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비즈니스는 계속될 모양이다. 인공지능을 상대로 한중일 연합 바둑대국은 물론 게임대국도 펼치겠다고 한다. 앞서 ‘설마 별 게 있겠냐’며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결을 무시하는 마음은 오히려 알파고의 연전연승 때문에 AI 포비아 현상을 만들어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을 지켜보는 많은 이들에게 공포와 좌절감을 낳게 했다. 이세돌의 패배가 이어질수록 더욱 심해졌다. 그런데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세돌 신드롬을 낳은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도 했다.

이세돌은 어느새 거대 괴물과 맞서는 전사가 되어 있었다. 영화 ‘터미네이터’의 패러디물에서 이세돌은 존 코너의 이름을 따서 돌코너로 불렀다. 이세돌은 인류 구원을 책임진 저항군의 사령관이 되었던 것이다. 인류의 멸종을 가져 올 인공지능 괴물에 맞서는 그를 응원하는 자신을 보면서 우리들은 역시 인간이었음을 느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공포의 인공지능에 맞서는 이세돌의 1승은 인류의 구원 희망이었다. 희망 없는 절망의 순간에 포기하지 않고 해법을 찾아낸 그는 기계와는 다른 인간정신을 몸소 보여준 선지자 같았다.

어쨌든 알파고의 승리로 인간만이 할 수 있을 것 같던 바둑도 이제 인공지능에게 내줬다는 인식은 많은 이들에게 무력감에 빠지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공포와 두려움을 갖는 것은 오히려 자본과 비즈니스 주체들에게 박수 칠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포와 불안은 인위적으로 과잉 부여된 면이 많았다. 그것이 자본과 비즈니스 모델에게는 매우 유리하기 때문이다. 일주일 동안 구글의 주식 자산은 58조원 늘어났다는 점을 보아도 잘 알 수가 있다. 이세돌이 2억 원 즈음을 얻었을 때 구글은 방송부가콘텐츠 수익을 포함하여 천억원을 챙겼다.

이러한 인식에는 인간이 이성적 합리적 존재라는 점을 전제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단지 이성적인 능력만이 인간다움인지는 의문이다. 당연히 인간은 머리만 둥둥 떠다니며 연산만 하는 존재는 아니다. 피와 살이 있고, 감정과 체화적인 영혼이 있다. 그런 면에서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은 일찍부터 틀렸다. 더구나 알파고는 이미 반칙을 하고 있었다. 1200대의 컴퓨터를 이용하여, 필요한 최적의 해법을 경쟁을 통해 찾아 적용했기 때문이다. 이세돌은 홀로 대국을 했다. 바둑에 훈수는 없다. 알파고는 무한자원을 사용하고 있던 셈이었다. 알파고는 스스로 바둑알을 움직이지 못했으며 인간이 꽂아둔 전기 에너지와 인간의 몸체가 없었다면, 대국을 둘 수가 없다. 만약, 정당한 대국이라면 똑같은 조건일 갖추고 바둑을 둬야 한다.

▲ 지난 15일 이세돌 9단이 인공지능 알파고와 마지막 대국을 펼친 후 기자회견을 했다. 사진=이치열 기자
무엇보다 인공 지능 담론은 게임이 아니었다. 일자리 공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인공지능을 통해서 실직이 될 것이라는 미래 상실감이다. 많은 언론 미디어에서는 인공지능의 등장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라는 점을 앞 다투어 보도했다. 의료, 법률, 금융, 언론, 교육 등등 주로 지적 노동을 하는 이들이 소멸할 것이라는 내용이 지배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엄청난 산업적 수익을 낳을 수 있다고 앞 다투어 다뤘다. 이에 맞추어 정부도 대대적인 지원과 투자 중심의 정책 계획을 밝혔다. 이러한 정책 발표에는 인공지능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어 자본과 비즈니스가 버블을 일으키는데 일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지능 담론은 과장되어 있다. 알파고의 한계는 명확하다. 인공지능 발전은 일순간에 해결될 수도 없다. 인간과 같은 인공 지능을 갖기는 불가능하다. 백년 아니 천년이상 걸릴 것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SF영화에서 단골로 그리는 인공지능이나 사이보그가 인류 이상의 능력을 구가하는 것은 요원하다. 연산 작용을 넘어서 산적한 문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인간을 온전히 대체하려면 자아의식의 인공지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한계와 결핍으로 자아의 존립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존재이지만, 인공지능은 그러한 결핍과 한계를 통해 자신을 인지하지도 욕망하지도 못한다. 결핍이 무엇이고, 그것의 만회를 통한 자존감 회복에 관심이 없다. 인공지능은 스스로 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공지능과 인간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인간은 결핍감 때문에 그것을 넘는 인공지능을 만들어냈지만, 인공지능은 또 다른 인공지능을 만들어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공지능 기업들은 이러한 사실을 감춘다. 더구나 인공지능 분야도 각 기업마다 특화되어 있다. 알파고의 경우에도 범용이기는 하지만 딥러닝을 통해 특정 능력이 강화된 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빅 데이터를 활용한 일정한 학습 가능 영역에만 가능하다. 만약 인간에 가까운 인공지능이 되려면 이 모든 기업을 다 합병하거나 해킹하여야 하겠다. 그러나 그것마저 여의치 않을 것이다. 가용자원에 비해서 타산을 맞추기도 어렵다. 오히려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이나 로봇의 등장으로 인간다운 면모들이 더욱 가치를 갖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자본과 비즈니스는 그것마저도 상품화 하려는 태세이다. 감정 노동을 더 격화시키겠지만 불완전성은 인간적인 가치와 행태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구글은 이세돌 9단과 가진 대국을 통해서 목적을 이뤘다. 이미 이루고도 남았음이 분명하다. 너무 빤한, 글로벌 기업이 자본을 끌어 모으기 위한 퍼포먼스였고, 차세대 산업패러다임 찾기에 부심했던 국가나 기업들에게 복음처럼 다가오게 되었다. 그러한 자본의 쏠림은 인공지능을 알수 없는 거대한 괴물로 만들어 놓아야 가능했다. 이세돌은 인류를 대변하는 저항군 사령과도 아니며 골리앗을 상대로 일전을 벌이는 연약한 다윗도 아니었다. 단지 인간과 두는 바둑을 룰을 깨면서 기계와 뒀을 뿐이다. 사람과 사람이 게임을 즐기기 위해 만든 바둑을 또 다른 방식으로 돈 벌이를 위해 활용했을 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본이 사람을 희생으로 그 수익을 증대하기 위한 방편뿐이었다. 앞으로도 그러한 패턴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수용하라고 말한다. 또한 미디어는 물론 국가 정책도 이를 진리로 말한다. 더구나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이 맞다고 말한다. 인공지능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만들기 때문에 인간의 능력이나 의지에 달려 있다. 무엇보다 그러한 인간의 능력이나 의지는 일반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자본과 그 시스템을 장학한 소수의 손에 좌우된다.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통제하고 견제할 것인가가 중요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 소수가 수많은 이들의 삶을 희생하면서 수익을 증대시키려는 퍼포먼스가 인공지능 버블이기 때문이다. 물론 버블 뒤에 파산하는 이들은 바로 힘없는 개인들이다.

정부가 엄청난 예산을 들여 인공지능에 집중하려 한다. 창조경제 ICT 정책과 결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관련 조직이나 이해관계자들은 예산을 챙기기 위해 달려들고 있다. 섣부른 인공지능 산업정책 붐에 부화뇌동하기 보다는 그것에 대한 쓸데없는 예산소모를 경계하고 교통정리를 해주는 것이 정책의 역할이어야 할 것이다. 기업비즈니스논리와 금융자본의 이익논리가 공공 정책을 뒤흔드는 일을 방어해야 한다. 차라리 그 돈으로 인간에 대한 연구와 인간다움을 성찰하고 풍성하게 만드는데 써야 할 것이다. 알파고조차 인간의 뇌 작용을 연구한 결과 만들어졌다. 이세돌 9단을 통해 인식한 것은 새로운 바둑기보가 아니라 인간다움에 대한 성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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