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대 대통령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향년 88세로 22일 오전 서거했다.  

정치권은 일제히 애도의 뜻을 전했다. 

새누리당 김영우 수석대변인은 이날 추도 구두논평을 통해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큰 별이자 문민정부 시대를 연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가슴깊이 애도한다“며 “유가족에게도 심심한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고 말했다. 이어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 운동 시절 23일간의 단식투쟁을 하는 등 온몸을 다해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면서 “14대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는 금융실명제 실시와 하나회(육군사관학교 출신 인사들의 사조직) 척결 등 우리 사회의 개혁을 위해서도 강단있게 일했다”고 덧붙였다. 

새정치민주연합 김성수 대변인 역시 추도 구두논평을 통해 “오늘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은 한국민주주의의 거목으로,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큰 지도자였다”며 “3당합당과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등 김 전 대통령에게 지워질 정치적 책임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민주화에 대한 고인의 업적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 다시 한 번 고인의 영면을 기원하며 명복을 빈다”고 밝혔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빈소를 방문해 “재임 중에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위대한 개혁 업적을 만드신 불세출의 영웅”이라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 그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장례절차가 마무리 될 때까지 빈소를 지키며,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로서 상주역할을 맡겠다는 뜻도 밝혔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인 이희호 여사도 애도를 표하며 “김영삼 전 대통령은 남편과 함께 민주화를 위해 오랫동안 투쟁했다”며 “우리 국민은 김영삼 전 대통령을 대한민국을 변화시킨 대통령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밝혔다. 

직접적 사인, 패혈증·급성심부전

이날 오전 서울대병원 브리핑에 따르면 사망에 이른 직접적 원인은 허약한 전신 상태에서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이 겹쳐서다. 이어 병원 측은 “고인께서는 2008년부터 작은 뇌졸중이 있었고 이후 반복적인 뇌졸중과 협심증 및 폐렴 등으로 수차례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2013년 4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반신불수를 동반한 중증 뇌졸중과 폐렴으로 입원한 바 있다”고 전했다.  

서울대병원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일 정오 경 고열과 호흡곤란 증상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상태가 악화돼 지난 21일 오후 중환자실로 옮겨 치료를 받다 사망했다. 서울대병원이 밝힌 김 전 대통령의 정확한 서거 시각은 22일 오전 12시22분이다. 

장례형식 미정, 국가장 유력 

제14대 대통령을 지냈기 때문에 김 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19일 시행된 '국가장법'이 규정한 국가장(國家葬)의 대상이 된다. 이는 기존 ‘국장·국민장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국장(國葬)과 국민장(國民葬)을 국가장이라는 명칭으로 통일시켰다.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하려면 유족 등의 의견이 먼저 고려돼야 하고, 이후 행정자치부 장관의 제청으로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현직 대통령의 결정이 나와야 한다. 

국가장이 결정되면 국가장장례위원회(대통령 임명 위원장 1명, 위원장이 임명·위촉하는 6명 이내 부위원장과 필요한 수의 위원)가 설치되며 장례 기간에 조기가 게양된다. 국가장의 구체적인 방법과 묘지선정 등은 장례위원회에서 결정한다. 김 전 대통령의 발인일은 26일로 명시돼 있어 일단 5일장을 치르는 것으로 결정됐다. 

국가장 비용은 국고에서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다. 다만 조문객 식사비나 노제·삼우제·49일재 비용이나 묘지 설치를 위한 토지 구입·조성 비용 등은 제외된다. 과거에는 법률에 따라 국장 시 영결식 당일 관공서가 휴무였지만 개정된 국가장법에서는 관공서 공휴일 휴무제가 폐지됐다. 

   
▲ 지난 2010년 4월 동아일보 창간 기념행사에 참석한 김영삼 전 대통령. 미디어오늘 자료사진.
 

국가장으로 통일이 된 것은 지난해 11월부터다. 이승만 전 대통령과 윤보선 전 대통령은 가족장으로 진행됐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 국장, 최규하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김영삼의 기록들…최연소·최다선·최초제명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만 25세의 나이로 3대 국회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최연소 국회의원이 됐고, 아직 이 기록은 아무도 깨지 못했다. 1965년 민중당 원내총무로 선출되면서 최연소 원내총무가 됐고, 1974년 신민당 총재로 선출돼 만 45세에 최연소 야당총재의 기록도 보유했다.  

그는 한 때 최장 단식 기록도 보유했다. 전두환 정권시절인 1983년 5월 가택연금 당시 23일간 단식투쟁을 했다. 5·18 3주년을 맞아 민주회복, 정치복원 등 민주화 5개항을 내걸고 단식에 들어갔지만 전두환 정권은 그가 단식을 한 지 1주일이 지나자 그를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켰다. 

의원직 제명도 헌정사상 최초였다. 김 전 대통령은 1979년 당시 제1야당인 신민당 당수였는데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민중혁명으로 팔레비왕정 체제가 무너진 것을 언급하며 한국도 이러한 전철을 밟지 말라”고 했고, 이에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김영삼 의원 제명 방침을 정했다. 

대한민국에서 첫 문민시대를 연 것도 그의 기록이다. 외신도 이 부분을 강조했다. AFP통신은 그에 대해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대통령이었다는 점을 언급하며 “그의 당선으로 30년 이상 이어진 군정이 막을 내렸다”고 알렸다. 이어 한국 민주화 운동을 이끈 인물로 1980년대 초 2년의 가택연금을 당했던 사실, 대통령 취임 후 ‘역사 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전임인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처벌했던 점을 덧붙였다.

그는 최다선 국회의원이기도 하다. 그는 1992년 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까지 3·5·6·7·8·9·10·13·14대 의원으로 활동해 9선을 기록했다. 김종필 전 총리, 박준규 전 의원도 9선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김영삼의 어록 “굶으면 죽는다”

김 전 대통령이 긴 정치여정을 통해 남긴 말도 많다. 그는 국회의원에서 제명되자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고 해 민주화의 의지를 드러냈다. 1987년 노태우 당시 대선후보에 대해서는 “쿠데타 한 사람이 대권을 잡는 것은 군정의 연장”이라고 비판했다. 같은해 국회의사당에서 단식농성을 하면서는 “박종철군 사건으로 온 국민이 우울한 지금, 민정당의 6·10 전당대회에서 하는 대통령 지명대회는 초상집에서 춤을 추는 격”이라고 말했다. 

대통령 취임 이후 1993년 청와대 기자간담회에서는 “추석 때 떡값은 물론 찻값이라도 받지 않을 것”이라며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말했고, 같은해 신경제계획 민간위원과 조찬에서는 “토지와 건물 등 부동산을 갖고 있는 것이 고통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같은해 모범수출업체 대표들과 조찬에서는 개혁의 속도를 자전거 타기에 비유하며 “너무 급히 달려도 위험하지만 달리다가 멈추면 쓰러진다”고 말했다.  

1993년 서울대 졸업식에서는 “분노와 저항의 시대는 갔으며, 투쟁이 영웅시되던 시대도 갔다”고 말했다. 1994년 ‘개의 해’를 맞아서는 “개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 사랑을 받지만, 또 한편으로는 달리는 기차를 보고도 짖는다. 그러나 개가 짖는다고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1995년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일본 정치인의 망언이 이어지자 “이번 기회에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말했다. “버르장머리를 고쳐줘야 한다”는 발언은 2008년 무소속 출마를 선언한 김무성 의원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공천심사가 엉망이라고 비판하면서 했다. 2003년 최병렬 당시 한나라당 대표를 방문해 단식을 중단할 것을 요청하며 “나도 23일간 단식해 봤지만, 굶으면 죽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는 상도동을 방문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에게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박근혜는) 사자가 아니다. 아주 칠푼이다. 사자가 못 된다”고 말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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