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의 복고열풍이 출판시장에도 불어 온 것일까. 1988년 교보문고 자료에 따르면, 베스트셀러 1위부터 3위를 서정윤의 ‘홀로서기’, 에리히 캐스트너의 ‘마주보기’,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등 시집이 휩쓸었다.

2016년 2월 말을 기준으로 교보문고 종합 200위까지의 책들 중에도 김소월의 ‘진달래꽃’ 초판본,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백석의 ‘사슴’ 초판본 등 시집들이 돋보인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시집의 판매가 전년 대비 36% 신장했다고 하는데, 가히 ‘시의 전성시대’라 부를 만 하다.

1988년과 다른 점이라면, 2016년에는 신춘문예보다 SNS가 시인들의 등용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SNS를 통해 인기를 얻은 글이 출판사 편집자의 눈에 띄어 책을 출간하는 식으로 말이다. 여러분도 당장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짧은 글과 사진을 올려보시라. ‘시밤’의 작가 하상욱처럼 대한민국 대표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에 출연하게 될지도 모르니.

이 같은 현실에 개탄한 원로 시인들이 나섰다. 최근 계간 ‘시인수첩’에서 주최한 ‘한국 현대시의 반성과 전망’ 좌담회에서 이건청 시인은 “젊은 시인들이 시를 존재 자체가 겪는 욕구불만의 배설체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한 것이다.

역시 패널로 참여한 오세영 시인도 ‘일상생활의 단면을 그대로 베껴놓곤 은유도 상징도 없이 쉬운 언어로 이야기’하는 현실을 비판했다. 이외에도 많은 쓴소리가 이어졌지만, 꼰대들의 얘기라고만 치부하지 말고 젊은 시인들이 원로 시인들의 말을 경청했으면 좋겠다.

한편으로 콜라보레이션 작업도 눈길을 끈다. ‘세기말 블루스’를 쓴 신현림 시인의 ‘신현림의 미술관에서 읽은 시’가 바로 그 것이다. 신현림 시인이 눈과 마음으로 담아온 그림과 시들을 한자리에 모은 이 책은 미술관에서 만난 작품 한 점에 연상되는 시 한 편을 함께 수록하고, 그녀의 해설을 덧붙였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41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판화가 오윤의 그림에 그의 오랜 친구였던 정희성이 1986년 오윤을 떠나보내며 쓴 시 ‘판화가 오윤을 생각하며’를 매칭하는데, 민중들의 끈끈한 삶을 판화의 예리한 칼맛으로 보여준 오윤의 예술혼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또한, 낮고 소외된 자들에게 한결같이 귀 기울인 신경림 시인의 ‘다시 느티나무가’라는 시에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연결함으로써, 춥고 곤궁한 날을 보내는 이들에게 시련 끝에 더욱 단단해지는 시간의 힘을 가만히 일러주기도 하고,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과 폴 엘뤼아르의 ‘그리고 미소를’을 조합하며 고흐의 안타까운 생에 잠 못 이룬다고 고백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백석, 윤동주, 김소월, 한용운 등 한국 현대시문학사의 거목은 물론 황지우, 신경림, 이성복, 장석주, 황인숙, 이문재, 김사인, 백무산 등 중견 시인들과 김민정, 유희경, 김명인, 박소란, 곽효환, 김성규, 김경후, 임경섭 등 한국 시문단의 든든한 신예들까지 참여한 대형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시와 그림은 신현림 시인이 외롭고 허전할 때, 두려움과 불안에 빠졌을 때 그녀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주었다. 스무 살 즈음, 서양화과 지망생에서 디자인과 입학과 자퇴, 폐병과 심각한 불면증을 앓으며 국문학과 입학생이 된 독특한 이력은 세계명화와 미술서 탐독으로 이어졌고, 이는 시를 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미술관 여행으로 허기진 영혼을 살찌우곤 했다고 신현림 시인은 고백한다. 그렇게 다양한 그림을 보며 받은 영감은 시가 되었고, 그림과 시를 함께 엮은 한 권의 책으로까지 탄생한 배경이 되었다.

예이츠의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온다’를 제일 좋아한다는 신현림 시인은 북클라우드와의 인터뷰에서 시와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림은 ‘그리워하다’에서 나온 말로, 시에서 그리움이란 최고의 감정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쉴 틈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그림과 시는 외로움과 쓸쓸함을 달래 줄 좋은 휴식처가 될 수 있습니다.”

왠지 오는 주말에는 영화 ‘동주’를 보고난 후 부암동 윤동주 문학관에 갔다가 서울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해야만 할 것 같다. 그래도 힐링이 되지 않으면 서점에 들러 ‘오윤 전집’과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을 사서 읽으며 청와대 앞을 거닐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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