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일부터 중앙일보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증언록은 중앙일보 기자들과 작가까지 동원돼 114회까지 이어졌고, 웹툰으로 재구성됐으며 책으로도 만들어질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하지만 증언록 곳곳에는 역사왜곡과 미화의 흔적이 보입니다. 미디어오늘은 이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증언록의 이면을 살펴보고 중앙일보가 하지 않은 김종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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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1963년 12월17일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군인 박정희가 군복을 벗고 민정을 시작한 시점이다. 동시에 ‘빨갱이’라고 공격받던 박정희가 좌익혐의를 벗으며 정권 비판자들을 ‘빨갱이’로 몰기 시작한, 소위 ‘공수교대’가 이뤄진 시점이다. 박정희의 변신은 취임 3일전인 63년 12월14일 간첩죄 혐의로 황태성을 죽이며 확실해졌다. 

황태성은 북한 무역성 부상(차관급) 출신으로 박정희의 셋째 형이자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JP)의 장인인 박상희(남로당원)의 친구이며 박상희와 그의 부인 조귀분을 소개해 준 사람이다. JP 중앙일보 증언록 ‘소이부답’에 따르면 박정희는 어려서 황태성에게 ‘형님, 형님’하며 친하게 지냈다. 익히 알던 사람들이 남쪽에서 쿠데타에 성공했기 때문에 황태성은 밀사를 자처하게 됐다.  

JP는 증언록에서 황태성을 “밀사가 아닌 간첩”이라고 했고, “박정희와 자신은 황태성을 만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20일 미디어오늘은 황태성 사건을 분석한 책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의 저자 김학민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만나 황태성 사건에 대해 들었다. 그는 3년 간 자료를 수집해 책을 썼다.

   
▲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저자 김학민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 사진=김학민 제공
 

쿠데타 100일 쯤 뒤인 1961년 8월31일 황태성(당시 56세)은 임진강을 건너 서울에 도착했다. 황태성은 박정희와 JP를 만나러 고향사람 김민하(당시 중앙대 강사), 자신의 조카딸과 조카사위 임미정과 권상능을 만났다. 휴전선을 넘은 지 한 달 반이 지난 61년 10월15일 오전 당시 중앙정보부(중정)장 JP는 장모 조귀분의 전화를 받고 황태성의 소식을 듣게 됐다. 

JP는 황태성을 만났나? 

JP는 증언록에서 “박정희와 나는 황태성을 만날 까닭이 없고, 만나지 않았다”고 했다. 황태성은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 당시 중정 본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김학민 이사장은 “김형욱(제4대 중정부장)은 JP 대신 박문병이 황태성을 대신 만났다고 했고, 당시 대화록도 있다”며 “JP도 그동안 김형욱의 발표를 따랐다”고 말했다. 박문병은 중정에 파견된 치안국 경감이다.  

하지만 JP는 증언록에서 “황태성이 내 얼굴을 본 적이 없어서 박 경감을 위장시켜 황태성을 신문해보기로 했지만 그와 몇 마디 말을 나누던 황태성이 대뜸 ‘가짜는 저리 가라’고 소리쳤다”고 말을 바꿨다. 황태성이 중정에 잡힌 게 61년 10월20일인데 JP의 얼굴을 몰랐다는 건 현실성이 떨어진다. 

김 이사장은 “8월31일에 내려왔으면 쿠데타 두 달 반이 지난 시점인데 JP 얼굴을 모를 수 없고, 모르고 내려왔더라도 이쪽 신문만 봐도 알게 된다”고 말했다. 황태성을 신문한 대화록은 있는데 박문병이 신문하지 못했다면 JP가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 JP는 박정희와 황태성이 만난 사실도 부인했다. 

박정희도 황태성을 만나지 않았을까? 

김학민 이사장은 미국 정보기관 G2 비밀정보원 출신 CIA요원 래리 베이커에게 진상을 묻는 문명자(워싱턴 특파원, 백악관 출입기자)의 기록을 소개했다. 여기서 베이커는 “황태성이 온 다음 두 달 간 박정희와 황태성은 반도호텔에서 적어도 세 번 만났다”며 “박정희는 내가 아는 게 너무 많아 한국에 남아있는 것을 원치 않아 추방했다”고 밝혔다. 

김 이사장은 “역대 모든 정권이 피라미 간첩 하나만 잡아도 언론에 대서특필하는데 황태성은 거물간첩이라면서 언론에 공개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JP는 왜 자신과 박정희가 황태성을 만나지 않았다고 주장할까? 1963년 10월10일 동아일보에 따르면 윤보선이 황태성이 공화당을 조직했고 자금을 제공했다고 폭로했다. 쿠데타 세력은 황태성과 선을 그어야 했다.

또한 JP는 1961년 9월 서해 군사분계선 부근 용매도에 강성국, 김석순 등 남한 대표를 보내 남북대화를 시도했던 사실도 몰랐다고 선을 그었다. 김 이사장은 “당시 남에서 먼저 제의해서 올라갔는데 준비가 부족해 대화 진전이 되지 않았고, 황태성의 남한 방문은 답방 성격이 크다”고 말했다. 

쿠데타 세력이 남북대화를 위해 밀사를 보냈고 답방 형식으로 황태성이 내려왔다면 그에게 간첩 혐의를 씌울 명분이 사라진다. 따라서 JP가 용매도 회담부터 “몰랐다”고 끊어내야 했다는 게 김 이사장의 분석이다. JP는 증언록에서 용매도 회담에 대해 “육군첩보부대(HID) 자체 대북공작”이라며 “중정과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 이사장은 “박정희나 수뇌부의 재가 없이 대북접촉을 한다는 건 당시 분위기로서 말이 안 된다”며 “서해안 휴전선에서 미군이 촘촘하게 감시하고 있을 때인데 HID가 몰래했다는 것도 현실성이 없다”고 말했다. 이번 증언록 뿐 아니라 그동안 황태성과 관련된 기록 중에서도 현실성이 떨어지는 부분은 더 있다. 

김성곤은 왜 황태성을 못 만났을까?

황태성은 서울에 내려와 가장 먼저 김성곤(남로당 재정위원, 훗날 공화당 재정위원장, 쌍용그룹 창업주)을 만나러 갔다. JP는 증언록에서 “남로당 재정부장을 지낸 김성곤은 황태성과 친한 사이였지만 김성곤이 일본 출장 중이어서 만나지 못했다”고 했고, 조갑제의 ‘박정희 전기’와 김형욱의 ‘김형욱 회고록’에도 김성곤이 IPI(국제언론인협회) 회의 참석차 외국에 나가있어 황태성을 만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이에 대해 김 이사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70년대 초까지 국민의 99%는 여권조차 없었고, 공항에는 출입기자들이 있어 해외 나가는 사람들을 신문 출입국동정란에 실었다”며 “61년 5월30일~6월3일 해외에 나갔다 왔고, (황태성은 8월31일 내려와 10월20일 중정에 연행) 같은해 10월24일 출국한 기록이 있을 뿐 황태성이 내려왔을 때 김성곤은 국내에 있었다”고 말했다. 

문명자의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 따르면 김성곤은 61년 5월 IPI 총회를 마치고 워싱턴으로 가 5·16에 대한 미국의 반응을 살폈다. 그 결과 김성곤은 미국이 쿠데타를 지지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김 이사장은 “미국이 쿠데타를 지지한다는 것을 안 이상, 김성곤은 당연히 황태성을 피했을 것”이라고 봤다.    

   
▲ 1930년 조선공산당 활동 혐의로 일제에 체포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당시 황태성. 사진=국사편찬위원회
 

황태성 소문 바로잡기  

황태성은 중정에 잡힌 지 2년이 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다가 1963년 말 대선 직전에 알려졌다. 북한 밀사였기 때문에 비밀에 둘러싸였고 정치 지도자들은 제 입맛대로 각색해 소문만 무성했다. 김 이사장은 몇 가지 잘못 알려진 황태성 이야기를 바로잡았다. 

조갑제 저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는 황태성이 김천 어모면에 살았고, 부유한 집안이라 아들과 딸 모두 대구로 유학을 보냈으며 황태성은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했다고 돼 있다. 하지만 김 이사장은 “황태성은 김천 어모면에 산 적이 없고, 딸은 아예 없으며 아들 둘은 대구가 아니라 서울과 일본에서 유학했다”며 “황태성은 계성학교가 아닌 상주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서울로 올라와 경성제일고보를 다녔다”고 바로잡았다. 황태성 학교에 대해서는 JP도 증언록에서 경성제일고보를 다녔다고 했다.  

영남일보 연재물 ‘대구경북 근현대 인물사’에는 황태성이 박정희의 결혼식 주례를 봤다고 돼 있다. 박정희는 1936년 김호남과 결혼했고, 1950년 육영수와 재혼했다. 김 이사장에 따르면 황태성은 1936년 ‘김천그룹 재건협의회’ 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 있었고, 1950년에는 월북해 주례를 설 수 없었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박정희가 신경군관학교로 떠날 때 황태성이 조언을 했고, 박정희가 휴가 나올 때마다 황태성을 찾아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이는 독립운동가 황태성의 영향을 받은 박정희가 일본군으로 위장한 독립운동가였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지난 10월 새누리당 논평에서 박정희를 비밀독립군이라 주장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김 이사장은 “박정희가 혈서를 써서 신경군관학교에 지원한 건 1939년인데 황태성은 1935년부터 1940년까지 대구형무소에 수감돼 있어 조언을 구할 처지가 아니었다”며 “공산주의 활동으로 투옥됐고, 나와서도 요시찰 인물로 감시받는 독립운동가에게 일제 괴뢰국 장교가 찾아와 조언을 구할 리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황태성은 간첩인가?

JP는 “황태성은 간첩죄로 처형됐다”며 간첩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황태성을 간첩으로 규정하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다. 황태성은 61년 10월20일에 연행됐고 재판은 12월1일 시작됐다. 12월27일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고, 당시 재판은 단심제였다. 김 이사장은 “그때 죽였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었는데 형 집행은 늘어지게 된다”고 말했다. 

쿠데타 세력(국가재건최고회의)은 1962년 1월 단심제를 3심제로 바꾸는 결정을 했다. 제도를 정비해 같은 해 6월부터 3심제가 시행됐다. 김 이사장은 “소급적용 대상도 아닌데 6개월을 내버려둔 황태성에 대한 2심을 시작했다”며 “밀사니까 북한과 접촉하는 통로로 이용했을 수도 있고, 내부에서 죽일지 말지 논의할 시간을 버는 효과도 얻은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6월 한겨레는 황태성 재판기록을 다루며 황태성이 1963년 법정에서 “소위 적국간에도 (밀사를) 사형치 않는 것이 국제법상 관례인지라 하물며 괴집(괴뢰집단)에 가담했다 하더라도 극형 선고 필요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며 “원심 판결 후 전향하는 탄원서를 제출했으므로 대한민국 품 안에 돌아오는 피고인에 대해 극형을 처함은 부당하다”고 한 사실을 보도했다. 

하지만 전향서는 황태성의 법률대리인 홍승만이 작성한 것이다. 김 이사장은 “황태성이 전향했으면 왜 사형을 당하느냐”며 “황태성은 밀사로 내려왔고 끝까지 전향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황태성이 군사기밀 등을 탐지해 북에 알린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황태성은 1심과 2심 모두 사형판결을 받았지만 대법원에서 결과가 뒤집혔다. 당시 법률대리인 홍승만도 눈여겨볼 인물이다. 홍승만은 항소심을 앞두고 선임된 변호사로 박정희의 법률대리인이기도 했고, 박정희 측근 김성곤, 백남억과 함께 좌익 활동도 했던 인물이다. 훗날 공화당 국회의원이 된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글 ‘황태성 사건과 박정희의 레드 콤플렉스’에서 “단심으로 사형판결 받은 황태성 사건을 3심제로 돌린 것이나, 대법원에서 원심을 파기한 것이나, 홍승만 변호사가 변론을 맡아 파기환송을 이끌어내는 등 맹활약을 한 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황태성을 살려 둘 필요가 있었다는 뜻이다. 대법원에서 파기환송해 황태성 재판은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고등법원으로 내려온 사건은 다시 사형, 두 번째 대법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KBS는 김일성이 준 돈으로 만든 언론”

황태성은 2년간(1961~1963년) 뭘 했을까? 세간의 루머와 당시 야당의 주장은 황태성이 20만 달러를 공작금으로 가져와 공화당 창당 작업으로 사용했고, 일부는 KBS 현대화 자금으로 썼다는 내용이었다. 김 이사장은 “JP의 증언으로 이중 일부가 사실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황태성 재판 기록에 따르면 황태성은 20만 달러가 아닌 2669달러만 가지고 남으로 내려왔다. 김 이사장은 “20만달러는 황태성 이후 내려온 간첩 이만희의 공작금으로 추정된다”며 “황태성은 김성곤 등 남쪽에 남로당 출신 지인들이 많으니 돈을 많이 가지고 내려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JP는 증언록에서 “간첩들에게 압수한 20만 달러를 당시 오재경 공보부 장관에게 넘겨 KBS 개국을 지시했다”며 “결과적으로 김일성이 KBS TV개국에 큰 역할을 한 셈”이라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여기에 황태성의 돈도 포함돼 있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공화당 자금은 한일회담과 4대의혹 사건으로 마련한 돈이 비중 있게 쓰였다. 

민주공화당, 공산당과 닮았다

김학민 이사장은 “61년 중정에서 황태성을 연행할 때 중정요원들이 큰절 올리고 모셔갔다”며 “김민하, 권상능, 황유경(황태성 손녀)도 모두 황태성을 밀사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황태성이 공화당 조직에 도움을 줬다는 주장이 있다. 큰절까지 하고 모셔간 밀사 황태성을 2년 간 살려둔 이유로 볼만한 정황이다. 

김 이사장은 “공화당은 당시 획기적인 정당으로 크게 두 가지가 공산당 조직을 벤치마킹한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첫째는 사무국 중심의 정당이라는 점이다. 김 이사장에 따르면 이전 자유당과 민주당과 다르게 사무국이 있고, 사무원 공채를 시작했다. 공화당 사전조직인 ‘재건동지회’는 중앙당과 지방조직을 만들기 위해 교수, 언론인, 금융인 등을 포섭했다. 

김 이사장은 “공산당은 사무국 서기장 중심으로 일상적인 사무를 가지고 전국 조직이 가지는데 이전 정당은 의원들만 회의 때 모이는 정도였다”며 “지금 정당에 있는 사무총장이 서기장 비슷한 것이고 사무총장의 힘이 세다”고 말했다. 

래리 베이커도 당시 “박정희 정권에는 각 행정기구에 군사위원들이 배치돼 있는데 평소에는 상급자의 지휘를 받지만 위급한 상황에는 박정희에게 직접 보고를 하는 이중계통”이라며 “이중계통은 중정에도 있는데 이는 공산당의 정치위원 제도와 같은 것”이라고 밝혔다. 

두 번째는 당원교육을 하는 것이다. 김 이사장은 “지금 정당들도 당원교육 잘 못하지 않느냐”며 “당원교육하고 정기적으로 재교육하는 것은 공산당에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공화당은 최초로 연수원을 만들어 민정당까지 이어진다”며 “당시 남로당 출신이 많아 황태성이 모든 것을 지도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북한노동당 조직이나 운영방식을 참고했다고 볼 수는 있다”고 말했다.  

“아까운 사람인데 꼭 사형시켜야 하나”

김 이사장은 “황태성에 대해 박정희와 박정희 주변사람들의 생각이 달랐다”며 “JP 역시 황태성 월북 이후에야 박정희의 친척이 된 것이기 때문에 쉽게 ‘죽이네 마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 김종필 전 국무총리
@연합뉴스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에 따르면 1963년 12월 초 김형욱은 박정희에게 사형집행 승인서류를 내밀었다. 박정희가 “아까운 사람인데 꼭 사형시켜야 하나”라고 두 번이나 되물었지만 김형욱은 “미국과 야당에 몰리지 않으려면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답했다. 

1963년 12월14일 오전 인천의 한 군부대에서 황태성은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순진했다. 5·16 세력이 함경도와 경상도 출신, 육사 5기와 8기 간 갈등으로 권력이 불안했고 미국의 의심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북은 섣불리 밀사를 보내 남쪽을 파악하려 했다. 

밀사를 죽이는 것은 전쟁선포와 다름없다. 남북관계는 ‘냉전’이 유지돼 살벌해졌고, 휴전선에서 우발적 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1968년 1월21일엔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 부대 김신조 일당이 “박정희 모가지 뗄 임무”로 내려오기도 했다. 황태성의 죽음은 남북관계 악화와 박정희 정권 이후 본격화할 간첩조작 사건의 서막이었다. 

* <김종필에게 묻는다> 연재목차

1. 증언록 다시보는 이유와 5·16

2. 한일회담

3. 4대의혹사건과 공화당 창당

4. 황태성 사건, 첫번째 간첩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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