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여러분께서 안정된 기반 위에서 경제 번영을 이룬 것은 과연 어떤 층의 공로가 가장 컸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여러분의 애써 이루신 상업기술의 결과라고 생각하겠습니다만 여기엔 숨은 희생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장해 가는 어린 자녀들은 하루 15시간의 고된 작업으로 경제발전을 위한 생산계통의 밑거름이 돼 왔습니다.” 

1969년 12월19일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감독관에게 쓴 편지내용이다. 같은 해 6월 전태일은 평화시장 최초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창립해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을 알렸다. 노동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기 시작했고, 당시 노동실태를 조사해 노동청 등 국가기관에 호소했다.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오전 8시부터 오후 11시까지 하루 15시간동안 작업했고, 시다(견습공)들은 잠이 오지 않는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아가며 일을 했다. 전태일의 요구는 1일 노동시간을 10~12시간으로 단축, 일요일은 휴일 보장, 건강진단 실시, 임금 인상 등이었다. 당시 시다들의 일당은 약 100원이었는데 당시 커피 값이 50원이었다.  

이런 현실을 알리기 위해 전태일은 대통령 박정희에게도 편지를 썼다. 전태일은 편지에서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이냐”며 “근로기준법에 따라 동심(미성년 노동자)들 보호를 지켜달라”고 했다. 이 편지는 박정희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국가기관에게 법을 지키라는 정당한 요구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태일은 1970년 11월13일 분신했다. 

   
▲ 전태일 동상. ⓒ미디어오늘 자료사진
 

노동자들에게 돌아 온 대답은 유신헌법이었다. 이어진 신군부 정권에서도 노동탄압은 계속됐다.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게 된 이후 민주화 인사가 대통령이 됐다. 1979년 가발 생산업체였던 YH무역이 폐업을 하자 노동자들이 폐업 철회와 회사 정상화, 근로자 생존권 보장 등을 주장했고 야당인 신민당사에서 투쟁했다. 당시 신민당 총재는 김영삼이었다.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고 나섰던 신민당 총재 김영삼 의원에 대해 국회 징계동의안이 통과돼 의원직을 박탈됐다. 이에 반발하는 흐름은 부마항쟁과 10·26사태로 이어지면서 유신체제 몰락의 한 원인이 됐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6년 12월 정리해고와 파견근로법 등 ‘노동악법’이 날치기로 통과됐다. 

외환위기와 함께 김영삼 정부가 끝났고, 정권교체로 전태일 못지않게 박정희 정권에 맞섰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됐다. 정리해고와 파견이 시행됐고 외환위기의 책임은 온전히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극복됐다.  

전태일을 좀 더 닮은 대통령은 노무현이었다. ‘바보회’를 조직했던 전태일처럼 노무현의 별명 역시 바보였다. 고졸 출신의 인권변호사가 대통령이었지만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자마자 2003년 “노동자들의 분신으로 투쟁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말을 담화문에 발표하지 못했다며 관계 장관을 질책했다. 

“나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고 했던 전태일의 정신은 노무현 정부조차 계승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의 노동탄압은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김주익(한진중공업), 하중근(포스코) 등 죽어가는 노동자들은 이어졌다. 한미FTA, 비정규직 법 등 재벌친화적인 정책들은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다. 

노무현과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겠다던 통합진보당은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불리는 선거에서 부정사태가 벌어져 서로 갈등하다 민심을 잃었고, 청계천을 복원하겠다며 주변 상인들을 몰아 낸 이명박은 대통령이 됐다. 노골적으로 친기업정책을 쓰겠다고 한 이명박 대통령에 이어 박근혜가 대통령이 됐다. 그는 노동자를 탄압했던 박정희 시대를 계승했다. 

박근혜 대선 후보 당시 김대중을 ‘슨상님’으로 모시던 일부 동교동계 인사와 김지하 등 민주화 투사들이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지난 2012년 8월 박근혜 당시 후보는 청계천 6가에 있는 전태일 동상에 헌화하려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에게 가로막혔고, 같은 해 10월12일 조선일보 등 보수 신문에는 전태일의 동료가 박근혜 선대위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나왔다. 

   
▲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가 지난 2012년 8월 서울 종로 청계천 6가 전태일 다리를 방문, 헌화를 하려다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으로부터 항의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조선일보 보도에 나온 김준용은 실제로 전태일과 만난 적이 없으며, 뉴라이트 인사였다. 국민대통합을 내걸어 당선된 박근혜 정부는 지금 비정규직을 확대하고 사용자가 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도록 하면서 이를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후보 시절 전태일과 화해하겠다는 모습은 거짓이었던 것이다. ‘사람이 먼저’라고 내걸었던 야당의 “비정규직 축소와 근로시간 단축”은 구호에 머물러 있다. 

전태일의 어머니 고 이소선씨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태일이는 사람을 참 좋아했어. 같은 노동자를 너무도 사랑했다고. 그러니 열사나 투사보다 그냥 동지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 전태일을 비범한 사람으로 만들지 말고 노동자들이 동지 전태일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이다. 

권력이 필요할 때만 전태일을 소환했다. “우리는 재봉틀이 아니”라고 절규했던 11월13일이 올해로 45주기를 맞았다. 쌍용차, KTX, 콜트콜텍, 650만 비정규직과 월급 200만원을 못 받는 940만 노동자들. 전태일의 얼굴을 한 권력자가 아닌 여전히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전태일의 동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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