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남한 국민은 너나 할 것 없이 사무삼과(四無三過)에 빠져 있다.  핵에 대해서 무지하고 무관심하고 무감각하고 무민족적이다. 핵에 대해서 인간 이성을 과신하고 기계의 정밀성을 과신하고 군사력을 과신한다.”

돌아가신 리영희 선생이 1988년에 썼던 글 가운데 일부다. 리 선생은 “무지란 핵 기술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땅에 남의 핵 무기가 들어와 있으면 안전하다고 착각하는 무식함”이라고 비판하곤 했다.

‘우상 파괴자’를 자처했던 리 선생이 돌아가신지 5년이 지났지만 리 선생의 글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 큰 울림을 준다. 최영묵 성공회대 교수는 최근 출간된 ‘비판과 정명’에서 “리 선생은 평생 우상 타파를 위해 싸워왔다”면서 “리 선생이 생각하는 우상은 체제와 구조였고 그 체제의 작용으로 인한 우리의 생각 없는 상태이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리 선생의 글은 이 생각 없음을 생각하게 하기 위한 고투였다”는 분석이다.

리 선생이 살아있다면 북한의 계속되는 핵 실험과 위협적인 로켓 발사, 미국의 사드 배치 논의와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 일본 등의 복잡한 이해관계의 충돌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리 선생은 생전에 쓴 글에서 한반도 핵·미사일 위기의 구조적·역사적 요인을 살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원인 제공자가 미국이기 때문에 해결도 미국의 손에 달려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리 선생의 분석과 비판은 지금도 유효할 뿐만 아니라 절실하다.

리 선생은 “북핵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핵 협상 약속 파기 문제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의 핵 개발은 남한의 핵 문제와 무관하지 않고 미국의 북한에 대한 핵 공격 시도와 직접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다. 리 선생에 따르면 1945년부터 1980년까지 미국 군부가 핵 폭탄 사용을 결정했거나 구상, 협박 또는 준비한 일이 26회나 있었다. 이 가운데 한반도가 목표가 됐던 게 5회나 된다.

고 리영희 선생이 2008년 6월 전남대에서 김대중학술상 수상 뒤 가진 특강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다. ⓒ 연합뉴스
북한의 핵 무장의 원인을 미국에서 찾는 이유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 미국과 일본은 중국과 러시아가 남한과 국교를 수립한 것에 상응하는 북한과의 호혜적 조치를 거부해 왔다. 둘째, 미국의 핵 무기가 남한에서 철수됐다고 밝힌 건 최근의 일이다. 셋째, 세계 최대 규모의 팀 스피릿 훈련은 북한 입장에서 대북한 핵 공격 연습으로 비쳤다. 넷째, 남한의 핵 능력이 북한보다 월등하며 미국은 핵 에너지 기술과 시설을 남한에 강제적으로 판매·지원해 왔다.

리 선생은 “휴전 협정을 평화 협정으로 바꾸고 미군이 철수했다면 북한이 구태여 핵 무장에 나설 이유가 없었다”고 지적한다.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승인하고 적대관계를 선린관계 내지 일반적 국가관계로 해소·발전시킬 수 있었을 텐데 북방 3국(북중러) 군사 동맹체의 일방적 해체와 그로 말미암은 핵 우산의 상실, 미국의 남북한 교차 승인 거부, 대북한 전쟁 위협 속에서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건 핵과 미사일 밖에 없었다”는 분석이다.

리 선생은 “미국 정부는 미국의 세계 패권 질서 구조의 종속적 지위를 거부하는 국가와 정부, 국민, 지도자에 대해 그들의 핵 시설을 직접 행동으로 공격하거나 대리자로 하여금 파괴적인 공격을 하게 한 반면, 친미주의적 국가에 대해서는 조약 위반을 묵인하는 태도를 취해 왔다”면서 “북한은 국제 사찰의 조건으로 미국이 남한에 배치한 핵 무기 전면 철수와 한반도의 비핵지대화, 북한에 대한 핵 무기 불사용 공약 등을 시종일관 요구했다”고 강조했다.

미국 군부가 북한에 대해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다고 분석한 대목도 흥미롭다. 한국 전쟁은 미국 역사상 미국 군대가 치를 전쟁 중에 처음으로 비긴 전쟁이었다. 판문점 정전회담에서 40년 이상 미국 대표들은 수모를 겪었다. 리 선생은 “미국 고위 장성들의 필수 코스로 한국 근무 기간에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일”이라며 “개인적인 모욕감이  이후 북한에 대한 광적 보복 심리로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분석했다.

리 선생은 “미국 군부의 관심은 북핵 제거가 아니라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는 데 있다”면서 “단독 패권 체제 속에서 북한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세력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한은 관계 개선을 원하지만 미국은 북한과의 평화 공존을 원하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리 선생은 “북한의 지도자 집단을 예측불허의 광인 집단으로 단정·경멸하는 미국 군부와 한국인의 일반적인 인식 착오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북한을 커다란 위협으로 간주해 왔다. 북한이 미사일을 개발할 경우 일본과 한국이 미국의 핵 및 미사일 보호 체제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있고 한국에 대한 미국의 영구적인 군사적 또는 정치적 지배권의 붕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군사예산의 증대를 위해 무기·장비의 소모와 전쟁 분위기 조성을 부추긴 측면도 있다. 미국 군부 강경파는 제네바 합의를 파기할 수 있는 구실을 찾았다. 합의 파기의 책임이 북한과 미국 양쪽에 있다는 이야기다.

미국은 핵 보유국에 대해 적용하는 핵 선제 공격권을 북한에 적용해 왔다. 미국은 45개국과 군사협정을 맺고 이들에 대한 보호 의무로 최종적으로 이들의 가상 적국에 핵 무기 사용을 포함하고 있다. 핵 무기 사용 원칙은 일반적으로 핵 무기 대 핵 무기지만 북한에는 이런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북한에 핵 무기가 없었던 상황에서도 재래식 무기에 맞서 핵 무기 선제 공격을 준비한 건 미국의 횡포와 오만의 표시였다는 게 리 선생의 분석이다.

최근 한반도 상황은 리 선생이 분석하고 예견했던 그대로다. 미국은 애초에 한반도 평화에 큰 관심이 없고 사드 배치는 북한의 로켓 발사와 무관하다. 미국의 관심은 남북 대치 상황을 이용해 남한과 일본을 미국의 우산 아래 동맹으로 묶고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것이다. 북한의 책임도 크지만 이 모든 건 미국이 의도한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다. 리 선생이 살아있다면 백척간두에 놓인 한반도의 위기 상황에 통탄하지 않았을까.

리 선생이 평생 싸워왔던 우상 가운데 가장 강고한 것은 북한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에서 비롯한 반공 이데올로기였다. 김정은이 전쟁광이라서 핵 실험을 하고 로켓을 쏘는 게 아니라 체제 붕괴의 공포에서 비롯한 몸부림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근본적으로 남과 북의 대결 구도를 해소하지 않는 이상 한반도에 평화는 없다는 게 리 선생의 통찰이었다. 남한이 미국의 우산 아래 숨어 전선을 확대하는 게 결코 해법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다시 ‘전환 시대의 논리’와 ‘분단을 넘어서’, ‘핵 위기의 구조와 한반도’, ‘휴전선 남북에는 천사도 악마도 없다’를 다시 찾아 읽는 건 지금은 당연한 상식이 된 리 선생의 통찰이 아직 “권력의 상식이 되지 않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사드 배치와 개성공단 폐쇄, 대화를 단절하고 북한을 고립시키는 박근혜 정부의 벼랑 끝 외교안보 행보는 역사의 퇴행일 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재앙으로 몰아넣을 위험천만한 도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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