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에 동참하는 건 처음이었다. 하루를 함께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굶는 이들이 힘들어 할 때, 하지만 취재도 해야 하니 그들의 힘이 남아있을 때 해야 했다. 단식은 3일차에 첫 고비가 찾아온다고 한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한종선, 최승우씨가 국회 앞에서 곡기를 끊은 지 3일째인 지난 9일 24시간 단식에 참여했다. 

“옷 단디 입고 오세요.” 한종선씨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국회의사당역 6번출구와 국회정문 사이 한평 남짓 공간의 삶은 추위와의 싸움이었다. 지난 9일 농성장에는 천막 한 장 없이 이불 두 장 뿐이었다. 9일 오전 8시 담배한대로 하루를 시작한 한씨는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이들은 단식농성 공간 맞은편 건물 1층 화장실을 사용한다. 그곳엔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다. 휴대용 가스버너로 하루 종일 물을 끓인다. 마실 물과 씻을 물이다. 물통에 담아 이불 속에 넣어두면 난로 역할도 한다. 오전 8시20분, 따뜻한 물을 채운 물통을 들고 신호등을 건넌 뒤 머리를 감은 한씨는 20여분 후 길을 건너왔다. 

   
▲ 9일 오전 따뜻한 물을 들고 씻으러 가는 최승우씨. 사진=장슬기 기자.
 

지난 7일부터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두 명은 ‘내무부훈령에 의한 형제복지원 강제수용 등 피해사건의 진상 및 국가책임 규명 등에 관한 법률안(형제복지원 특별법)’ 제정을 위해 물과 소금으로만 살기로 작정했다. 

형제복지원 특별법이 국회에 방치된 지 1년6개월, 피해자 한종선씨가 처음 국회에 1인 시위에 나선 지 3년7개월, 형제복지원의 ‘만행’이 세상에 알려진 지 29년이 다 돼 간다. 지난 9일 19대 정기국회가 끝났고, 10일 임시국회가 소집됐지만 여야는 의사일정도 합의하지 못했다. 내년 있을 총선 탓에 19대 국회 안에 법안이 통과되기 쉽지 않아 보인다.

   
▲ 끓인 물을 물통에 담아 이불에 넣어두면 난로 역할을 한다. 사진=장슬기 기자.
 

한씨가 씻으러 간 사이 최씨는 다시 물을 끓였다. 최씨가 하고 있던 하얀 마스크는 밤사이 까맣게 변했다. 최씨는 “씻으러 가면 코에서 시커먼 물이 나온다”며 “새벽에 춥기도 하고 차 소리에 놀라서 깨기도 해 설잠을 잔다”고 말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작은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조금만 행동이 느리면 구타당하던 경험 탓이다.

한씨는 지난 4월28일부터 58일간 국회 앞에서 형제복지원 특별법을 통과해 달라며 국회 앞에서 노숙농성을 했다. 그가 열심히 외쳐온 결과 다수 국민은 형제복지원 사건을 ‘멀쩡한 사람을 잡아 가둬 인권유린한 뒤 진짜 부랑인을 만든 사건’ 정도로 기억하게 됐다. 다음은 한씨와 문답이다. 

- ‘멀쩡한 사람’을 ‘부랑인’으로 만든 것도 문제지만, 국가가 물리력을 이용해 강제로 수용한 게 더 문제 아닌가?

“그렇다. 처음에 이 사건을 알릴 때(2012년)는 멀쩡한 사람을 억울하게 잡아갔다고 외쳐야 더 많은 국민을 설득할 수 있다. 처음에 관심을 갖게 하려면 그게 필요했다. 이제와서도 ‘부랑인이 아니었다’고 외치면 실패한다. 국가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 새누리당은 ‘멀쩡한 사람을 부랑인으로 만든 건 안타깝고,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는 데 까지는 동의하지 않았나?

“진상규명의 필요성은 동의했지만 그게 형제복지원 사건 하나만을 위한 특별법인지에 대해서는 계속 의문을 갖는다. 논의는 강제수용으로 발전해야 하는데 지난 7월 공청회에서도 행정자치부는 사회복지전문가를 불러 ‘부랑인’의 기준에 대해서만 계속 다투게 만들었다.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진선미 의원도 ‘대체 뭐가 부랑인이냐’고 물었다.”

- 부랑인의 기준도 모호하지 않나? 

“정부에서 부른 전문가조차 부랑인의 기준을 말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보수진영에서는 ‘국민의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부랑인’ 논쟁에 머물러 있게 하고 있다. 이 사건은 부랑인인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라 ‘강제수용’의 문제점을 밝혀야 하는 문제다.”

사실 1987년 세상에 형제복지원 사건이 알려졌을 당시 언론은 ‘국가가 사람을 함부로 잡아가두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아무개씨는 ‘연고가 있고 부랑인이 아닌데도 귀가조치 되지 않고 있었다’고 말하며…”(중앙일보 1987년 2월1일자) “수용자의 70% 이상이 정상인으로 수용부적격자였다.”(경향신문 1987년 2월3일자) 

자연스럽게 수용인원이 지나치게 많았다는 점이 부각됐다. “보건사회부는 정상적인 사람이 부랑인으로 취급돼 부랑인수용시설에 수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용시설 입퇴소여부를 심사하는 ‘분류심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수용규모도 500명 이하로 제한하기로 했다”(동아일보 1987년 2월5일자) 사법부의 판단도 언론의 문제의식과 일치했다. 

대법원은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에 대해 특수감금에 대한 원심을 파기하면서 “정당한 직무수행행위로 위법성이 조각돼 감금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후 대전 성지원 사건, 충남 양지원 사건 등 제2의 형제복지원 사건이 연이어 터지자 정부는 부랑인 시설수용 법적 근거인 내무부훈령 제410호를 폐지했을 뿐 ‘강제수용’에 대해 반성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사회에서 배제돼 왔다. 국회 앞을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농성장을 쭉 훑고 지나가도 아예 고개조차 향하지 않아도 견뎌야하는 것들이다. 최승우씨는 “사람들이 북적북적해진 거보니 점심시간이네”라고 했다. 점심을 먹으러가는 사람과 굶는 사람은 횡단보도 앞에 서있는 사람과 찬 바닥에 앉아있는 사람으로 구분됐다.   

점심시간 국회 앞은 어수선했다. 오전 11시부터 있었던 장애인단체들의 ‘장애인복지예산 삭감 규탄 기자회견’, 나란히 서있는 사법시험폐지와 사법시험존치 피켓, ‘비정규직 확대는 노사정 합의 위반’이라며 전단지를 나눠주는 한국노총 조합원들, 대학강사의 지위회복을 위해 1인시위 중인 대학강사노조 조합원 등 입법기관에 반영되지 못한 목소리가 넘쳤다. 

“점심시간엔 화장실 가면 안 되지” 

단식 중엔 물과 소금만 먹는다. 심장이 약한 최씨는 빈속에 약도 챙겨먹어야 한다. 피해생존자 박순이씨가 만들어 준 함초소금을 먹었다. 입안이 얼얼한 굵은 소금에 비해서는 먹을 만했다. 먹을 게 물밖에 없다고 계속 들이킬 순 없었다. 화장실은 식당이 즐비한 국회 맞은 편 건물을 지나야 했기 때문이다. 

   
▲ 9일 단식농성장에서 바라본 국회 앞 횡단보도 모습. 사진=장슬기 기자.
 

농성장 맞은 편 건물이 오전 내내 태양을 가렸다. 싸늘한 바람을 막아줄 게 없어 햇빛이 간절했다. 정확하게 오후 1시~3시까지만 볕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사이 최씨와 한씨는 잠시 눈을 붙였다. 가만히 앉아 추위에 떠는 것만으로도 체력은 바닥이 난다. 점심시간이 막 끝난 국회 앞에는 자동차 경적 소리만 울렸다. 

오후 3시경 뉴욕에서 50년간 살다왔다는 할머니가 “데모도 좋은데 이렇게 바뀌겠느냐”며 “낮엔 일하고 남은 시간에 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했다. 한씨는 설득을 시작했다. “저희는 일을 하기 어려워요.” 한씨와 최씨는 기초생활수급자다. 노동을 시작해 수입이 생겨 수입이 박탈되면 병원비 내기도 벅찬 생활이 시작된다. 

“세월호는 2년이 다 돼 가는데도 해결이 안 되는데, 광화문가서 같이 해보면 좋지 않을까?” 할머니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세월호였다. 한씨는 “광화문역에서 하다가 국회로 왔다”고 답했다. 지금은 장애인단체가 부양의무제 폐지를 요구하며 농성장을 차린 광화문역 안에서 한씨는 2012년 3일간 1인 시위를 하다가 쫓겨나 국회 앞으로 오게됐다. 

비판은 쉽다. 지나가면서 한마디씩 거드는 사람들은 늘 찾아온다. 한씨는 “어제는 자신이 우주에서 기운을 받았다는 사람이 와서 얘기하는 바람에 한참 떠들었다”고 말했다. 나에게 “기자면 먼저 일주일을 단식하고 와서 함께 동참해야 하지 않겠냐”고 훈계하는 시민도 있었다. 한씨는 “처음에 말이 통하지 않아도 설명하고 설득하는 게 제 역할”이라고 말했다. 

작은 정성이 모이는 곳 

나눠 쓰는 따뜻함도 있었다. 이불은 두 장인데 한장은 같이 덮고, 하나는 한씨가 목과 얼굴에 감았다. 하나 남는 양말은 최씨가 덧신었다. 연대의 손길도 이어졌다. 농성장이 응달로 바뀌던 오후 3시경 대학생 고동희씨가 물과 핫팩을 사들고 찾았다. 한시간 뒤에는 추혜선 정의당 언론개혁기획단장 등 정의당 관계자 2명도 방문했다. 

   
▲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단식 소식을 듣고 찾아온 시민들. 사진=장슬기 기자.
 

지난해부터 인권연극제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을 주제로 연극을 했던 경기 용인 흥덕고 학생 4명이 핫팩, 양말, 손편지와 후원금을 전달했고, 인권연극제 관계자도 2명 다녀갔다. 사람이 가장 따뜻했다. 단식 3일차가 가장 힘들다는 말을 듣고 연이어 찾아온 사람들로 농성장은 훈훈해졌고, 잠시 추위를 잊었다. 

퇴근 이후 농성장을 찾은 생존피해자 2명은 다음날(10일) 밤에 천막을 치기 위해 아이디어를 모았고, 형제복지원 문제를 도와 온 인권활동가 여준민, 최재민씨도 국회 앞을 찾았다. 최씨는 “어제는 둘이서 멀뚱멀뚱 있었는데 오늘은 사람이 많으니까 참 좋다”며 “같이 얘기하다보니 배고픈 줄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고통은 잠시 완화될 뿐, 다시 자신과의 싸움으로 

최씨가 “갈비뼈가 조여와 아프다”며 “어제(단식 2일차인 지난 8일)는 배와 등이 달라붙으며 누가 잡아당기는 것 같이 아팠다”고 말했다. 한참 떠들어 지친 기색인 한씨는 “어디서 사골국물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실제 그 냄새는 자동차 매연냄새였다. 최씨가 “빵이다”하고 가리켰던 물건은 어둠속에 있던 일회용 핫팩이었다. 

   
▲ 9일 오후 11시경 이부자리를 준비하고 있는 최승우씨. 사진=장슬기 기자.
 

밤이 되자 화장실을 가기 위해 건너편 건물 안에 들어가면 얼었던 몸이 잠시 녹으며 머리가 띵했다. 배고픔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하루 종일 들이킨 매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단식 3일차 취침을 준비하는 두 사람은 내일 날씨를 확인하고 물을 끓였다. 밤에 먹을 물을 보온물병 3개에 나눠담고 껴안고 잘 물통에도 물을 채운 뒤 이부자리를 깔았다.  

“그래도 하루 종일 같이 있다가 보내려니 더 아쉽네.” 최씨는 기자와 이별을 아쉬워했다. 오후 11시 신호등에서 파란불을 알리는 소리, 오토바이의 굉음, 추위 등과 싸우며 잠들 시간이다. 그리고 잠시 깼을 때 찾아오는 외로움과 싸워야 할 때다. 집에 가는 차안에서 얼었던 귀가 녹으며 피로가 몰려왔다. 이날만큼은 굶는 게 더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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