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이 3월 22일 발표한 비례대표 명단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인물은 프로 기사 조훈현이었다. 1번부터 13번까지에서 내가 알 수 있는 사람은 5번 최연혜(전 철도공사 사장)와 9번 전희경(전 자유경제원 사무총장)뿐이었다. 최연혜는 2013년 12월 수서 발 KTX 자회사 설립을 반대하는 노조 파업에 강경 대응하는가 하면 2014년 1월 새누리당 대표 황우여에게 “지역구에서 출마하려고 하니 잘 돌봐달라”고 청탁한 일로 언론의 ‘조명’을 받은 바 있다. 전희경은 뉴라이트 계열인 바른사회시민회의 정책실장으로 일하던 2015년 말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비판했다. “대한민국 부정 세력은 자신들의 미래 전사를 길러내기 위해 교육과 교과서를 틀어쥐고 있다.”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은 그를 ‘영웅’이라고 치켜세웠다. 조훈현 바로 뒷자리인 15번에는 김순례(대한약사회 부회장)가 이름을 올렸다. 그는 지난해 4월 세월호 유가족들을 향해 ‘시체장사’ ‘거지근성’이라는 폭언을 퍼부었다가 대한약사회로부터 ‘직무정지 3개월’이라는 징계를 받은 바 있다.

이런 이름들과 자리를 함께하고 있는 ‘비례대표 조훈현’은 외계인처럼 보인다. 그는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 바둑의 역사에 가장 높게 솟아올라 있는 전설적 기사이다. 1962년 9살의 나이로 세계 최연소 입단, 무려 3번의 전관왕 달성, 통산 최다인 160개 타이틀 보유, 통산 최다승(1942승) 등등. 그래서 바둑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조훈현 하면 ‘바둑황제’ ‘제비’ ‘전신(戰神)’ 같은 별칭을 떠올릴 것이다. 

63세가 되도록 바둑 말고는 달리 한 일이 없는 조훈현은 왜 갑자기 국회로 ‘진출’하려는 것일까? 알파고와 이세돌이 ‘세기의 대결’을 펼치고 있던 지난 3월 10일 조훈현은 새누리당에 입당했다. 그는 그날 오전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스포츠, 문화 분야에서 더욱 더 바둑계를 위해 마지막으로 일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입당했다”고 말했다. 그를 ‘영입’하는 데 큰 공을 들였다는 새누리당 원내대표 원유철은 이렇게 자랑했다. “국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조훈현 국수가 우리 새누리당에 입당했다. 조 9단은 만 9세의 나이로 바둑에 입문한 뒤 세계 바둑계 최다 160회 우승기록을 가진 바둑황제다. 대한민국 바둑 인구는 1천만명으로 두뇌를 겨루는 마인드스포츠로 각광을 받고 있다.” 바둑 인구가 1천만은 안 되고 600만에서 700만명쯤 된다고 해도,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조훈현이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 당을 지지하리라는 ‘계산’을 한 것일까? 나는 “아서라, 말아라”라고 말하고 싶다. 

조훈현은 바둑계에서만 ‘황제’일 뿐이다. 그는 날렵한 행마 때문에 ‘제비’이고 강한 승부사 기질로 현란한 싸움 기술을 발휘하기 때문에 ‘전신’이다. 조훈현이 국회의원 구실을 바르게 하는 데 필요한 정치·외교·경제·사회·문화·법률 등에 관한 지식을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는 국회에 들어가서 바둑을 비롯한 ‘스포츠’와 ‘문화’의 발전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보좌진의 능력을 빌려 입법을 할 것인가, 아니면 유명세를 바탕으로 관료들을 상대로 로비를 할 셈인가? 그가 아니라도 재단법인 한국기원에는 강력한 정치·사회·문화적 영향력을 지닌 총재 홍석현(중앙일보사 회장)이 자리 잡고 있다. 

조훈현은 만 63세이므로 국가가 ‘공인’하는 노인은 아니다. 그러나 바둑계에서는 ‘원로’ 그룹에 속한다. 당선이 확실한 순번을 받은 조훈현이 국회에서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한다면 그를 사랑하던 바둑 애호가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저 사람이 바둑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지 못하고 섣부르게 정치판에 들어가서 국회를 시녀로 여기는 집권세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다니···.” 

조훈현이 새누리당에 들어간 사흘 뒤인 3월 13일 이세돌은 알파고를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두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인공지능’과 사투를 벌이는 이세돌의 모습은 온 세계를 감동시켰다. 이세돌은 비록 1승4패로 패배했지만 바둑을 전혀 모르는 국민들조차 그의 진지하고 성실한 인품, 발군의 창의력, 두려움을 모르는 도전정신에 박수를 보냈다. 

이세돌은 조훈현보다 30살 아래이다. 그가 한국을 넘어 세계인의 ‘영웅’으로 떠오르던 날, 새누리당 당원증을 받아든 조훈현은 과연 무엇을 느끼고 있었을까? 바둑으로 부와 영예를 누리던 그가 초라한 ‘초선 의원’으로 노년을 마무리한다면 그보다 안쓰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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