉴욕에서 체포되는 장면이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유럽 국가들은 아연실색했다. “무죄추정원칙도 없는 나라가 어디 있냐”며 흥분했다. 미국은 원래 그런 무식한 나라다.

결론은? 그 종업원이 거짓말을 했던 것이고, 뉴욕 검찰은 기소를 포기했으며, 스트로스 칸은 무죄로 풀려났다. 하지만 몇 명이나 그걸 알고 있는가? (스트로스 칸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게 아니다). 한국 위키피디아를 본 사람들은 아직도 그 사람이 범인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나랑 무슨 상관? 그 이름이 스트로스 칸이 아니라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이름이라고 생각해보라. 당신이 평생 어딜 가나 억울하게 성폭행범, 흉악범 취급을 받는다고 생각해보라.

그런 순간이 와도 당신은 ‘대중의 알권리’를 옹호하겠는가? 대중에게는 순간적인 분노의 출구만 필요할 뿐, 오랜 재판 끝 무죄판결은 관심이 없다. (주위에 물어보면 삼양라면 우지파동 최종판결 내용을 아는 사람 정말 몇 안 된다).

참고로 언론이 공개한 피의자의 사진을 잘 보면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피의자가 입고 있는 후드티의 상표를 경찰이 테이프를 붙여 가려준 것이다. 어느덧 우리나라는 재판받기 전의 인권은 지켜주지 않아도 기업의 권리만큼은 알아서 저다지도 곱게 지켜주는 세상이 되었다.

옥시는 지켜주고 정작 고발하는 소비자들은 고압적인 자세로 야단친 정부를 탓하기 전에 우리가 그런 정부, 사법부를 만들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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